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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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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한국어 라이센스 버전을 작년 12월 초에 보았다. 그리고는 이에 대한 감상을 남기리라 다짐했으나, 마침 설 연휴로 본가에 있을 때 2012년 아레나 투어 버전의 DVD가 집에 있는 걸 발견하고는 바로 다시 감상에 들어갔다. 음원으로도 감상할 수 있는 후자의 특성상, 이 글은 사실상 2012 아레나 투어 버전에 대한 감상평에 더 가까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두 버전은 상이한 연출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것들은 오히려 두 '별도의' 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할 수도 있다. 따라서 동일한 소스(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원작)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해도, 필자는 12월 초에 보았던 한국어 라이센스 버전과 2012 아레나 투어 버전 간에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해보면서 관람하는 재미를 추가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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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었던 점은, 해당 공연이 교회(광림교회) 건물 중 고층 일부를 사용한 '광림아트센터' 건물에서 공연되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그리스도교적 색채가 짙은 작품이 교회에서 상연되었다는 것 자체가 재밌는 사실이 될 수도 있지만, 포인트는 거기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의 포인트는 신앙심 가득한 기독교 신자의 눈으로 관람할 경우, 그들의 입장에서는 불경스럽기 그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라고도 느낄만한 지점을 여러 가지 가지고 있다는 데에 있다. 나는 그 지점들에 천착하여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 대한 두 번째 글을 써 보고자 한다. 이 글이 해당 뮤지컬에 대한 첫 번째 글이 아닌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직전에 <모든 것은 결국 우리 '엄마'의 뜻대로.>라는 제목을 달아, 오늘 서술할 나의 이야기의 프리퀄(prequel)에 해당하는 글을 이미 기고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뮤지컬을 감상하고 나서 묵직한 생각의 덩어리가 생겼고, 그로부터 이건 글을 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유구한 역사를 지닌 예수의 이야기인만큼 단지 그냥 쓸 수는 없다는 생각 또한 들었기 때문에, 관련된 책을 추가적으로 읽는 작업은 필수적일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김에 한동안 식어있던 일종의 학구열이 갑자기 불타올라, 예수의 행적과 부활을 다룬 성경의 '사(4개)복음서'를 설명한 책들을 샅샅이 뒤진 후, 광화문의 한 서점에서 책을 수령하여 집에 가는 길에 그 책들을 아주 재밌게 읽어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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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글에 해당하는 두 번째 글(시리즈라고도 할 수 있겠다)은 약간의 학술적 설명을 덧붙여 풍부화해낸, 일종의 감상문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시리즈는 두 번째 내용에 조금 더 학문적 색채를 더하여, 신앙에 의구심이 많은 필자가 이해한 그리스도교와 예수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이 시리즈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추가적으로) 그럼에도 필자는 복음서 자체는 정작 읽지 못했다. 그래서 이 두 번째 글은(그리고 세 번째 글도) 복음서에 직접적으로는 접근하지 못한, (접근했다 하더라도 잘 쓸 수 있는 것은 또 별개의 영역이지만) 다만 복음서를 다룬 학문적 책을 기반으로 쓰게 될 감상문이 될 것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관람의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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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포인트- 지극히 인간적인 세계관(정확히는 근대적 세계관)과 그 안에서 예수와 그 외의 인물들을 다루었다는 점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뮤지컬은 (신자의 입장에서는) 틀릴 가능성이 큰 해석이지만, 나와 같이 의구심이 많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흥미롭고 충분히 설득력 있는, 재미있는 해석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 뮤지컬에 대한 감상을 심화시키기 위해, 예수와 복음서 관련 여러 저서를 읽었는데, 이 포인트와 관련해서 관련 근거를 가져온 책은 카렌 암스트롱의 <신의 역사>라는 책이다. 결론적으로, 이 뮤지컬에 대한 감상의 귀결은 이 책의 내용을 기반으로 했을 때 크게 다음의 내용으로 설명되어 정리될 수 있겠다. 이 뮤지컬은 2000여년 전의 아주 오래 전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이 뮤지컬은 우리가 여전히 영향을 받고 있는 시각인 '근대적 시각'에 의해 조명된 예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카렌 암스트롱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6세기 말부터 서구는 과학 기술 문명 시대로 진입함으로써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회와 새로운 인간관을 낳았다. 이러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신의 본성과 역할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주었다. (중략) 서구화 과정이 시작되었고 그와 동시에 신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세속주의 물결이 밀어닥쳤다.(p.509-510)"

 

"근대 기술 문명 사회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이전의 모든 문명은 농업 생산에 의존했다. 문명은 도시 생활의 산물이다. (중략) 유일신 신앙은 다른 주요 종교 이데올로기와 동시에 중동과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발달했다. 그러나 그렇게 농업에 기반한 문명은 모두 취약했다. 늘 작황, 기후 변화, 토양 침식 같은 변수에 좌우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나 새로운 서구는 농업에 의존하지 않았다. 기술로 무장한 새로운 서구 사회는 농업 의존에 따른 지역적, 시간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중략) 이러한 변화는 기존 법률을 신성 불가침으로 여겼던 과거 농경 중심 사회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서구 사회에 기술 문명이 도래하면서 새로운 자율성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p.519)"

