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가 교묘한 방식으로 천천히 쇠락해 간다는 상상을 해본 적 있는가? '활기 넘치는 삶을 규정화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사회'에 대한 공포는 나뿐만 아니라 많은 현대인이 크고 작게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합리적인 인간의 이기심이 세상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믿었다. 오랜 시간 동안 자본주의는 진화의 과정을 거쳤지만, '합리적인 개인'의 이기심은 도덕주의자 애덤 스미스가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기업가 정신과 이익 추구는 기술 발달로 인한 지식의 민주화와 물질적 풍요를 가져온 한편, 원자적 개인을 탄생시켰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의 쓸모를 입증하여 가치를 환산하는 상품으로 취급될 뿐만 아니라, 환산화된 가치가 어떤 행복으로-문학적 묘사보다는 구체적 수치로 치환될 수 있는- 이어진다는 환상을 공유하게 되었다.
자본의 기호와 단순한 언어적 개념화는 사람들을 틀에 박힌 삶의 굴레로 밀어 넣었다. 현대인들은 끝없는 욕망과 갈증을 느끼는 동시에, 그러한 삶에서 느껴지는 실존적 고통과 공허함에서 발생한 반발감을 느꼈다. 하지만 오늘날 그러한 삶의 부조리를 인식하는 것 조차 어렵다. 우리의 문화가 때로 '뛰어난 능력으로 성공한 일부',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진 일부'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재생산하며 질서의 유지에 봉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한다면, 원자적 개인의 행복과 평안을 이야기하는 쇼펜하우어를, 일반적인 인간과 다른 위대한 인간이 되라고 이야기하는 니체를 선택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조언자가 아닌 진정성 있는 철학의 목소리를 곱씹을 수 있지만, 그것이 '성숙한 자신'을 위한 노력이나 깨달음을 위한 지극히 개인적인 범위에 머무른다면, 수많은 책이 자신의 정신을 봉사하기 위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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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책, '현대 문화의 근본 관점들'은 행복만을 삶의 가치로 추구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사회와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에 사로잡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감각에 사로잡혀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비판한다.
도스도옙스키와 니체의 관점에서, 행복을 위해 자유로이 존재하기를 포기하는 인간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 짐승 이하의 존재로, 퇴락의 위기에 처한 존재다. 인간이란 자기가 극복되도록 함으르써 인간 이상의 존재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인간일 수 있다고 보았다. 이 과정에서, 행복에 집착하는 자기를 넘어 순수한 사랑의 힘으로 자신의 몰락을 선택하는 이만이, 진정한 인간이다.
책은 이러한 진정한 인간과 정반대에 있는 현상, 니체의 '데카당스(무상하고 역동적인 비규정적 힘의 표현인 현세적 삶의 세계를 부정하고 무화하려는 경향)' 개념을 빌려와 현대 문화를 분석하고, 행복주의와 희생양 논리에 의해 인간적인 활기를 잃은 사회를 비판한다.
책은 서론과 12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서론은 니체의 데카당스 개념을 설명하고, 니체의 '초인'에 걸맞 인물로 소설 '백치'의 미슈킨을 소개한다. 처음에는 대치되어 있었던 두 사상가를 하나의 맥락으로 엮어내는 부분은 이 책의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다.
12장 동안 저자는 문화, 정치사상, 철학, 예술에서 데카당스한 경향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분석한다. 각 장은 적게는 하나, 많게는 세 개의 작품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의 범위는 시의 일부부터 영화나 철학까지 '문화'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을 대체로 포함한다.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 소개되어 있지만, 글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내용을 소개하기 때문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편이다.
