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는 먹는 것 [도서]

강혜빈 외,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시집』(한겨레출판, 2022)
글 입력 2025.01.2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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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먹는 것이다. 이것은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문학적 표현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먹는다는 행위는 신체를 움직일 힘을 신체 바깥의 것에서 얻는 일이다. 우리의 몸은 무언가를 먹음으로써 새롭게 힘을 얻는다. 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치열하게 살다가, 그 치열함이 다해서 마음이 허해진 순간에, 마음에 힘을 보태줄 무언가를 찾기 시작한다. 퍽퍽한 삶에서 마음을 채워줄 무언가, 그것 중 하나가 시다.


시를 먹는다는 말은 소진한 마음을 시로 채운다는 말이다. 이 말에는 깊은 여운이 남는다. 아무리 굶주려도 우리가 우리의 몸을 뜯어 먹으며 배를 채울 수는 없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뜯어 먹어서 마음을 채울 수는 없다. 시는 우리의 마음 바깥에 있다가, 우리의 마음을 채워야 할 순간에 문득 찾아온다는 것. 마음이 고파 시를 찾는 순간이 오기까지 우리의 마음엔 충분한 시가 없다는 것. 우리는 시를 잊고 산다. 그러다 마음이 허기질 때 시를 찾아 먹는다.


시집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시집>(2022)을 읽는다.

 

 

여자는 오후 열두 시가 되면

언제나 혼자서 이곳에 온다


메밀국수 한 그릇 주문하고

대부분 벽을 응시한다


벽 속에서

아는 사람의 글씨체를 보았다고


어느 날에는 중얼거린다

미래의 언어를 쓴다는 그 사람은

자신의 시대가 아직 오지 않음을 슬퍼하며

먼 곳으로 떠났다는데


「어서 오십시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식당입니다」


발들이 문을 열 때마다

짤랑이는 종소리


- 강혜빈, <다가오는 점심> 중에서

 

 

매일 점심시간마다 혼자서 메밀국숫집에 오는 여자가 있다. 여자는 국수 한 그릇 시켜놓고 기다리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벽을 응시한다”. 정확히는 손님들이 벽에 남기고 간 수많은 글씨 중에서 그녀가 “아는 사람”의 흔적을 찾는 것이다. “미래의 언어”를 쓴다고 하는 그 사람은 시대를 탓하며 “먼 곳으로 떠났다”고 하는데, 그녀는 막연한 말을 남기고 떠나간 그의 부재가 아직 사무친 나머지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그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 이 식당을 자꾸만 찾는 것이다. 그의 빈자리를 두고 혼자 먹는 국수는 “시간과 공간의 테두리”마저 벗어나기 위한 한 끼의 몸부림이다.

 

 

말하는 사람의 의중을 파악하는 일은

물맛의 차이점을 느끼는 일과 비슷해서


점심이라는 어떤 장르를 만드는 일과 같아서


그러나 여자에게

가벼운 친밀감을 느끼기 시작할 때

오늘분의 점심시간은 끝이 나고


사람들은 문득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서둘러 바깥으로 나선다

 

 

그런 그녀를 매일 보는 국숫집 주인 ‘나’는 자신의 가게에서 매일 정확하게 벌어지는 그녀의 일들을 익숙한 규칙처럼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의중을 파악”했다고 쉽사리 생각할 때 그것은 “물맛의 차이점을 느끼는 일”처럼 실패하게 된다는 것. 누군가의 세상에 대하여 극도로 섬세하지 않았을 때, 섣불리 “가벼운 친밀감을 느끼기 시작할 때”, 우리의 이해는 반드시 미끄러진다. 그 사실을 아는 나는 “묵묵히 메밀을 씻”을 뿐이다. 나와 여자 사이 “남겨진 벽”, 정확히는 ‘남겨놓은’ 바로 그 벽의 존재 덕분에, 국숫집의 점심은 “에스에프”처럼 아득한 서사를 상상으로 채우며 “어떤 장르를 만드는” 시간이자 공간이 된다.


점심으로 아득한 시공간을 지어 먹은 시가 있다면, 점심만 기다리다가 결국 때를 놓치고 만 시도 있다.

 

 

점심이 아니잖아? 점심이어야 되는데. 점심이 될 때까지 자야지. 그렇게 어떤 사람이 계속 잠을 잤다고 한다. 내 얘기는 아니고 어떤 사람에 대한 얘기다. (…) 계속 점심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건 좋은 일이었다. 나쁜 일이기도 했다.


