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크기변환]KakaoTalk_20250128_025802231.jpg

 

 

다사다난했던 24년의 마지막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보냈다. 타지에서 경험하는 카운트다운은 겪어보지 못한 미래로 건너가는 그 찰나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른다는 점에서 참으로 낭만 있는 일이었다. 동시에 새로운 해에 대한 기대감이 괜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25년의 웅장한 서두를 올리며 떠오른 태양을 마주한 것은 나폴리행 비행기 안에서였다. 새벽 탑승 수속으로 잠기운이 맴도는 비행기에 약간의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고, 나는 제한된 크기의 창문 속으로 얼굴을 욱여넣었다. 태양은 구름 한 점에 가리지 않고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마치 내가 향하는 곳에 대한 열망을 암시한다는 듯이.

 

“이탈리아”라는 나라를 떠올리면 연상되는 것 중 감히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예를 들면 피자나 파스타, 장화 모양의 국토, 그리고 국기. 초록색과 하얀색, 그리고 빨간색으로 구성된 통일의 삼색은 곧 우리가 아는 피자의 원형이 된다. 마르게리타 왕비의 나폴리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마르게리타 피자는 밀가루 반죽 위에 바질, 치즈, 토마토를 올려 완성되었고, 이후 이탈리아의 상징물로 주목받는다.

 

반면 내가 이탈리아에게 바라던 것은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머릿속으로 수없이 상상해 온 이탈리아는 조금 더 시각적인 것이었다. 뜨거운 태양 빛이 습기 없는 공기 중으로 버석하게 부서져 내리고,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눈이 부실 정도로 윤슬을 반짝이는 광경. 붉게 물든 이국적인 열매들과 무성하게 뻗어나가는 풀과 나무. 하나같이 빨간 지붕으로 정수리를 가린 낮은 건물과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동그란 두오모. 바로 이런 것들이 “이탈리아”를 되뇌었을 때 떠오르는 것이었다.

 

진작에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이탈리아에 대한 환상이 높았던 이유는 미디어의 영향이 크다. 특정 작품에 빠져들수록, 긴밀한 접점이 생겼다고 믿었고, 이탈리아에 가야만 하는 이유가 되었다. 가령 “죠죠의 기묘한 모험”이라던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라던가. 혹은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라던가. 이 세 가지는 나에게 있어서 좋아하는 레벨을 가뿐히 넘은,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마치 사랑하는 수준에 놓인 것들이다.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 그리고 다시 보았을 때의 감격은 한 작품을 몇 번이고 돌려 보게 만들었고, 결정적으로 이탈리아로 떠나게 될 다짐이 되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한국에서도 잘 알려지고 아트인사이트 내에서도 많은 에디터들이 다루었으니 설명은 잠시 접어두고, 우선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죠죠란 무엇인가


 

[크기변환]sssss.JPG

 

 

“죠죠의 기묘한 모험” 시리즈는 제목 그대로 각 시대의 “죠죠”에게 일어나는 기묘한 일들을 다룬 아라키 히로히코 원작 만화이다. 시리즈마다 등장하는 새로운 주인공이 죠스타 혈통을 가진 것이 특징으로, 그들은 별칭 “죠죠”라 불린다.

 

그중 5부: 황금의 바람은 주인공 “죠르노 죠바나”가 마피아의 우두머리로 올라서기까지 8일간의 짧은 여정을 보여준다. 2001년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기묘함의 절정을 달린다. 소매치기와 택시 운전을 소일거리 삼던 15세의 죠르노는 우연히 마피아의 일원 “부차라티”와 엮이며 조직에 입성한다. 물론 이 모든 판타지적인 전개는 “스탠드”라는 초능력이 존재한다는 조건 하에 이루어진다.

 

죠죠 5부에서 가장 돋보이는 특징은 등장인물들의 외형이다. 이전 시리즈에 비하여 호리호리한 체형과 중성적인 얼굴, 그리고 아방가르드한 의상을 입은 캐릭터들은 일반적인 애니메이션에서 보지 못한 독특함을 자아낸다. 특히 해당 부작의 주인공 죠르노 죠바나는 가슴이 훤히 뚫린 핑크색 교복을 평상시에 입고 다니며, 조연들 또한 일반적으로 보지 못한 개성적인 옷차림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운 외형과 달리 스토리는 암울하고 처절하게 흘러간다. 죠죠 5부의 엔딩을 몇 번이고 돌려보면서 시간이 나면 나폴리에 꼭 가보겠다고 다짐했다. 우리의 죠죠가 나고 자란 곳은 어떤 곳일지. 이야기의 배경이 된 나폴리는 어떤 모습으로 반겨줄지. 작품 곳곳에 스며든 건축물과 유물을 실제로 눈앞에 둔다면 어떤 감상이 들지.

