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을 만나느냐가 인생을 좌우한다는 말처럼, 화가들이 어떤 사랑을 했느냐에 따라 그림이 좌우되기도 합니다. '벌거벗은 세계사', '톡파원 25시' 등에 출연하며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풀어준 이창용 작가는 자신의 저서 '사랑을 그린 화가들'에서 7명의 화가들의 사랑이야기에 대해 들려주고 있습니다.
책에서는 화가들의 삶을 그림과 연관지어 설명을 하고 있어, 마치 박물관에서 도슨트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설명하는 그림이 책 속에 실려 있어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가장 인상깊었던 화가의 사랑은 '라파엘로 산치오'와 '마르게리타 루티' 간의 사랑이었습니다.
1.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라파엘로 산치오
좌 / 마르게리타 만나기 전 성모마리아 그림
우 / 마르게리타 만난 후 성모마리아 그림
라파엘로 산치오는 화가로서 명성을 올리던 어느날, 빵집 소녀인 마르게리타 루티를 만나게 됩니다. 평생 그녀 한 명을 사랑했던 라파엘로 산치오는 그녀를 만난 이후, 성모 마리아 그림도 자신이 사랑하는 마르게리타 루티와 닮게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금발 머리의 성모마리아를 그렸다면, 마르게리타 루티와 사랑에 빠진 이후부터는 연갈색의 머리와 '마르게리타'를 상징하는 진주 장식을 머리에 한 성모마리아를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둘은 12년 간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며 사랑했으나, 라파엘로 산치오의 명성이 높아질 수록, 교황의 스승이자 바티칸의 회계 책임자인 비비에나는 자신의 딸을 라파엘로와 결혼시키고자 합니다. 라파엘로 산치오는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결국 약혼은 하되, 그림을 그려야한다는 핑계로 결혼은 차일피일 미루며 마르게리타와 여전히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비비에나의 강요로 그의 딸과 결혼식 날짜가 잡히게 되고,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을 해야했던 라파엘로는 열병을 앓다가, 정략 결혼 며칠 전 죽게 됩니다. 마르게리타 루티는 라파엘로의 곁은 지켰으나, 약혼자도 정부도 아니었기에 장례식에 참여하지 못했고, 수녀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수녀원 들어갈 당시 자신의 처지를 '과부'라고 적었으며, 라파엘로 산치오가 죽은 지 2년 만에 마르게리타 루티도 죽게 되었습니다.
2. 명작 속에 남은 파라만장한 인생, 렘브란트 판레인
렘브란트 '2구역의 민병대 프란스 반닝 코크 대위가 부관에게 민변대의 출진을 명하다'
렘브란트가 화가로서 성공을 한 데에는 '사스키아'라는 여인의 도움이 지대했습니다. 사스키아는 어릴 적 부모님과 형제들을 잃었지만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렘브란트와 사스키아가 결혼하면서, 사스키아는 무조건적인 지지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얼마 안 되어 사스키아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위 그림에서 닭을 잡고 있는 작고 밝게 빛나는 여인이 사스키아를 본따 그린 여인입니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르던 렘브란트는 비싼 값에 값어치 없는 골동품을 사들이거나, 다른 여자를 만나 재산을 뜯기는 등, 사스키아의 죽음 이후 렘브란트의 삶은 파라만장해집니다. 아이를 돌봐주로 온 유모 '헤이르티어', 이후에는 '헨드리케'와 사랑에 빠지지만, '헤이르티어'와 6년간 사실혼 관계를 유지한 탓에 이별할때 위자료를 청구하게 됩니다. '헤이르티어'는 렘브란트를 고소까지 하게 되고, 도덕적 청렴과 모범적 삶을 강조하던 칼뱅교를 따르던 네덜란드는 렘브란트를 비판하며 작품 의뢰 건수도 줄어들게 됩니다.
렘브란트 '유대인 신부'
렘브란트가 마지막까지 깊게 사랑했던 여인은 '헨드리케'인데, 그의 작품 '유대인 신부'에서의 여인이 '헨드리케'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렘브란트의 딸을 임신했을 당시, '헤이르티어'로 인해 종교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으며, 렘브란트의 첫 부인 유언(렘브란트가 재혼을 하지 않아야 사스키아 자신의 유산을 상속할 것이며, 재혼 할 시 유산 상속을 취소할 것)으로 인해 결혼하지 못한 상태로 렘브란트 곁에 남게 됩니다. 흑사병으로 죽기 직전까지도 파산한 렘브란트 곁에 남아있을 정도였습니다.
3. 아름다운 사랑의 황금빛 키스,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클림트는 그림 속 여성 모델들과 자주 사랑을 나눠서, 그가 죽은 이후에 최소 6명의 사생아가 나왔으며, 이들 포함 자신이 클림트의 사생아라고 주장한 이들은 14명일 정도였습니다. 비록 클림트의 개인 사생활은 바람직하지는 못했으나, 그림만큼은 인정받았습니다.
