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베르테르의 서사를 완성시키는 선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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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7일 개막한 뮤지컬 <베르테르>가 순항 중이다. 25주년을 맞은 이번 공연은 3월 16일까지 디큐브 링크아트센터에서 만나볼 수 있으며, 추후에 부산 공연도 예정되어 있다.
<베르테르>는 현악기 중심의 실내악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클래식한 선율의 넘버들로 잘 알려져 있다. 인터미션 포함 165분간 진행되는 공연은 30개가 넘는 넘버와 함께한다. 각 넘버의 길이가 길지 않음을 고려해도 비슷한 러닝타임의 대극장 뮤지컬과 비교했을 때 많은 양이다. 이 넘버들은 2000년 초연부터 올해 25주년 공연을 하기까지 여러 스텝들의 손을 거쳐 다듬어지고 추가되며 지금에 이르렀다. 지금의 <베르테르>를 만들고, 베르테르와 롯데, 알베르트의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넘버들을 살펴본다.
저항할 수 없는 이끌림의 시작: 자석산의 전설
'자석산의 전설'은 극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넘버다. 사랑스러운 여인 롯데는 공원에서 아이들에게 인형극으로 자석산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먼 옛날 모험을 떠난 한 왕자의 배가 주위의 모든 것을 끌어당긴다는 전설 속의 산인 자석산에 끌려가 결국 부서졌다는 내용이다. 롯데의 낭랑한 목소리와 대조되는 비극적인 가사가 특징인데, 하필 롯데와 베르테르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왕자가 끝내 벗어날 수 없었던 자석산이 마치 앞으로 베르테르가 발 들이게 될 관계에 대한 비유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넘버는 초창기 공연 때는 없다가 2013년부터 추가된 곡이다. 짐작컨대 베르테르가 롯데에게 느끼는 강렬한 사랑을 소설과 달리 2시간 공연만으로는 관객에게 납득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고려하고, 개연성을 높이기 위해 추가된 요소가 아닐까 싶다. 자석산이라는 곳은 그 이름처럼 상징하는 바도 직관적이다. 이 넘버는 사랑이란 인간에게서 생겨나는 감정이지만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넘어서는 강력한 이끌림이고, 지금부터 할 이야기도 그러한 이끌림에 관한 것이라고 전한다.
계산을 벗어나는 것이 사랑: 사랑을 전해요
상심하지 말아요.
간절한 열정, 목마른 그리움. 모두가 순결한 기쁨
주판을 튕겨서 계산된 급료처럼 정해질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죠.
'사랑을 전해요'는 베르테르와 빌하임의 정원사인 카인즈가 함께 부르는 넘버다. 카인즈는 자신이 모시는 주인마님을 사모하지만, 신분과 처지가 달라서 고뇌에 빠져 있다. 베르테르는 그런 카인즈에게 다가가 사랑을 전하라고 응원해준다. 사랑이란 "주판을 튕겨서 계산된 급료"처럼 정해지는 게 아니니 용기를 내라고 말이다. 베르테르에게 사랑이란 가사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솟아나 기름을 끌어안고 불 속으로 뛰어들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은 사람을 행복과 절망 양극단 모두로 데려간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완전히 비합리적인 것이 베르테르의 사랑이다.
카인즈는 원작 소설에서는 큰 비중이 없지만, 뮤지컬에서는 베르테르에게 많은 영향을 미쳐 베르테르의 행동과 갈등의 동기가 되는 인물이다. 이 넘버에서 베르테르가 생판 모르는 카인즈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이유도 그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섣불리 용기를 내지 못하는 자신에게 건네고 싶은 말을 카인즈에게 대신 해주는 셈이다. 이 넘버는 2막에서 리프레이징되어 다시 등장하는데, 1막과는 달리 비극적인 상황에서 흘러나온다. 그래서인지 사랑을 전하라는 내용이지만 단조를 사용해 어딘가 음울하게 느껴지는 넘버다.
깨어나기 직전이 가장 아름다운 꿈: 하룻밤이 천년
<베르테르>에서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곡 중 하나로 쉽게 꼽히는 곡으로, 아름다운 선율이 인상적이다. 어색하던 첫 만남 이후 어느새 감정이 깊어진 베르테르와 롯데가 함께 부른다. 롯데가 자신도 모르게 베르테르를 그리는 사이, 베르테르는 꽃을 들고 홀린 듯이 롯데의 집 앞까지 온다. 처음에는 각자의 파트를 나눠서 부르다가 후반부 두 사람이 마주치면서부터는 화음을 이루는 곡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행복한 결말을 맞았다면 관계가 발전하는 중요한 넘버였을 것이다.