서론의 개념은 책의 내용이 마무리되는 장까지 계속해서 언급된다. 즉, 저자가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핵심은 서론에 모두 담겨있고, 나머지 과정은 그러한 과정을 제련해 나가는 과정으로 병렬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이처럼 서론의 결론이 끝까지 유지되기 때문에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책이다. 하지만 각 장을 읽어보면 매번 깔끔하게 결론이 내리기보다는 저자의 사고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도록 자유롭게 기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가 서론에서 밝혔듯, 이 책은 '결과'가 아닌 '과정'을 담은 글이다. 서술구조와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받은 인상은, 데카르트의 '성찰'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명확한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떠오를 수 있는 질문들에 답하는 방식으로 글을 썼듯, 저자도 서론의 결론을 위해 다양한 문화를 서론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그래서 이 책은 데카당스 한 경향성에 대해 저자가 떠올린 물음에 함께 답하는 재미가 있다. 여타 다른 교양서와 비교하여 학술적 태도를 유지한 철학책임에도 불구하고, 골머리를 앓지 않고 책이 즐겁게 읽힐 수 있는 것도 이런 서술상의 특징이 한 몫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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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확실한 메시지에 비해서는 제목에 대한 갈무리가 되지 않은 면도 있다. 정확히 '현대 문화'가 무엇인지, 수록된 작품들이 정말 '현대적인지'에 대한 질문은 -아마 분량 상과 책의 목적으로 인해- 깊게 파고들지 않는다.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고전이거나 2000년대에 제작되어, '현대문화'라고 하기에는 다소 어색한 감이 있다.(그린비 출판사의 21세기 매체철학이 2024년에 21세기를 자청해야 했던 이유를 밝힌 것을 생각해보면 이 문제는 더 와닿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근본 관점'을 왜 '데카당스'로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공백이 이 책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다. 이것이 현대 문화인지, 왜 데카당스 한 지에 대한 설명이 제공되지 않아도 책의 내용이 우리 시대를 정확히 저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이 '지금'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이전의 작품을 근거해서 해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든지 현실에서 행복주의와 희생양 논리의 결과를 경험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회사와 같은 작은 공동체부터, 수많은 플랫폼에 이르기까지 현대사회에서는 언어와 이미지를 이용해 가상적 계급과 행복의 이미지를 끝없이 생산한다. 남자와 여자, 여당과 야당, 다수와 소수, 이들은 모두 파편화된 집단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상대를 배척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이 모든 문제의 배후에 작가가 비판한 눈먼 이기심이 깔려있다. 사람들은 '더 많이', '최대한 많이' 행복한 삶을 꿈꾸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것을 막거나 막을지도 모르는 것을 진지한 고찰 없이 배제하려고 든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자본적 성공, 행복한 가정, 빛나는 지성, 풍요로운 삶을 상상한다. 하지만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잠재적 경쟁상대의 질적인 삶'이나 '대안을 제시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질문을 잃어버린다.
이 글을 쓰는 나는 이 중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가장 건강한 부분조차도 '대심문관'의 비유를 하는 이반과 같은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자본주의의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교환하는 생존의 수단이 자본이라는 이유로, 인문학적 상상에 매달리는 것이야말로 현실도피일지도 모른다는 자조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의지 뿐이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선택하는 것으로, 나의 정신 건강은 폐쇄적이고 안전한 방식을 택해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내가 주로 느낀 것은 끔찍한 공허함이었다. 원자적 개인주의에 심취한 사람들이 잘라내고 있는 것은 그들에게 아름다운 전부이지만, 인류가 사랑할 만한 것의 일부를 잘라낸 것이다. 나를 포함해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방관한다면, 세상은 끔찍하게 토막나서 원래의 아름다움을 잊어버리고 말 것이다. 아름다움은 불멸하지만, 사회 속에서 복원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책의 메시지는 그런 공허함에 부드러운 경종-모순적이지만 그렇다-을 울리는 역할을 했다. 사실 그것은 상당히 기꺼운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더욱 삶의 작은 자극에도 예민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연약한 정신을 가진 내가, 무언가 규정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비판해야 할 대상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내 정신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애쓴다면 나도 내가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것은, 삶의 고통에 완전히 눈멀어버린 내가 나의 정신에 봉사하는 것에 불과한 한심한 생각에 경계심 마저 잃어버리는 것이다. 유한한 정신을 타고난 인간으로서 이 구역질 나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공허함에 몸부림치는 것보다야 실수할 자신을 감시하는 쪽이 더 마음이 편하지 않겠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소설 속 인물이고, 내가 어떤 존재였는가를 누구도 대답할 수 없지만, 틀에 박힌 개인이 아닌 무언가로서 겪는 몰락은 책에서 몇 번이나 강조했던 것처럼 아름다운 몰락일 것이라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