 

"급진 사상가들이 유럽 대륙에 확산되면서 교회사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려는 역사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중략) 많은 신학자들이 이해한 그리스도의 인간성 문제는 이제 더는 신비나 교리가 아니라 '이성의 시대'의 과학적 연구로 해결할 문제였다. (중략) 이 시도는 근대 회의주의 발생에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는 신을 따르는 경건한 나라를 세우기를 바랐고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이 실패하자 절망 속에서 죽음을 맞았을 뿐이다.(p.530)"

 

 

여기서 카렌 암스트롱의 마지막 말이 꽤나 묵직하게 다가오고 있지는 않은가? 필자는 이 문장에서 이 뮤지컬이 가장 불경스러워 보일 수 있는 포인트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를 지지하는 씬(scene)이 바로, 이 뮤지컬의 마지막 장면과 그 바로 이전 장면이다. 마지막 장면은 바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한데, 마가복음에 따르면 십자가에 못박힌 채 예수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는 부분이다. 이때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바로 예수의 '부활'이다. 그러나 뮤지컬은 부활하는 예수의 모습을 담고 있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힌 채 괴로워하며 울부짖는 모습에 상당히 긴 시간을 할애한다. 그리고 그 장면이 지속되는 동안 수많은 악기들의 '불협화음'이 울리면서 그 장면의 비극성이 고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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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콜 촬영이 가능한 날에 찍었던 영상의 캡쳐본이다.

 

 

그리고 이를 더 심화시키는 장면은, 장면의 순서 상으로 십자가 처형 장면 이전에 나오는 장면이다. 그 장면은 바로, 유다가 마치 '부활'하여 (참고로 예수님을 바리새인들에게 팔아넘긴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살했다) 다음 장면에서 곧 십자가에 매달릴 예수에게 그러나 시간상으로는 이미 못박히고 난 후인,"도대체 뭘 위해 그러셨나요? 천국에서 모하메트(무함마드:이슬람교의 예언자)는 만나셨나요~ 난 정말 궁금해~"라는 노래를 빛이 나는 무대의 가수처럼 부르고 외치는 장면이다. 이 두 장면은 신앙인의 눈으로서는 많이 불편할 수 있는 장면이다. 자신들을 구해줄 구원자를 분명 하나님이 보내주신다고 했는데, 그 구원자라는 자는 영웅처럼 이곳저곳을 다니며 정복해다니기는 커녕, 다분히 '한 인간'으로서 인간적 감정을 느끼는 모습으로 삶을 마무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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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추가로 유다는 기독교에서 신의 아들인 예수를 돈에 눈이 멀어 팔아넘긴 희대의 악인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이 뮤지컬에서 이 유다는 오히려 희대의 악인이라기 보다는, 로마로부터의 지배 상황을 벗어나고자 앴는 혁명가 예수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정치적 협동자였으나, (이는 2번 포인트와도 연결된다) 예수가 다시 이스라엘을 되찾고자 하는 이상을 좇기보다 점차 대중들의 인기를 얻는 슈퍼스타가 되어 자신의, 그리고 그들의 이상을 자꾸만 잊어가는 것 같아 경각심을 깨워주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유다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기 위해 예수를 팔아 넘기는 것처럼 묘사되기 까지한다. 그러나 뮤지컬에서도 예수는 유다가 배신할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유다에게 네가 해야할 일을 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유다에게, 이 뮤지컬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어쩌면 차마 알기를 꺼려했던 유다의 감정, 즉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차마 팔아넘길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꽤나 긴 흐름에 걸쳐 조소하며 결국 괴로워하다가 목 매달아 죽게되는 장면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적어도 뮤지컬에서 유다가 예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또다른 극의 주인공이면서 예수를 '남자로서' 사랑하는 막달라 마리아의 넘버(노래)의 멜로디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부르는 장면을 보면 느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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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막달라 마리아가 도대체 누구일까 궁금했는데, 왜냐면 그 당시 마리아라는 이름은 굉장히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흔히 이때의 막달라 마리아는 매춘부라고 알려져 있다. 사복음서에서 이 막달라 마리아가 누구인지에 대한 서술의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카렌 암스트롱의 <여인의 눈으로 본 예수>에서의 내용에 따르면, 그녀는 예수의 여성 제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해진 여인이다. 또한 안용성의 <교회를 위한 성서학>에 따르면, 그녀는 예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으로 누가복음에서는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을 "죄인"으로 서술하지만 매춘부라고 명시하지는 않는다. 안용성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가 "전에 매춘부였던 막달라 마리아"라고 알려져 온 것은 6세기에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어느 설교에서 언급한 내용이 사실처럼 전달되어 내려온 것이다. 그레고리오 1세는 이 여인이 전에는 남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자기 몸에 바르던 향유 옥합을 깨어 예수의 발에 부음으로써 회개와 헌신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교했다는 것이다.