그러나 넘버가 진행되는 동안 베르테르가 고백의 타이밍을 몇 번 놓치고, 뜻밖의 소식이 두 사람을 찾아든다. 바로 알베르트가 도착했다는 것. 모든 앙상블이 환호하는 가운데 롯데는 알베르트를 만나러 달려나간다. 약혼자가 있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베르테르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다. 여기서부터 작품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바로 이어지는 넘버 '뭐였을까'는 베르테르의 참담한 심정을 잘 보여준다. 하룻밤 꿈처럼 그의 행복한 상상은 박살이 났다. 남겨진 것은 꿈에서 깨어나 홀로 남겨진 베르테르다.
접히지 않는 마음: 발길을 뗄 수 없으면
<베르테르>를 대표하는 넘버이자 1막을 마무리하는 베르테르의 솔로곡이다. 롯데의 약혼 사실을 알게 된 베르테르는 방황하고, 결국 롯데와 만나지 않기 위해 발하임을 떠나고자 한다. 여행가방을 들었지만 마음도 발걸음도 자석산에 이끌린 왕자처럼 좀처럼 발하임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의 심정이 넘버에 절절하게 담겨 있다. 대부분 뮤지컬 대표곡들은 고음이 있거나 극적인 전개를 보이는데, '발길을 뗄 수 없으면'은 상대적으로 길이도 짧고 고음도 두드러지지 않는 잔잔한 곡이다. 바꿔 말하면 음악적 기교가 아닌 감정 연기로 단시간에 관객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일까, 이 곡을 얼마나, 어떻게 소화하는지가 뮤지컬 배우로서의 연기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지표로 여겨지기도 한다. 섬세한 감정 표현이 노래 전체를 좌우하는 만큼 베르테르를 맡는 배우에 따라 분위기가 크게 달라지는 곡이기도 하다. 제작사 공식 채널에서 역대 베르테르들의 다양한 '발길을 뗄 수 없으면'을 감상할 수 있다. 새로운 베르테르들이 이 곡을 어떻게 소화할지도 기대를 모은다.
피할 수 없었던 갈등: 구원과 단죄
사나운 비바람 속 휩쓸리면 표류한 게 죄라면
기꺼이 품어 아량을 베푸소서
순결했던 그 영혼 품어주소서
계속 내재되어 있던 베르테르와 알베르트와 갈등이 터져나오는 넘버다. 1막에서 베르테르가 응원했던 카인즈가 주인마님을 지키려다 살인을 저지른 것이 표면적인 원인이다. 베르테르는 카인즈의 동기를 고려해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알베르트는 그래도 살인을 용서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상반된 두 사람의 입장을 드러내듯 하나의 넘버인데도 베르테르와 알베르트의 파트가 완전히 다른 곡조로 전개되는 것이 흥미로운 넘버다.
카인즈를 둘러싸고 불거진 이 갈등의 진짜 원인은 모두가 알다시피 롯데와 깊이 얽혀 있다. 베르테르는 사랑을 충동적이고 불확실한 이끌림으로 여긴다면, 알베르트는 사랑을 안정적인 상호 약속의 하나로 여긴다. 둘은 각자의 방식대로 롯데를 사랑하지만 그렇기에 서로를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니 베르테르가 발하임으로 돌아오면서부터 둘의 갈등은 예견되어 있었다. 카인즈의 사건은 방아쇠가 되었을 뿐이다.
균형이 깨져버린 관계: 다만 지나치지 않게
2막에 들어 내리막으로 치닫는 베르테르와 그를 지켜보는 롯데가 함께 부르는 넘버다. 롯데를 향한 마음을 정리하려 애쓰지만 마음이 자기 마음대로 될 리가 없기에, 베르테르는 끝없이 내적 갈등을 거듭한다. 그 내적 갈등이 외적으로 폭발해 알베르트와 맞붙는 넘버가 '구원과 단죄'라면, 롯데와 충돌하는 넘버는 '다만 지나치지 않게'다. 선을 넘지 않는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 롯데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는 베르테르는 번뇌한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이 한때 '하룻밤이 천년'을 불렀다고 누가 예상할 수 있을까.
베르테르와 롯데, 알베르트 이 세 사람의 아슬아슬한 균형은 베르테르의 타협과 포기, 알베르트-롯데 부부의 호의에 기대어 유지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랑을 지키려던 카인즈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베르테르도 크게 불안정해지고, 그 징조를 롯데도 감지한다. 그렇기에 "지나치지 않게"라고 선을 긋지만, 지금도 충분히 마음을 억누르고 있다고 믿는 베르테르는 한계에 다다른 것을 느낀다. 관객은 위태로운 두 사람을 보며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는 베르테르의 마지막 가사가 운명을 예견한다.
[김소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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