특히 황금으로 장식된 클림트의 작품들이 강렬하고 인상적이지만, 사실 클림트가 황금을 그림에 활용한 기간은 10년도 채 되지 않으며, 황금을 사용한 작품 또한 21점뿐이라고 합니다. 위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과 그가 작업하던 '스토클레 저택 벽화'가 마지막 황금 이용한 작품입니다.
이때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본래 체코 출신의 성공한 설탕 제조업자이자 금융업자인 유대계인 페르디난트 블로흐 바우어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연속된 유산으로 아이 낳는 것을 포기하고 빈 사교계의 유명 인사가 된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어느날 클림트를 만나게 됩니다. 서로 사랑에 빠졌고, 오른손 중지가 절단된 아델레를 위해 클림트는 그녀의 오른손이 보이지 않도록 초상화를 그려주는 등 사랑 가득 담긴 그림들을 남겼습니다.
이후 클림트가 두번째로 깊이 사랑했던 여인이자, 클림트가 생애를 다하기까지 30년 넘게 함께했던 여인 에밀리 플뢰게를 만나게 됩니다. 클림트가 아꼈으며 함께 그림 공부를 했던 남동생 에른스트는 헬레네 플뢰게와 결혼합니다. 하지만, 집안 내력인 뇌출혈로 인해 에른스트가 죽고 클림트는 크게 상심합니다. 그나마 조카를 돌보며 시간을 보내던 중, 헬레네 플뢰게의 여동생인 에밀리 플뢰게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클림트는 평생 동안 글 쓰는 것을 선호하지 않아 580여통의 편지를 남겼는데 그 중 400통이 에밀리 플뢰게에게 보냈던 것이라 하니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4. 사랑과 그리움을 관통하는 불안과 외로움, 에드바르 뭉크
에드바르 뭉크 '이별'
노르웨이 출신 화가 에드바르 뭉크는 첫사랑부터 연이은 사랑에서 결국에는 이별을 통보당하거나 안 좋은 이별을 맞이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그림 '이별'에서는 마음이 아파 심장을 쥐고 있는 뭉크와 미련없이 바람처럼 사라지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또다른 그림 '흡혈귀'에서도 여자가 남자의 피를 먹어 죽게 만드는 모습이 그려져 있기도 합니다.
이런 뭉크는 어느날 '툴라 라르센'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툴라에게 함께 외국 여행을 가기도 하였는데, 당시 노르웨이에서는 결혼 안 한 남녀가 단둘이 해외를 여행하는 것에 대해 비난 섞인 시선이 있었으며 툴라는 뭉크보다 4살 연상이었기에, 툴라는 뭉크에게서 '확신'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자기 방어 기제인지 혹은 뭉크의 독특한 사상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뭉크는 툴라에게 '플라토닉 사랑을 원한다, 결혼은 하되 내가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는지 간섭하지 말아달라' 등의 요구를 하게 됩니다. 결국 툴라는 그를 떠나게 됩니다.
5. 인간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분출하다, 에곤 실레
에곤 실레 '포옹'
에곤 실레는 논란이 많은 화가 중 한 명입니다. 남녀의 모습을 여과없이 모두 그림으로 옮겨 닮거나 어린 소녀들의 누드화를 그렸던 이력 때문입니다. 그러나 화가 자체의 논란과는 상관없이, 그의 솔직한 그림은 호불호가 갈리기는 하지만 여전히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에곤 실레는 클림트의 제자이기도 했는데, 어느날 클림트의 작업실에서 자신보다 17살 어린 소녀 '발레리 노이질'을 만나게 됩니다. 서로 사랑에 빠졌으며, 에곤 실레 또한 발레리 노이질을 만난 4년 동안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에곤 실레가 어린 소녀들의 누드화를 그린 일로 감옥에 가게 되자, 발레리 노이질이 동분서주하며 후원자들을 설득했고, 면회가 금지되었음에도 몰래 에곤실레를 찾아가 그를 다독이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에곤실레는 이전보다는 절제된 그림을 그리며 명성을 얻고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결혼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후원자에게 이렇게 편지합니다. "저는 결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 상대가 발레리는 아닙니다."
발레리 노이질이 에곤실레에게 헌신적이었던 것은 맞지만, 그녀는 집안도 재력도 별볼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곤 실레는 빈에서 발레리 노이질과 함께 살 무렵, 맞은편 부르주아 집안인 '하름스' 집안의 두 자매에게 접근합니다.
언니 아델레 하름스와 동생 에디트 하름스 중 누구에게 고백할지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중, 에디트 하름스와 결국 결혼을 하게 됩니다. 하름스 집안에서는 에곤 실레를 반대했으나, 에디트 하름스는 에곤 실레와 적극적으로 결혼하고자 하였습니다. 이후 에디트 하름스와 에곤 실레는 좋은 부부관계를 유지했으나, 에디트 하름스가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스페인 독감에 걸려 죽게 됩니다. 이로 인한 슬픔 때문인지 에곤 실레도 에디트 하름스가 죽은지 사흘 뒤에 젊은 28세의 나이로 죽게 됩니다.