 

작중 펼쳐진 8일간의 여정은 이탈리아의 곳곳에서 전개된다. 나폴리의 항구, 카프리섬, 폼페이, 베네치아, 로마 등등. 좋아하는 작품의 배경으로 직접 들어가 보고 싶다는 욕망은 창작물에 애정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울에 방문하게 되어 아쉽다거나, 이 여행을 나중으로 미루고 싶다는 망설임은 한시도 들지 않았다. 나에게는 언제든 나폴리의 땅을 내디딜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단순한 인간의 허구와 환상을 넘어서 실제로 존재했던 것만 같은 무언가를 두 눈으로 바라보고 싶다는 바램은 나의 등을 기어이 떠밀었고, 곧이어 맨얼굴의 나폴리를 마주할 수 있었다.

 

 

 

기묘한 여정의 시작


 

[크기변환]KakaoTalk_20250128_025802231_01.jpg

 

 

그렇게 도착한 나폴리의 첫 인상은 바로 “이곳… 생각보다 위험하다”였다.

 

2025년 1월 1일에 도착한 나폴리 공항은 한산했다. 조용하고 간소해 보이는 공항에서는 이유 모를 음산함조차 느껴졌다. 공항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바라본 창밖의 풍경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방출하고 있었다. 박살 나버린 채 흩어진 술병의 파편은 콘페티처럼 날린 색종이의 향연과 어우러지며 길거리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지하철 입구 주변의 유리창은 원래부터 그랬다는 듯 커다란 금이 가 있었고, 정체불명의 토사물은 도보에서 심심찮게 관찰되었다. 이들은 모두 성스러운 새해라는 주기적인 행사와 맞물려 아이러니함을 자아냈다.

 

이탈리아 여행의 서문을 연 나폴리는 당황 그 자체였다. 설상가상으로 해가 빠르게 저물었고, 어디선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낯선 굉음에 몸이 저절로 위축되었다. 무지에서 비롯된 공포감이 몰려왔다. 소리의 발원지가 무엇인지 인터넷으로 검색하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새해를 축하하는 현지 청소년들이 장난으로 폭죽을 터뜨리는 것이라고.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나폴리의 새해맞이 폭죽놀이는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다고 한다. 나폴리의 폭죽에 관해 기술하는 블로그 중 대다수는 김민재 선수를 따라 나폴리를 방문했다가 식겁한 사람들의 당혹감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한민족의 기분을 간접적으로 체감하자 과거에서부터 전해진 텔레파시가 머릿속으로 오가는 것 같았다. 동질감에 의한 약간의 안도감도 잠시, 숙소로 돌아가기 위한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다음 날. 카프리섬으로 가기 위해 페리에 탑승했다. 누오보성을 바라보는 곳에 위치한 항구에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또 다른 나폴리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옛 속담에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 (Vedi Napoli e poi muori)” 라는 말이 있다. 세계 3대 미항으로도 손꼽히는 나폴리항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끝이 없이 펼쳐진 바다가 수심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은 청색을 띠었다.

 

1월 2일. 평일을 맞은 나폴리는 전날과 달리 정돈된 모습이었다. 폭죽 소리가 사라진 나폴리는 정겨운 살냄새를 풍기는 노인의 품, 명절이면 찾아가는 외딴 곳에 위치한 시골과도 같았다. 바람결에 따라 나풀대며 흔들리는 테라스의 세탁물. 쉴 틈 없이 콧속을 침범하는 매캐한 오토바이의 매연과 담배 연기. 불규칙한 돌길과 두서없이 널려있는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 나폴리는 불규칙 속에 존재하는 규칙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완전히 다듬어지진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부대끼며 살아가는 곳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와닿았다. 비록 긴장되었던 마음을 풀자 갑작스러운 인종 차별을 당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타지를 여행하다 보면 같은 핏줄로 연결된 한국인이 그리워졌다. 특히 동양인을 쉽게 볼 수 없는 나폴리의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모두가 사라지고 덩그러니 나 홀로 남겨진 것만 같은 이곳에선 비슷한 양상의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만 지나쳐도 은근한 반가움이 생겼다.

