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맘때쯤 우리의 삶은 가장 이상적으로 변한다. 지난해 우리가 되고 싶었지만 끝내 될 수 없었던 무언가를 포기하지 못한 채, 올해는 그 무언가에 더 가까워지기를 다짐하며, 우리는 우리가 세운 계획 속으로 스스로를 열심히 던지기 시작하는 것. 살을 빼기 위해 운동을 시작하고, 자격증을 위해 퇴근 후 공부를 시작한다. 새삼 설레고 즐거운 그 몰입 속에서 각자의 삶은 다시 발견된다. 수십 년 살아온 인생의 흥미로운 재발견. 새해에는 오늘의 내가 어느새 잊고 있던 뜨거운 나를 다시 만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
그러나 새것이 언제까지나 새것일 수 없다는 사실은 모든 존재에 거스를 수 없이 적용되는 물리법칙이다. 마음은 식고 시간은 낡는다. 새해가 올해로 변하고 올해가 다시 내년에 가까워지면서 우리의 몰입은 흩어진다. 언젠가 다시 발견되길 막연히 바라면서, 우리는 특별하고 흥미진진했던 삶의 조각을 시간 속에 묻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해마다 삶의 특별함은 재발견되고, 이내 다시 묻히고 마는 것. 삶이 특별과 평범을 반복하며 그저 순환할 뿐이라면 우리의 나날은 무의미한가. 야심 찼던 다짐이 벌써 무너져가고 허탈한 표정을 짓기 시작한 우리의 질문에 그건 아니라고,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반복해서 읊조리는 영화가 있다.
빔 벤더스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2024)를 본다.
이른 새벽 비질 소리에 눈을 뜬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양치를 하고, 콧수염을 다듬고, 유니폼을 챙겨 입는다. 집 앞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는다. 차에 탑승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를 골라 재생한다. 음악과 함께 천천히 달려 출근한다. 도쿄의 공공화장실을 돌며 꼼꼼하고 성실하게 청소한다. 점심에는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필름카메라로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 사진을 한 장 찍는다. 일이 끝나면 자전거를 타고 목욕탕과 단골 식당을, 주말에는 세탁방과 좋아하는 술집을 들른다. 밤이면 헌책방에서 산 책을 읽다가 잔다. 다시, 이른 새벽 비질 소리에 눈을 뜬다. 빔 벤더스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줄거리를 굳이 소개하자면, 이게 거의 전부다.
도쿄의 공공시설 청소부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의 삶은 지나칠 정도로 단조롭게 보인다. 과묵한 성격 탓인지 좀처럼 말도 없고, 자신이 맡은 청소 작업을 매일같이, 수상할 정도로 열심히 한다는 사실 말고는 행동에 큰 특징도 없다. 검소한 몸가짐과 봉사에 가까울 정도로 직업에 충실한 그의 삶은 과거에 저지른 과오나 업보를 청산하기 위한 경건한 제의처럼 보일 지경이다. (실제로 오랜만에 만난 여동생이 아버지와의 ‘예전’ 일을 언급하고 떠난 뒤 그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다.) 히라야마의 삶에서라면 어제와 오늘이 같고, 오늘이 내일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매일 거의 똑같이 반복되는 그의 조용한 삶은, 적어도 격렬하게 역동하는 세상에 던져진 현대인들의 관점에서라면, 매우 낯선 관찰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관찰의 끝에서 우리는 불현듯 깨닫게 된다. 특별할 것 없이 반복되는 그의 평범한 일상이 우리의 삶과 매우 닮아있기도 하다는 것을. 그것이 그 자체로 제법 아름답다는 것을.
하지만 물리법칙은 야속하다. 세상은 변하고 일상엔 언제나 균열이 생긴다. 나는 동일한데 세상은 자꾸 무너지려고 하는 것만 같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도, 특별한 다짐들도 결국 지켜내지 못해 자책하거나 핑계를 댄다. 그러나 묵묵하게 반복되는 히라야마의 아름다운 하루가 내보이는 삶의 정수는 ‘변화’에 대한 고집이나 핑계가 아니다. 히라야마를 찾아온 조카 니코(나카노 아리사)가 그녀의 엄마의 말을 빌려 묻는다. 삼촌(히라야마)이 남들과 다른 세상에 사는 것만 같다고. 어느새 평범한 히라야마의 삶을 특별하게 바라보게 된 우리를 대변하는 듯한 조카의 질문에 히라야마는 순순히(동시에 순수히) 대답한다. “알고 보면 이 세상은 수많은 세상으로 이뤄져 있거든. 연결된 것처럼 보여도 그렇지 않은 세상도 있지.” 그는 이미 연결되거나 아직 연결되지 않은 여러 세상 중에서, 굳이 연결하지 않은 한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 화려하거나 대단해 보이는 물질주의의 세계에 자신을 애써 연결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는 그토록 소박한 매일을 반복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히라야마의 삶이 다른 세상과의 연결을 극단적으로 끊어내는 것은 아니다. 동료 청소부의 소동, 갑작스러운 조카의 방문, 단골 선술집 여주인의 전남편 등장 등, 다른 이들이 그의 삶에 개입할 때라면 그가 보내는 하루도 충분한 변화를 겪는다. 그는 그 속에 기꺼이 휘말리며 울고 웃는다. 영화의 마지막, 히라야마는 마침내 자신의 세상을 우리와 연결하고 힘차게 말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우리는 절대적인 물리법칙을 거스를 수 없으므로, 절대로 변치 않겠다는 말도 안 되는 고집보다는 말이 되는 변화의 일들을 묵묵히 해나가는 것이 훨씬 아름답다는 것. 모든 것은 변하고, 때때로 망가진다. 야심 차게 세운 새해의 특별한 계획도, 오래도록 유지하고픈 평범한 일상도 그렇다. 그러나 세상이 무너졌을 때, 세상이 무너진 만큼 나도 따라서 변화한다면, 새로운 일상은 발명된다. 그러니 우리는 다음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지금부터 자책하지 않기.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은 지금”이니까.
이 영화의 의미가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바치는 단순한 위로만은 아닐 테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온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빌려, 그 반복의 단위를 하루로 축소한 일일회귀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비슷한 일들이 영원히 반복될 것만 같이 평화롭고 조용한 영화는, 어쩌면 매일 돌아오는 당신의 하루에 ‘완벽’이라는 수사를 붙일 자격에 대하여 묻는 이야기다. 당신의 하루가 매번 특별하고, 흥미진진하며, 열정이 가득할 수는 없으며, 그렇다고 매번 평범하고 건조하게 반복되며 흘러가지도 않을 거라는 것. 다만 소박하더라도 소중하고, 담담하더라도 단단하며, 변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하루가 되어야 한다는 것.
하루가 서른 번쯤 모이면 한 달이 되고, 그게 열두 번 모이면 새로운 일 년이 된다. 우리가 보냈던 무수한 새해와, 수많은 새해의 다짐들이 그렇게 평범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애초에 완벽한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체로 평범하고 가끔 특별한 수많은 날들(days)이 모여 비로소 어떠한 모양으로 온전(perfect)히 빚어질 뿐이다. 삶이 게으른 비정형의 모양으로 되돌아갈 때쯤, 그래서 괜스레 스스로가 미워질 때쯤, 우리는 이 조용한 영화를 다시 찾게 될 테다. 그게 여러 번 반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