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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포스터] 퓰리처상 사진전.jpg

 

 

[“퓰리처상 사진전은 단순히 과거를 보여주는 전시가 아니다. 퓰리처상 수상작들은 현재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이를 이해할 지혜가 있다면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사진가들이 위험한 현장을 지키는 이유”] - 퓰리처상 사진전 전시 기획자 시마 루빈Cyma Rubin

 

사진은 누구나 찍고 간직할만한 것이 되었으며, 그만큼 모두에게 ‘쉬운’ 매체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낡은 얘기일 정도로 사진이 일상에 들어온 지 오래되었다. 목적은 조금씩 다르더라도 사진을 통해 무언갈 남기는 행위가 이렇게 빠르고 빈번하게, 습관적으로 쉴 새 없이 이루어진다는 건 세계 어디에서나 공통적일 거라는 생각도 관성처럼 했었다.


하지만 그런 현실 극단에 존재하는 사진들,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사진의 세계가 있다. 목숨을 걸고 찍는 사진, 단 하나의 컷으로 한 사람의 생애 전후를 얘기하는 사진, 역사적인 찰나이면서 어떤 절정의 기록이 되는, <퓰리처상 사진전>에서 볼 수 있는 장면들이다.


이 전시에는 사실 그대로여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가 시대별로 이어지고 있었다. 전쟁과 마약, 가난과 질병에 관한 주제가 대부분이었지만 구도와 색감이 아름답게도 느껴진다는 아이러니한 기분도 들었다. 그럼에도 사진에 담긴 이야기의 대부분을 가장 쉬운 말로 치환한다면 ‘불행’ 그 이상과 이하도 아닐 거란 사실이 의아하기도 하였다.


잔혹한 현실과 이미지의 시각적 아름다움의 낙차에서 사진예술의 가치가 생겨난다는 가정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방식의 해석은 어쩐지 예술에 오명을 씌우는 일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대신 이렇게 긴박한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는 사진가의 행위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더 생각해 보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래서도 사진을 이미지 자체로 감상하기보다는 설명을 읽으며 이해하는 방향으로 전시를 보았다.


사진 옆에 붙은 캡션은 마치 하나의 사진이 소설의 가장 절정 부분의 장면인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사명을 갖고 전쟁 속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지만, 직감이 기록한 절정의 순간도 있다.

 

관련해 스티브 루들럼이 찍은 ‘카메라에 잡힌 둥근 불꽃’이란 제목의 911 테러 당시 두 빌딩을 찍은 사진에 관한 비하인드가 기억에 남는다.

 

사고가 난 그날, 브루클린의 부둣가를 걷고 있던 스티브 루들럼은 세계무역센터에서 검은 연기가 솟구치는 걸 보았다. 그는 비행기가 빌딩에 부딪치는 모습은 보지 못했으며 그저 셔터를 누르며 폭탄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 아주 큰 비극이 일어난 그날, 그는 그저 어떤 직감으로 사진을 찍었을 뿐이며 인화하고 나서야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상상도 할 수 없던 사건의 현장에서 그의 손만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안소니 수오의 ‘묘비가 전하는 이야기’도 비슷한 경우다. 이 사진에 관한 비하인드에서 인상적인 건 바로 사진가가 “예상대로 비석을 부여잡더군요”라고 말한 대목이다. 사진가는 절정의 순간을 보지 못했을 때부터 예측하고 셔터를 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을 인화하기 전까지 뚜렷하게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는 알 수 없어도 우선 기록을 선택하고 그 순간에 뛰어 들어가 보는 사진가들의 결정들이 이러한 역사적인 순간으로 남는다. 다시 말해 역사의 절정을 만드는 건 그들의 직감과 선택인 것이며 이런 행위는 뚜렷한 이해와 연습 바깥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이 흥미롭기도 했다.


슬픔과 아픔으로 점철된 역사에 대한 반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전시에서 나의 시선을 가장 오래 사로잡은 사진은 바로 존 화이트의 ‘시카고에서의 삶’이었다. 30년간 살인, 정치, 집회, 강도, 화재 사건을 주로 맡아온 그가 진정 찍기를 원했던 것은 그가 거주한 시카고의 다른 모습,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삶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의 바람처럼 사진의 넓은 바닥을 밝히는 빛과 그 위에 뛰어가는 아이들의 환한 표정은 인생 곳곳의 아름다운 시 같은 순간을 나누길 원했다는 사진가의 고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어쩌면 수없이 비참한 순간을 담아온 그였기 때문에 이런 밝은 아름다움에 관한 갈망이 그만큼 뚜렷해진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외에 <퓰리처상 사진전>에 자주 등장하곤 하는 유명한 사진들도 다수 볼 수 있었다. 시각예술의 묘미는 관람자가 작품을 눈앞에 두고 볼 때만 현전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알고 있었어도 전시에서 다시 보는 사진들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은 새롭고 달랐다. 나의 시각도 계속 변해오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전시를 즐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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