 

어쩌다 이 곳에 오셨어요! 지금까지 어디를 다녀오셨나요? 혹시… 죠죠를 아세요?

 

그러다 보니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이어 나가는 일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카프리섬으로 향하는 페리에서 우연히 만났던 한국인들과 무리를 이루고 이야기를 쏟아냈던 순간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간의 못다 한 회포를 풀 듯 반갑게 서로를 맞이하던 장면은 훗날 나폴리를 회상할 때 잊지 못할 에피소드로 간직될 것이다. 개인주의가 전 지구적 분위기로 도달한 요즈음. 쉽게 볼 수 없는 정겨운 풍경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스함이 가슴에 밀려 들어왔다. 모르는 사람을 알아가고 인연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하자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이 기묘한 여정이 점점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크기변환]KakaoTalk_20250128_025802231_04.jpg

 

 

 

여행 뒤에 남은 것은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와 그동안의 여정을 떠올려 보았다. 나폴리는 그중 가장 입체적인 도시였다. 단순하게 창밖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역사와 문화가 겹겹이 층을 이룬 것이 바로 나폴리였다. 수많은 여행자를 바다로 이끄는 유구한 관광의 도시이자, 국립 고고학 박물관과 같이 역사적 유물들이 잠들어 있는 고대 문명의 도시. 동시에 전반적인 치안이 위험한 편에 속했고, 도시 정서도 과격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먹어본 음식들이 모두 수준급이었던 미식의 도시였다.

 

인간에게서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판단할 수 없는 것처럼 나폴리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띠었다. 그러다 보니 여행을 하며 한 명의 인물을 알게 된 것만 같다는 감상이 들었다. 같이 지내는 날이 늘어날수록 몰랐던 면을 알게 되었는데, 이후 나이가 들고 경험치가 쌓였을 때 방문한 나폴리는 어떻게 다가올까, 라는 호기심이 문득 스쳐 갔다.

 

 

[크기변환]DrAfXdGVAAAbci0.jpg

 

 

죠죠의 기묘한 모험: 황금의 바람에서 죠르노 죠바나는 마피아 파시오네의 수장이 되고자 한다. 어린 시절, 부모의 제대로 된 보육 대신 갱으로부터 보살핌을 받았던 그는 자신만의 선을 구축해 나가며 정부의 대체제로서 갱스터를 동경한다. 단순한 선망에서 시작된 그의 마음은 마약 근절이라는 개인적인 목적과 만나 동력을 얻는다.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돈을 위해 마약을 파는 현재의 갱스터에 염증을 느낀 죠르노는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직접 갱의 보스가 되기를 원한다. 선이라는 목적을 위해 악을 선택한 그의 야망은 과연 이루어졌을까?

 

한낱 일반인에 불과했던 그의 포부 속 외침은 바위로 달걀 깨기와 같은 무모한 시도로 느껴진다. 조직이라는 거대한 집단에 도전하는 개인은 현실이라는 바람 앞에서 작아지고 위축되며 끝끝내 사그라들기 쉽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외치는 단념의 분위기 속에서 죠르노는 뜨거운 태양을 심장에 품고 당당하게 맞선다. 각오가 느껴지는 굳건한 얼굴로 “이 죠르노 죠바나에게는 꿈이 있다! (このジョルノ・ジョバァーナには夢がある!)” 라고 외치는 그는 일반적인 중학생 소년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커다란 꿈을 품은 야심가이자, 일말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행동가이다.

 

태양과 바다 사이를 적절하게 날지 못하고 이상을 좇다 떨어져 버린 이카로스와 달리 죠르노 죠바나는 동경했던 미지로 다가서고자 태양을 삼켜버린다. 빛을 내는 환한 태양이 되기 위해 자신을 불태워 버린다. 짧고 강렬한 암흑의 유랑기는 독자를 단번에 나폴리로 빠져들게 하고, 우리는 숨을 죽인 채 그들에게 벌어지는 운명론적 서사를 지켜보게 된다.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그를 기억하며 나폴리에 대한 기억을 다시 한번 회상해 본다. Ciao, Napoli!

 

 

 

컬쳐리스트 조유진.jpg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 1
훈제오리
컴백이시군요! 기다렸습니다 :) 2025 첫 글 잘 봤습니다!
죠죠하면 이탈리아죠 ㅎㅎ 멋진 여행.
답글달기
2025.01.30 23:14:3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