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크로스미디어의 시대, 장르 간의 각색이 활발한 미디어 시장 분위기에 맞춰 뮤지컬 <베르테르>가 2025년 1월, 25주년을 기념하며 5년 만에 관객들 곁으로 돌아왔다. 25주년 기념 <베르테르>는 2025년 1월 17일(금)부터 3월 16일(일)까지 서울 디큐브 링크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괴테의 고전 명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베르테르>는 클래식을 전공한 정민선 작곡가의 아름다운 음악, 괴테의 명작을 재구성한 고선웅 작가의 섬세한 극본, 작품의 진화를 책임져온 조광화 연출가의 정교한 해석이 어우러져 한국 창작 뮤지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원작을 각색한 작품을 감상할 때 제법 모순적인 양가감정을 느끼곤 한다. 원작의 고유 감성이 해쳐지지 않기를 바라는 한편 원작에는 없던 새로운 재미가 충족되기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너무 달라서도 같아서도 안되는 섬세한 완급조절이 요구되기에, 원작이 있는 작품을 재미있게 각색한다는 건 좀처럼 쉽지 않은 작업이 된다.
그런 점에서 큰 틀은 원작의 고유 플롯을 충실히 따르지만, 뮤지컬이라는 장르만의 개성과 특색을 정교히 녹여낸 뮤지컬 <베르테르>는 25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여실히 증명하듯, 좋은 각색을 넘어 이제는 또 하나의 장르에서 클래식이 된 공연예술계의 고전으로 불려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초판(1774년)
뮤지컬 <베르테르>의 원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독일의 대표적인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25살 나이에 집필한 소설로, 당시 유럽 문단의 변방이었던 독문학을 오늘날의 위상으로 끌어올리는데 기여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주인공 ‘베르테르’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부터 자살에 이르기까지의 심정을 친구 ‘빌헬름’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솔직히 풀어낸 작품으로, 작가인 괴테 본인의 실제 경험과 주변 인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구성되었다고 전해진다.
괴테는 이미 약혼자가 있던 ‘샤를로테 부프(소설 속 베르테르가 사랑한 여주인공과 ‘롯데’와 동명)’를 사랑한 적이 있었고, 오랜 친구 ‘예루살렘’이 상관의 부인을 연모하다 고뇌 끝에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접한 바 있다. 이러한 경험과 이야기가 결합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뮤지컬<베르테르>는 이러한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공연만의 고유 감성과 창의성을 더해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사랑의 본질을 무대 위에 담아내며 2000년 초연 이후 관객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특유의 서정적 분위기와 유려한 문체가 돋보이는 서간체 형태의 원작을 어떻게 구현했을지가 굉장히 기대됐는데, 고전 명작의 원형을 강조하는 클래식 기풍의 음악과 화려하고 섬세한 무대 미술 및 조명이 현장 분위기를 압도했다.
그리고 내겐 무엇보다 연출의 힘을 실감했던 작품이 되었다.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만큼 원작 자체도 이미 너무 유명한 데다 개인적으로 플롯 자체가 대단히 극적인 편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공연장을 찾았음에도, 공들인 각본과 세심한 연출이 지루할 틈 없던 현장에서의 즐거운 관람을 넘어 귀가 후에도 그 의도와 해석을 오래도록 곱씹게 했다.
명성과는 별개로 주인공으로서 ‘베르테르’라는 인물은 극명한 평가가 엇갈리는 캐릭터로 생각된다. ‘베르테르 효과’라는 말이 원작 못지않게 유명할 정도로, 당대 지배적이던 기독교적 세계관에 도전하는 파격적인 스토리가 동시대 수많은 청년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하여 극단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마는 비극적 서사는 현대까지도 절절한 사랑의 아이콘으로 여겨진다.
