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고, 그 경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하지만 이 경계는 누가 만들었으며, 누구의 시선에 의해 규정된 것일까? 그리고 그 경계 너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정은 어떻게 축적되고, 또 어떤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을까?
이 책은 단순한 자전적 에세이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가 용인하지 않는 감정’이 어떻게 형성되고, 그것이 한 개인의 정체성과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탐구하는 깊이 있는 기록이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계 미국인 저자는 자신이 경험한 차별과 소외,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형성된 복합적인 감정을 ‘마이너 필링스’라는 개념으로 정의한다. 이는 단순한 슬픔이나 분노가 아니다.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감정들—억울함과 불신, 불안과 무력감이 혼재된 감정의 층위를 파고든다.
결국 『마이너 필링스』는 단순히 ‘아시아계 미국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속한 사회가 특정 감정을 어떻게 배제하고 억압하는지를 탐구하며, 그러한 감정이 개인과 집단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깊이 있게 묻는 텍스트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는 순간,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게 된다. 과연 우리는 스스로의 감정을 얼마나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을까? 혹은 누군가의 감정을 지나치게 쉽게 부정한 적은 없을까.
정체성과 불안: 한국계 미국인의 서사
『마이너 필링스』는 저자 캐시 박 홍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아시아계 미국인 정체성과 미국 사회의 구조적 인종 차별을 탐구하는 책이다. 저자는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겪은 차별과 배제의 경험을 ‘마이너 필링스’라는 개념으로 풀어낸다. ‘마이너 필링스’는 명확한 분노도, 희망도 아닌 애매한 감정들로, 억울함과 불신, 무력감이 혼재된 감정 상태를 의미한다. 저자는 이러한 감정이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계 미국인이 미국 사회에서 경험하는 구조적 현실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한다.
책은 단순한 피해 서사를 넘어서, 아시아계 미국인이 백인 중심 사회에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존재로 취급되었는지를 날카롭게 분석한다.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저자의 불안과 혼란은 ‘영어’와 ‘예술’이라는 주제를 통해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시인이자 작가로서, 영어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언어가 자신을 규정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 이러한 모순적인 감정이 저자의 예술적 고민과도 맞물리며,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언어와 정체성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기억과 망각: 부모 세대와의 거리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부모 세대와의 관계를 다룬 장면이다. 저자는 부모님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하며 겪은 고난과 희생을 이해하려 하지만, 동시에 부모 세대와의 감정적 거리를 좁히기 어렵다는 점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특히 한국어와 영어 사이에서 길을 잃는 순간들, 부모의 침묵 속에 담긴 감정들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많은 이민자 가정에서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갈등일 것이다.
‘망각’과 ‘기억’이라는 두 축이 이 책을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부모 세대는 생존을 위해 과거를 망각해야 했고, 저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그 잊힌 기억을 더듬어야 한다. 하지만 기억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또 다른 벽에 부딪힌다. 부모 세대의 언어와 감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한계를 자각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려 한다.
분노와 연대: 마이너 필링스를 넘어
『마이너 필링스』는 단순히 ‘피해자’의 위치에서 서술되지 않는다. 오히려 저자는 아시아계 미국인이 어떻게 백인 우월주의에 동조하거나, 다른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분석하며,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게 만든다. 저자는 자신이 겪은 차별을 토로하면서도,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차별적 시선도 함께 성찰한다. 이러한 태도는 책을 단순한 고발문이 아니라, 복잡한 현실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철학적 에세이로 만든다.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마이너 필링스를 넘어서는 길은, 결국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분노는 개인적인 감정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그것이 공유될 때 사회적 힘이 될 수 있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다. ‘마이너 필링스’라는 감정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감정이라면, 우리는 함께 이 감정을 직면하고 바꿔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다시 한 번 저자의 말을 떠올렸다. ‘우리의 경험이 부정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진실을 의심하게 된다.’ 『마이너 필링스』는 그러한 의심을 넘어서,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