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10월, 한 헝가리계 미국인 남자가 죽으며 유언을 남겼다. 그해 저널리즘에 기여한 미국 언론인에게는 상을 부여할 것을 명령하며 50만 달러의 기금을 전달한 것이다. 그렇게 미국 기자들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퓰리처상'이 만들어지게 된다.
현재 퓰리처상은 미국의 신문 저널리즘, 문학 및 음악 분야에서 가장 우수한 기여자로 꼽히는 사람에게 수여된다. 아무래도 사진 부문이 가장 유명한 편으로, 한국에서 무려 4차례에 걸쳐 퓰리처상 사진전이 열렸다. 매번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으며 이번 전시에서도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실제로 전시회장은 평일 점심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람객들이 가득했다. 강렬한 사진들 앞에서는 방지턱에 걸리듯 멈춰서야 했다. 먼발치에서 까치발을 들어가며 그림을 힐긋거리다가 순서가 오면 가까이 다가가서 감명을 받곤 했다. 때로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그림 앞에서 한참이나 시선을 빼앗기기도 했다.
예술의전당에서 개최되는 「퓰리처상 사진전」에서는 1942년부터 2024년 사이에 찍힌 역사의 장면들을 전시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한국과 베트남 전쟁을 거쳐서 뉴욕의 9·11테러, 시리아 내전, 팬데믹의 적막한 거리, 그리고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절박한 순간까지 강렬하게 전달한다.
단언컨대 허투루 보고 넘긴 사진은 단 한 점도 없다. 엄선된 사진들 중에서 다시 한번 선택된 사진들이었으니, 지루하지 않은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1942년부터 시작되는 시간여행을 마치고 전시장을 나오는 순간 자연스럽게 깨달음을 얻었다.
이것은 사진 콘테스트가 아닙니다.
그해 최고의 뉴스, 그것이 퓰리처죠.
/ 윌리엄 스타이더 (1991년, 1993년 퓰리처상 수상)
퓰리처상이 있어서 위대한 작품들이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기자들은 상금과 명예를 위해서 카메라를 들고 총구 앞에 뛰어들지 않는다. 퓰리처상은 이미 그곳에서 존재하고 있던 기자들을 기꺼이 발견해 내고 조명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기자들은 항상 경계에 서서 뷰파인더로 세상을 바라본다. 삶과 죽음의 경계, 사랑과 증오의 경계,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경계에서 덤덤하게 셔터를 누른다.
삶과 죽음의 경계
생명을 불어넣다(GIVING LIFE), 론 올슈웽거
론 올슈웽거는 세인트루이스의 아마추어 사진작가이자 가구 도매업자였다. 화재 현장에서 밤새 사진을 찍다가 집으로 돌아가던 그는, 가지고 다니던 경찰 무전기에서 또 다른 화재 소식이 들려오자 그곳으로 향했다. 1988년 12월 31일 오전 6시의 일이었다.
올슈웽거는 화염에 휩싸여 무너지는 아파트 앞에 서 있었다. 소방관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뛰쳐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긴박하게 인공호흡을 시작했지만 얼마 후에 아이는 마지막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날은 아이의 두 번째 생일이었다.
"다른 화재 현장에서는 희생자를 돕느라 미처 사진을 찍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화재 현장에서 도울 일이 없어서 사진을 찍었다고 말했다. 화재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지 못한 일을 마음에 걸려 했지만, 훗날 그의 사진이 많은 사람을 살려내게 된다. 「생명을 불어넣다」가 세인트루이스 포스트지의 호외판 1면에 실리며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이다. 이후에 화재 예방 프로그램이 확대되었고, 지금도 공공기관과 학교, 지역 소방서에는 화재경보기와 함께 올슈웽거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사랑과 증오의 경계
사이공식 처형(Saigon Execution), 에디 애덤스
한눈에 봐도 마른 몸. 제대로 정돈되지 못한 셔츠. 겁에 질린 듯한 표정. 초라하고 무력해 보이는 남자의 머리에 총구가 들이밀어져 있다. 애덤스는 처음에 단순한 위협이라고 생각하고 카메라를 들었지만 셔터가 눌리는 순간 총이 발사됐다. 손이 묶여있는 포로를 길거리에서 권총으로 살해한 것이다. 왼쪽의 남자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사람들에게 '냉혹한 살인마'로 낙인찍혔다. 뷰파인더로 현장을 직접 봤던 에디 애덤스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사진에는 비밀이 있었다. 불쌍한 피해자로 보였던 남자는 악명높은 베트콩의 간부 '구옌 반 렘'이었다. 군인의 일가족을 무참히 살해하고 강간까지 한 남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순식간에 가족들을 잃은 피해자가 바로 총구를 들이밀고 있는 '로안'의 부하였다.