원작이 쓰이던 당시 계몽주의 사상이 발현되던 당대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괴테가 베르테르를 통해 신분 차이와 계급갈등을 녹여 내려 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사랑 이야기로 국한시킬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원작의 서간문 형태에서는 비교적 인물의 감정선을 밀도 있게 담아낼 수 있었지만, 보다 사건 중심으로 전개되는 극장르의 특성상 최대한 감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감정이입이 어려웠다. 관람을 마치고 나서는 길 다른 관람객 무리에서 베르테르를 빌런으로 칭하는 후기가 어쩐지 내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이는 플롯상 베르테르의 연적으로 통하는 롯데의 약혼자 ‘알베르트’가 베르테르와 정반대 인물상으로 묘사되는 것을 넘어, 차마 주인공 시점의 편향적인 시각에서조차 악인으로 평가되기에는 어려운 젠틀한 캐릭터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괴테는 베르테르와 알베르트를 통해 ‘감성’과 ‘이성’의 대립 구도를 의도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성을 상징하는 알베르트 특유의 합리성을 차치하고도 자신의 부인인 롯데와 베르테르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알게 된 후에 베르테르를 대하는 알베르트의 태도를 보면 가히 대인배적으로 느껴졌다.
보통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역할이 감상자를 공감 시키는 데 있다면, ‘베르테르’는 주인공으로서 일반적이지 않은 캐릭터임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주인공 시점에서 극을 진행시킴에도 불구하고 관람객들을 극에 몰입시키는 힘을 지닌 뮤지컬 <베르테르>는 역시 25년의 롱런이 이해되는 수작이 된다.
무엇보다 작품 전체에 깔린 여러 상징들이 극을 매력적으로 만든다. 마치 베르테르의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하는 듯한 작중 초반부의 ‘자석선’이야기와, 롯데와 알베르트의 집 배경에 등장하는 총과 금단의 꽃의 상징성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특히 연출과 무대 구성 측면에서 무대 양편에 대칭적으로 위치한 온실 속 금단의 꽃과 철제 장식장 안의 총이 해석의 즐거움을 줬다.
이 외에도 역순행적으로 구성된 시작점의 장례식 장면과 마지막인 베르테르의 자살 장면 역시, 고급스러운 연출을 선보이며 모두가 다 아는 결말을 극적 긴장감 있게 그려냈다. 그 과정에서 활용된 ‘해바라기’ 꽃의 상징성 역시 롯데를 향한 베르테르의 절절한 순애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원작을 처음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뮤지컬 <베르테르>를 관람하고 나온 직후 들었던 생각은, 나는 영원히 ‘베르테르’란 인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었다. 그중에서 특히 베르테르가 굳이 ‘알베르트의 총’을 빌려 자살을 하기로 한 결심과, 이를 알베르트가 아무런 의심 없이 빌려주는 경위가 예나 지금이나 납득되지 않는다.
이 외에도 뮤지컬 <베르테르>에선 시간상의 한계로 베르테르의 인물 배경이 충분히 설명되지 못했다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베르테르의 서사에 쉽게 공감할 수 없었던 이유 역시 롯데를 향한 애절한 사랑 외에 성장 배경이나 과거 서사 등 베르테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정보가 관람객들에게 차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이 든다.
오히려 베르테르가 자신을 투영하는 ‘카인즈’라는 인물에 대한 서사에 보다 공감이 되었는데, 이 서브플롯이 원작 이상으로 각색된 내용이라는 점에서 흥미롭게 다가왔다. 원작에서 이름이 나오지 않던 인물의 비중을 높이고, 서사 역시 관람객들이 거부감을 느낄 만한 부분을 수정했다는 점에서 좋은 각색이라고 느껴졌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재해석한다는 건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작업이다. 특히나 시대를 초월하여 오래 사랑받아온 고전을 각색한 작품이 또 다른 장르에서 25년간 꾸준한 인기를 얻는다는 것은 정말로 흔치 않은 일이다.
단순히 원작을 답습하는 것에서 나아가 오직 공연예술로서 뮤지컬만이 할 수 있는 매력적인 시도를 충실히 선보였다는 점에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 현재의 영예에는 지금의 인기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하며 달려온 수많은 이들의 노고가 놓여있다. 이를 여실히 증명하듯 여러모로 눈과 귀가 즐거운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