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다시 처음으로(2)

글 입력 2024.12.27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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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 by Yang EJ (양이제)]


 

문이 세게 닫히다란 사건이 벌어진 장소는 부엌이었지요. 먼저, 가족 중 부엌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누구인지부터 짚어봅시다. 바로 프란체스카입니다. 가족을 위해 삼시세끼 요리하고, 밥을 차리고 이를 치우며 설거지하는 뒷정리까지 모두 프란체스카의 몫이기 때문이죠. 당연히 하루 대부분을 부엌에서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가족들이 부엌에 머무는 건 아주 잠깐이지요. 밥 또는 간식을 먹거나 뒷문을 이용하기 위해 들르는 게 아니라면, 가족들이 굳이 부엌에 있을 이유는 없습니다. 프란체스카에게 부엌이 하루의 전부라면, 다른 가족들에게 부엌이란 하루의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만약, 부엌 싱크대에 작은 얼룩이 생겼다면 이를 가장 먼저 발견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잠시 공간에 머무를 뿐인 사람과 항상 그곳에 상주하는 사람, 둘 중에 누가 먼저 이 작은 변화를 눈치챌까요?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프란체스카와 남은 가족 중 부엌에서 벌어진 평소답지 않은 일, 즉 뜻밖의 일을 가장 잘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프란체스카입니다. 단순히 프란체스카가 부엌에 오래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부엌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졌을 때, 가장 불편할 이가 곧 프란체스카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체스카는 가족의 식사를 책임져야 합니다. 이는 곧 식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주방에 대한 책임으로 이어집니다. 조리 공간이 비좁다면, 재료를 손질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주방 기구가 더럽다면, 요리하는 데 기구를 사용할 수 없겠지요. 마찬가지로 재료가 상하거나 충분치 않다면, 요리를 시작조차 할 수 없을 겁니다. 사회가 프란체스카에게 일임한 '식사 준비'의 의무는 '주방 관리 전반'의 의무까지 함께 끌고 옵니다. 그렇기에 프란체스카가 부엌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다시 문이 세게 닫히다란 사건으로 돌아와 봅시다. 가족의 식사 준비를 전담하며 주방 관리까지 책임지게 된 프란체스카는 부엌의 변화에 민감합니다. 부엌에서 벌어진 뜻밖의 일과 뜻밖이지 않은 일을 구분하는 감각이 다른 가족에 비해 더 활발할 수밖에 없지요. 결국, 갑작스레 닫히는 문소리는 프란체스카에게 더 크게 와닿을 수밖에 없습니다. 프란체스카의 '어머니', '아내', '여성'이란 역할로 인해 문이 세게 닫히다는 프란체스카에게 사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좀 더 간단한 이유도 있지요. 프란체스카는 계속되는 집안일을 하느라 집, 특히 부엌을 벗어날 수 없지만, 가족들은 그녀처럼 부엌에 붙박일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빠르게 자리를 이동한 가족들에겐 문소리란 그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부엌을 떠날 수 없는 프란체스카에겐 가까이서 들리는 굉음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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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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