- 김승일, <점심> 중에서

 

 

하염없이 점심만 기다렸던 “어떤 사람”이 있다. 점심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길고 괴로워서 “점심이 될 때까지” 계속 잠을 청했지만, 자도 자도 “계속 점심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그에게 좋고 나쁨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점심을 기다렸지만 끝내 점심을 만나지 못한 일이 “판단에서 벗어난 채로 계속”해야 할 일이라 느껴진다니, 그는 점심을 기다리면서 사실은 점심이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사람일 테다. 아마도 그에게 점심은 하루의 중간에서 배를 채울 시간 너머의 그 무엇이다. 이제 그의 사정을 들어보자.

 

 

점심에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었는데, 잠을 자다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요 제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었죠 점심에 만나서 고맙다고 할 예정이었습니다 다시는 그 사람과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괴로움입니다 점심으로의 잠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 김승일, <점심으로의 잠> 중에서

 

 

지난날 그는 잠을 자다가 “점심에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제 목숨을 구해준 사람”과의 약속이었으므로, 뒤늦게 눈을 뜬 그는 죄책감으로 끔찍하게 시달리는 오후를 맞이했을 테다. 그 이후로 은인을 만날 기회를 영영 잃었으니 그는 매번 그날의 점심으로, 자신이 잠에 취해 놓쳤던 그 점심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번엔 꼭 깨어나 은인을 만나겠다며 다짐하고 반성하는 것이다. 근사한 점심을 대접하며 “고맙다고” 말해주기 위해서, 그는 매번 그 아득한 점심을 향해 간절히 잠을 청한다.

 

 
점심으로의 잠으로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지금 찾아온 방문자는 중학교 교사인데 화재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본인만 살아남았습니다 지금 학교에 있는데 점심시간이고 한 아이가 울고 있다고 합니다 물어보아도 왜 우는지 말을 안 하는데 자신의 슬픔이 그 아이의 슬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그 아이의 슬픔이 정말로 저의 슬픔보다 더한 슬픔인가요?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진실을 말해주세요
 

 

그렇게 수백 번 잠을 자고 있으니 이제 그의 잠 속으로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그의 잠 속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슬픔을 품은 채 잠든 사람들일 테다. “화재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본인만 살아남”은 중학교 교사는 꿈에 자꾸만 울고 있는 아이가 나타난다고 그에게 읍소한다. 말없이 울기만 하는 그 아이는 아마 화재로 사망했던 학생일 테고, 말조차 잃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을 그 아이의 울음이 홀로 살아남아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보다 슬퍼 보여서, 교사는 괴로움에 묻는다. “그 아이의 슬픔이 정말로 저의 슬픔보다 더한 슬픔인가요?” 이 물음은 질문이 아니라 자책에 가까울 테다. 떠나보낸 사람이 떠나간 사람보다 더 슬플 수는 없다는, 그 말이 과연 진실인지 알 수 없는 그는 “당신의 괴로움에 비하면 제 괴로움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여기까지만 말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뿐이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원하는 답은 아니군요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대단한 곳은 아닌 것 같군요 맞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미안합니다 방문객이 점심으로의 잠을 떠나고 나면 저는 점심시간의 학생처럼 울곤 합니다 미안해요 저는 제대로 답해주지 못해요 아무리 울어도 속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에게서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방문객들은 “대단한 곳은 아닌 것 같군요” 실망하며 그의 잠을 떠나간다. 자신의 잠 속으로 들어왔던 “방문객”이 슬픈 표정으로 떠나고 나면 그는 울고 마는데, 은인을 내버린 자책감에서 벗어날 그의 “속죄” 방법은 그가 다른 누군가의 은인이 되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은인이 되어 그 사람을 살려준 후에, 자신도 자신의 은인처럼 잊히는 것. 그가 매번 빠져드는 ‘점심으로의 잠’은 은인을 재회하기 위한 소망인 동시에 은인이 되어주고자 하는 회개다. 그는 그런 순간을 기다리며 다시 긴긴 잠을 잔다.


우리는 습관처럼 아침과 점심과 저녁을 먹어 몸을 채운다. 그러나 문득 찾아오는 간절한 마음의 허기는 물과 음식으로 채울 수 없다. 시련과 미련과 죄책감 따위의, 그 깊은 구멍을 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오직 시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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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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