지금도 많은 기자들이 전쟁 중인 현장에 직접 뛰어들곤 한다. 그리고 카메라가 없었다면 잊혀져 갔을 순간들을 붙잡아 둔다. 그 과정에서 「사이공식 처형」처럼 증오가 증오를 낳은 상황들이 포착되기도 한다. 하지만 폭력이 담겼던 렌즈에 다음 날 사랑이 들어차기도 한다. 「코소보 탈출」이라는 사진에서는 전쟁 중에 철조망 사이로 아이가 넘겨지는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사랑하는 아이라도 살리려고 하는 간절함이 담긴 사진이다.
기자들은 사랑과 증오의 경계에서 카메라를 들고 묵묵히 선다. 때로는 사랑이 넘치는 현장을 바라보며 함께 기뻐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관망하며 괴로워하기도 한다.
과거와 현재의 경계
앙상하게 마른 아이의 뒤로 독수리가 기다리고 있는 사진이 있다. 설명만 들어도 금세 눈에 그려질 만한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케빈 카터가 찍은 「수단의 굶주린 소녀」다.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인정받은 사진이지만 동시에 언론인의 보도 윤리에 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성 대신 상을 택했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허기진 어린아이를 구하지 않고 사진을 찍을 생각부터 했냐며 거센 항의를 했다. 카터는 사진을 찍은 뒤에 바로 독수리를 쫓아버리고 아이를 도왔다고 해명했지만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저는 인생의 고통이 기쁨을 뛰어넘어, 더 이상 기쁨 따위가 없는 지점에 도달하고 말았습니다. ... 저는 살육과 시체들과 분노와 고통의 기억에 쫓기고 있습니다. 굶주리거나 상처를 입은 아이들, 권총을 마구 쏘는 미친 사람, 경찰, 살인자, 처형자 등의 환상을 봅니다."
죄책감과 비난을 견디지 못한 케빈 카터는 사진을 찍은 3개월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년 33세였다.
위는 전쟁 현장에 뛰어든 케빈 카터를 친구가 찍은 사진이다. 명예만을 원하는, 자신의 인생에 굵직하게 남길 작품을 얻기만을 바라는 사진 작가에게 직접 전쟁에 뛰어들 용기가 있었을까? 케빈 카터는 인간의 잔혹함이나 세상의 참상을 알리고자 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조용히 묻혀져가는 절망을 포착하여 쏘아 올리려고 했을 것이다.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수 있도록.
언론인의 보도 윤리는 여전히 논쟁을 띄고 있다. 언론인은 보도를 시작함과 동시에 해당 사건에 관여하지 말고 끝까지 관찰자로만 임해야 한다는 저널리즘 원칙이 있는 반면, 취재 과정이 비도덕적이더라도 결과가 정의롭다면 과정의 비윤리성을 인정해도 되는가에 관한 질문이 화두에 오르곤 한다.
개인적으로는 관찰자로서의 언론인을 존중하고 싶다. 그들이 때로는 목숨까지 걸며 찍어낸 사진들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곤 한다. 세상 곳곳에서 '모두의 눈'을 자처하며 행복을 전염시키기도 하고, 동정심이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기자나 사진작가라는 직업을 떠나, 한 사람이 신념과 열정,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찍은 사진을 감상하며 풍부한 감정을 느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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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커다랗게 인쇄한 사진 작품들을 부연 설명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이미 인터넷에 공개된 작품들이 대다수지만 직접 전시장을 방문하기를 추천하는 이유가 있다. 각각의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둘러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은 핸드폰 화면으로 바라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동이 느껴진다. 또한, 다른 관람객들과 같은 사진을 보고 감정을 공유하며 감정의 시너지가 발생하기도 한다.
「퓰리처상 사진전 - 슈팅 더 퓰리처」는 2025년 3월 30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이어진다.
사진 출처: Alamy Stock Ph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