 

성서학적인 설명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였지만 둘은 대조된 행동을 한다. (여기서의 마리아는 베다니의 마리아이긴 하지만) 배신하는 유다와 헌신하는 마리아의 상반된 모습이 성경에서는 아주 잘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뮤지컬에서는 그 구도조차 지극히 더더욱 인간화되기에 이른다. 예수를 신의 아들로서 따랐다는 성경에서의 막달라 마리아는 뮤지컬에서 예수를 '남성으로서' 사랑하는 여자로 줄곧 나온다. 심지어 한국 버전은 이 부분마저 수용되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예수를 단지 흠모하고 향유를 바르고 싶어하는 마음만 표현될 뿐이지만, 2012 아레나 버전에서는 좀더 둘 간의 섹슈얼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2번 포인트- (일단 노래가 너무 신나서 흥타게 된다는 점) 유비적으로 표현되는, 대중에게 슈퍼스타로서 추앙되고 멸시받기도 하는 예수의 모습을 (조금은) 냉철하게 살펴보기.

 

마치 이 뮤지컬에서 예수는 실력이 뛰어난 락스타처럼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뮤지컬의 제목에 '슈퍼스타'가 붇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이 뮤지컬의 총 제작자인 앤드류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즉, 예수를 추종하기도 하고 십자가 처형에까지 밀어넣기도 하는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그 예수라는 존재는 말 그대로 그들에게 '슈퍼스타'였다는 점에서 유비적으로(비유적 형태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유대인 집단이 오늘날로 치면, 여론을 형성하는 일종의 대중(the public)이었다는 것이 된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작년 12월에 봤떤 한국어 라이센스 버전과 12년 아레나 투어 버전 간의 가장 극명한 차이점 중 하나이기도 했다. 바로 2012년 버전은 현대 '현재의 시점'에서 표현한 예수와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대중들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일 재밌었던 점은, 사실상 예수가 십자가형으로 못밖아지게끔 이끈 가야바 대제사장이 정장을 입은 말끔한 고위급 화이트컬러의 중년 남성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헤롯 왕은 마치 TV 쇼의 방송 진행자처럼 반짝거리는 옷을 입고 간드러지게 마치 예수에 대한 처형이 TV 속 에피소드의 한 장면인 것처럼 우스꽝스럽게 표현된다. 2000년도 넘은 이야기가 그 플롯(plot)을 유지한 채 수천년의 시간을 이동하여 이곳으로 온다면, 이 혼란한 세상을 굽어살피고 해결한답시고 등장한 '인간'이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 칭하며(이 내용은 4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내용은 아니긴 하지만) 사람들을 이끌면서 더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처럼 보일때 그런 그를 오늘날의 법적 형태로 처벌하고 우스꽝스럽게 공론화시키는 사람의 이미지로는 앞서 설명한 화이트컬러의 중년 남성과 반짝거리는 옷을 입은 TV 속 진행자의 모습이 내게는 표상되었다. (참고로 2012 버전에서 가야바 대제사장 역을 맡은 배우의 목소리는 목소리가 마치 콘트라 베이스 악기를 연주하면 나는 소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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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이야기는 조금 예민할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이 뮤지컬은 예수가 행한 방식을 (그대로는 아닐 것이나) 자신을 교주라고 칭하는 자가 교묘히 그것을 모방하여 잘못된 형태로 자신이 예수를 이을 구원자(메시아)라고 표방하여 하나의 종교 집단을 구성하는 방식과 굉장히 유사한 방식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조금 냉철한 눈으로 바라본다면, 나는 '만약' 예수 역시 (공식 종교로 표명되지 못하여) 그저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 칭하는 한낱 사이비 종교의 교주 중 한 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법도 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에 덧붙여 이러한 대중과 관련된 슈퍼스타로서의 예수의 이미지가 비춰지게 된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로마의 핍박을 받고 있었던 상황에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정치적 지도자 혹은 구원자(메시아) 혹은 영웅을 강렬히 원해서 그가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기를 바랐다는 상황에서 근거했다는 것임을여러 관련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던 내용이다.

 

여러 가지 얽혀 있는 생각들을 정리하고 숙성하는 시간을 갖다 보니, 그리고 관련 내용을 다룬 저서를 읽어 내용을 덧붙이려고 하니 감상을 추천하기에는 아쉽게도 이미 공연이올해 1월까지 하고 벌써 막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이는 매우 안타까운 사실이지만(필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일 수도있다), 또한 1번보다 2번의 내용이 부실하게 다뤄진 바에 따라 좋은 글로 내 생각을 구현해내지 못한 점은 너무나 아쉽지만,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자 했다는 점을 지그시 언급하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이 글의 마지막 시리즈는 다음 번 기고 시 올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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