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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오피니언은
연극 <소년이 그랬다>에 대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미성년자인 범죄자를 소년범이라고 부른다. 한국 사회에서 소년범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어 왔다. 그리고 이에 대해 다룬 예술 작품들은 계속 있었다. 과연 소년범에게 지금과 같은 형량이 맞는가? 소년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연극 <소년이 그랬다>는 소년범에 대해 다루는 작품이다. 본 공연은 21년도에 올라갔지만, 국립극단의 온라인 극장 시스템을 통해 온라인으로 만나볼 수 있었다. 필자는 희곡을 먼저 읽고, 오랜 시간 후 온라인 공연을 관람했다. 작품 자체는 11년도 작품으로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럼에도 극이 주는 논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느꼈다.

연극 <소년이 그랬다> 공연 사진 - 출처 국립극단 X (@NTCK_)
<소년이 그랬다>의 두 소년, 민재와 상식은 평범한 소년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날, 두 사람은 평소 상식을 괴롭히던 ‘돼지‘라는 폭주족에게 장난을 치고 도망가던 중이었다.
‘돼지’를 더 골탕 먹이고 싶었던 둘은 육교 위에서 그 일행을 향해 돌멩이를 던진다. 그러나 그 돌멩이가 엉뚱한 승용차를 맞추며 운전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난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폭주족을 쫓던 형사 광해와 정도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사고, 그리고 점점 커지는 여론에 두려움에 떨다 민재는 결국 자수를 한다. 그렇게 소년 재판을 받게 되지만, 두 사람은 모두 미성년자였기에 가벼운 처벌만 받는다. 그리고 법정에서 나오는 길, 두 사람은 피해자의 유가족을 마주친다.
한편, 광해와 정도는 재판 전 두 아이를 취조한다. 부드러운 태도로 아이들을 대하려 애쓰는 광해와 아이들을 압박하는 정도. 두 사람의 태도 차이는 짜장면집에서의 논쟁으로 이어진다.
두 아이가 과연 유죄인지 무죄인지, 어떤 처벌을 내려야 하는지를 두고 이어지는 논쟁. 만약 피해자가 자신의 아버지였다면, 만약 가해자가 자신의 어린 딸이었다면 어땠을지. 두 사람의 논쟁은 결국 미완결된 상태로 끝난다.

연극 <소년이 그랬다> 공연 사진 - 출처 국립극단 X (@NTCK_)
청소년 범죄라고 하면 많이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가 두 형사의 논쟁처럼 처벌에 관한 내용일 것이다. 과연 그 아이들에게는 어떤 처벌이 맞을지, 극 중에서 내려진 판결을 보면 사람을 죽인 것 치고는 너무 적다는 생각과, 그렇다면 과연 어떤 형벌이 맞는지에 대한 생각이 교차한다.
하지만 극은 이런 어른들의 논쟁이 아닌, 아이들의 세계 속에서 사건을 마주한다. 사건의 발단이 된 ‘돼지‘의 괴롭힘에 상식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으며, 아이들이 마주한 법정의 언어에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밖에 없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강요된 대답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이러한 면은 연출에서도 드러난다. 극은 1인 2역, 배우 한 명당 소년 배역 하나와 형사 배역 하나를 맡는다. 이마저도 형사와 소년이 대면하는 장면은 취조 장면, 즉 온전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환경에서밖에 없다. 어른들이 촉법소년에 대해 논하는 동안, 아이들의 세계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다.

연극 <소년이 그랬다> 공연 사진 - 출처 국립극단 X (@NTCK_)
민재와 상식, 두 소년이 저지른 일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극을 보다 보면 계속해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범죄자지만, 아직 인격이 형성되지 않은 청소년을 성인과 똑같이 처벌하는 일이 과연 맞는 일인가? 물론 아이들은 실수였지만, 그렇다면 유가족의 고통은 누가 보상해 주는가?
희곡을 읽은 옛날도, 다시 온라인 극장으로 작품을 마주한 지금도 여전히 머리가 복잡하고, 답을 내리기 쉽지 않다. 이러한 극이 필요한 이유는 소년범죄를 소년의 시선에서 다시 보고, 그 복잡한 딜레마를 누군가와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단순히 ’촉법소년은 나쁘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문제에 관해 관심을 두고 진중하게 바라보는 것. 그것이 이 극의 의미라 생각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