6. 나에게 최악의 사고는 사랑하는 그를 만난 것, 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 '두 명의 프리다'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인생에서 두 번의 사고를 당했다고 말합니다. 첫번째 사고는 학교에서 집으로 오던 중 18살 즈음 버스 사고로 하반신이 거의 다 부서졌던 것이고, 두번째 사고는 남편 '디에고 리베라'를 만났던 것입니다.
프리다 칼로는 6살 때부터 척추성 소아 마비로 아팠으며, 18살에는 버스 사고로 하반신과 척추를 크게 다쳤습니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서 의사를 꿈꾸었으나 건강 상의 이유로 병원에 누워있어야하는 일이 잦아지자 화가로 꿈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프리다 칼로는 화가로서의 커리어도 쌓고 '멕시코 혁명' 시기 즈음 정치인으로서도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같은 정치인이자 언변가였던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게 됩니다. 프리다의 집안에서는 디에고와의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전부터 디에고는 시체를 구매하여 식인을 해본 경험이 있다는 등의 발언을 한 적이 있고, 불과 9살 때 젊은 여교사와 관계했으며 12살때 철도 기술자 분이과도 관계했다는 등의 발언을 한 적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리다는 결혼을 했으나 약한 몸으로 인해 유산이 계속되었고, 그 유산으로 인해 동생 크리스티나가 병간호를 하러 프리다의 집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남편 디에고는 프리다가 가장 아끼던 이 막내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불륜을 저지르게 됩니다.
디에고는 이전부터 바람을 많이 폈고, 그의 호색한에 대해서는 프리다도 알고는 있었지만 크게 절망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동생 크리스티나와 디에고가 불륜을 저지르자, 프리다는 매우 상심하게 됩니다. 프리다도 다른 남자를 만나보고, 디에고와 이혼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다시 디에고와 재혼하게 됩니다.
위 그림 '두 명의 프리다'는 오른쪽의 과거의 자신, 즉 디에고가 좋아하는 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왼쪽의 자신이 끊어내고자 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을 그리면서 다짐을 했어도 결국 디에고와 재혼한 그녀는 '디에고와 나'라는 그림에서 자신의 이마에 디에고가 새겨진 모습을 그리면서 '결국엔 디에고를 내 삶에서 지우지 못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7. 전쟁의 포화를 가로지른 사랑과 그리움, 이중섭
이중섭, '서귀포 게잡이 추억'
이중섭 화가는 본래 평안남도 최고 부잣집의 막내 아들이었습니다. 비록 4살 때 아버지를 잃기는 했지만, 자신보다 12살 많던 형이 집안을 잘 이끌어주었기에 어려움 없이 자랐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이중섭 화가는 이북 출신이지만 북한 공산주의를 싫어하였고 이후 남쪽으로 내려왔기에, 북한 측에서는 '문화 사상 검증 사업'의 일환으로 이중섭에 대한 기록을 지우게 됩니다. 그래서 이중섭 화가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이중섭 화가는 일본 제국 미술학교에 입학했으나 보수적이고 엄격했던 분위기에 억압을 느꼈고, 이에 현대미술을 가르치는 문화학원 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나게 됩니다. 그림이라는 같은 관심분야와 잘 맞는 성격 등으로 둘은 결혼하게 됩니다.
당시 일제 강점기 시기, 일본에서는 조선 사람들을 '식민지 출신'이라 부르며 하찮게 여기기도 하였으나, 야마모토 마사코의 집안에서는 그녀가 이중섭과 교제하고 결혼하는데에 큰 반대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중섭 화가는 야마모토 마사코와 결혼하여 일본에서 지냈으나, 창씨개명도 거부하고 작품 화가명 기입도 한글 자모로 할 만큼 조선에 대한 애국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징병을 요구하자, 이중섭 화가는 징병을 거부하며 조선으로 들어왔습니다.
이후 1945년 남북은 분단되고, 북한 공산당에서는 토지를 몰수하면서 이중섭의 형을 죽이고 시신조차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이중섭은 급격히 가난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원산을 떠나 부산, 제주도 등에 내려와 지냈으나 가난으로 인해 가족들이 고생했으며 장인의 부고 소식까지 전해지자, 이중섭 화가는 아내와 아이들은 일본에 보내게 됩니다.
가족과 떨어져있던 4년 동안 가족이 그리웟던 이중섭 화가는 그림에도 편지를 쓰고, 실제로 보낸 편지만 300여통이 넘었습니다. 가족들과 재회할 날만을 기다리며 일본에 갈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림에 몰두합니다. 가족들과 가난했어도 함께 했을 시절에 같이 바닷게 주워먹던 추억을 회상하며 그림 '서귀포 게잡이 추억'을 그리게 됩니다. 다양한 작품을 그리며 전시도 나름 성공적으로 마치지만, 그림 구매자들은 대금 지불을 미루게 되었고, 그 와중에 간염까지 앓은 이중섭은, 가족들을 보지 못한 채 1956년 9월 6일에 서대문적십자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후 야마모토 마사코는 이중섭의 작품을 한국에 기부하는 등 노력했으며, 2022년 10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