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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작년부터 전시장과 극장에 가기 전 어떤 사전 정보도 없이 가는 걸 선호하게 되었다. 불현듯 작품에 대해 어떤 것도 알지 못하고 작품과 만났을 때 그것을 느끼는 감각을 새롭게 깨워줄 수 있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대도 우려도 없이 그저 호기심만 들고 가 예술을 즐긴 후에 남는 생경한 감각은 정신을 또렷하게 일깨우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고백하는 그의 경험과 의도에 귀 기울이면 작품이 주는 감동이 배가될 때가 많다. 이로 하여금 누군가의 생애와 정신이 담긴 작품을 접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세계와 세계가 만나는 순간이라는 것이 실감된다. 이런 감정을 가장 최근에 느낀 것은 마이라 칼만의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을 읽고 난 후다. 작가는 그림으로 독자에게 자신의 시선을 나눠주는데, 부정적인 감정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진솔하게 털어놓는다.

 

상실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그 주변의 공간과 사물, 알고 만났던 이들의 생애와 그들 사이에 있는 애정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 왔음을 보여주는 마이라 칼만의 그림과 그의 이야기가 교차될 때, 그의 작품을 통해 진심으로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마이라 칼만이 그림으로 쓰는 자서전 아닌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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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그림 에세이의 형식을 빌렸으면서 그 자체로 미술관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서 작품과, 더 나아가서는 작가와 대면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독자에게 전하는 위로의 말, '꼭 버티세요(Hold on)'를 끝으로 책을 덮으며 그의 삶과 무관한 부분까지도 치유받는 감각의 확장을 경험할 수 있었다.

 

우선 에세이를 읽으며 가장 좋았던 점 중 하나는 마이라 칼만을 처음 접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스타일과 재능을 느낄 수 있는 귀한 감명의 순간이었다는 점이다. 그림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떤 미소나 자세를 요구받지 않은 느낌이 든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은 후 몇 초 뒤 찍은 것 같은 일상의 스틸컷 같은 그림이다. 그런 점에서 특히 그의 그림 속 주인공들은 화폭에 옮겨졌을 뿐,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보는 이의 감정을 억지로 조작하지 않는 그의 그림은 인물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동시에 애정, 억압, 질투와 같은 타인과의 관계를 절묘하게 담아낸다. 가령 '딸을 안고 달래며 위로하는 여자'에서는 슬퍼하는 딸에게 마치 전능한 신이라도 된 것처럼 자상하면서도 절대적인 위로를 건네주는 듯한 분위기를, '남자(피터 로리)를 껴안고 있는 여자(로테 레냐)'에서는 연인 사이에서 느껴지는 몹시 친밀한 분위기와 서로에 대한 결이 다른 애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런 그림들의 배치를 통해 이 책은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동화 작가인 마이라 칼만의 정체성을 별다른 설명 없이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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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그림 스타일에 익숙해지면서 책을 넘기다 보면 책의 초입에서 그가 설명한 여성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돌이켜 보면 그의 삶과 가장 크게 공유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여성이라는 점이고 그랬기에 그가 여성을 담는 방법에도 또한 깊이 감명받았던 것 같다. 그는 자신과 같지만 다른 타인의 삶, 여성의 삶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는 '시샘하는 마음을 품은 여자들'에서 마이라 칼만의 시어머니 마리앤의 사랑과 질투의 생애를, '자매를 안고 있는 나의 어머니 불행하게 끝날 그의 결혼식 날'에서 어머니의 예기치 못한 불행을, '편지를 든 남자 뒤에 서 있는 여자'에서는 남자 뒤에 서 흥미롭지 않은 인생을 살았을 것 같은 완다의 인생을 담아냈다.

 

이 그림들과 마이라 칼만이 적은 글귀들을 보면 그가 이들의 삶을 관조하고 있지만, 동시에 숨길 수 없는 애정을 품고 있음이 느껴진다. 그들의 삶을 재고 평가하지 않으면서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를 배우고 그것을 삶에 대한 애정으로 연결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결론적으로 마이라 칼만에게 이런 사고가 가능했던 것은 그가 타인의 삶을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과 연민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그가 그린 여성들 중 모두가 삶의 명암 중 그늘이 두드러진 모습으로 담긴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편, 일하는 여성, 가족, 길에서 만난 여성들의 모습에서는 생명력을 발견한 것 같았다. 이런 그림들에는 많은 사연이 덧붙여지지 않았지만, 많은 여인들과 마주서서 그들을 그릴 때 마이라 칼만 자신과 그가 만난 여인의 생들이 오버랩되며 그려졌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이런 그의 그림들은 다양한 색으로 칠해졌는데 통달한 듯한 그의 문구와 함께 보면 묘한 감정을 들게 하는데 그것을 통해 삶이라는 애증이 표현되는 듯하다. 어째서인지 이것을 알아챘을 때 그가 삶은 그저 삶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모든 사연을 털어놓은 뒤 "다 지난 일이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서글프다기보다는 그저 곁에서 침묵으로 동의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마이라 칼만은 그림을 그리면서 그들의 기쁨과 슬픔, 남들과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을 발견해내고 그 가운데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가진 것들'의 의미를 마침내 찾아냈다고 느껴졌다. 가지지 못한 것들에 애달아 하고, 가진 것들이 삶에 슬픔을 가져다 주더라도 가진 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결국 삶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은 가르쳐준다.

 

많은 에세이들이 자신의 생각과 삶의 애환을 텍스트로 전달하려 애쓰는 동안 마이라 칼만의 그림 에세이는 마이라 칼만 자신보다 그 주변에 빛을 드리운다. 그것을 통해 진정으로 우리가 인생에서 가져야 하는 것은,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자세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 안으로 침잠해 독자들에게 자신의 세계 안으로 직접 발을 들이라 손짓하지 않고 책 밖의 세상으로 뻗어나가 독자 한 명 한 명에게 전해질 메시지를 쓴 것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이것이 곧 그가 쓴, 모두를 위한 편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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