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전히 여전하고 또 너무 달라진 우리 [영화]

영화 '미망'
글 입력 2024.12.02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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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내내 비포 시리즈가 떠올랐다. 화려한 장면 없이, 빈틈없이 오가는 대화만으로 러닝타임을 꽉 채웠던 비포 트릴로지처럼, 영화 '미망'은 종로 일대를 배경으로 끊임없이 걸으며 대화하는 두 인물만으로도 충분했다.

 

영화는 시간의 흐름을 기준으로 해 3부로 나뉜다. 세 이야기의 제목은 모두 '미망'으로, 동음이의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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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미망(迷妄)은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다'라는 뜻. 그 의미처럼 아직 어린 주인공 여자와 남자가 등장한다.

 

과거 연인이었지만 헤어진 두 남녀가 우연히 종로 한복판에서 마주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행인들과, 형형색색의 간판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배경을 뒤로 하고 두 사람은 밀린 대화를 나눈다.

 

기억력이 좋지 않지만 여전히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은 남자를 보며 사람은 달라지지 않는다며 가볍게 타박하는 여자, 그러나 그 말이 무색하게 무엇을 하고 사는지도 모를 정도로 둘 사이의 간극은 커져 있다.

 

그림을 배우고 있는 남자와 극장에서 모더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여자. 여자는 불현듯 이순신 동상을 옮길 수도 있다는 뉴스를 봤다고 말하고, 남자는 처음 듣는 소식이라 답한다. 둘은 빨간불의 횡단보도를 앞에 두고 헤어진다.

 

이별 후 남자는 그림 선생님이자, 현재 연인인 여자를 만나 다시금 이순신 동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여자에게 들은, 이순신 동상을 옮길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마치 자신이 알아 온 이야기처럼 말하고, 또 칼집을 오른쪽에 찬 이유를 주제로 대화를 이어간다. 이순신이 왼손잡이였을 수도 있다는 설과, 하지만 그걸 정확히 기록해 둔 문헌을 찾지 못해 결국 진실을 밝혀낼 수 없다는 사실.

 

어리숙했던 그때의 우린 모든 걸 다 아는 줄 알았지만, 실은 무엇 하나 알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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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야기는 미망(未妄),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다'.

 

영화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여자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 서울극장에서 모더레이터로 근무하고 있는 여자는 GV가 끝난 기념으로 한 회식 중간에 빠져나와 집으로 향한다. 그를 따라 나온 팀장과 지하철역을 향해 걸으며 둘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왜 따라나온 거냐는 여자의 물음에 팀장은 조심스레 속마음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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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팀장에게 여자는 갑자기 영화 이야기를 꺼낸다. 영화 주인공처럼 자신에게 아이가 있다면, 떠나갈 거냐고. 떠나지 않을 거라고 답하는 팀장, 그리고 사실 아이가 없다고 말하는 여자에게 아이러니하게도 팀장은 자신에겐 아이가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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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이야기는 미망(彌望), '멀리 넓게 바라보다'.

 

또다시 시간은 흘러 주인공 남녀와 그들의 친구는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만난다. 학창 시절엔 붙어 다녔을 그들이지만, 현실에 치여 경조사 때만 얼굴을 보게 된 지 오래. 어렸을 때처럼 사소한 것으로 말다툼하다가도, 너무 멀어져 버린 서로의 모습에 주춤대고 망설인다.

 

싸우고 실망하고 헤어졌을 그들이지만 그 모든 뜨거웠을 감정들은 시간 뒤편으로 열화되어 '알고 보면 다 별거 아닌' 것들이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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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배경인 종로 일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2부에서 백성들이 양반, 귀족을 피해 다니던 뒤안길인 '피맛골'이 현대에도 남아 살아 숨 쉬는 게 생경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이 오가며 대화하는 배경, '길'은 언제나 그 자리 그대로 남아 있으며, 그 길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모든 기억이 연결된다.

 

비록 이순신 동상을 옮기네, 어쩌네 하고, 자주 가던 가게엔 못 보던 가게가 들어서기도 하지만 주인공들의 단골 술집 '소우'처럼 늘 그 자리에서 변치 않는 것도 있다고 믿고 싶다. "헷갈릴 땐 변하지 않는 것들을 지표 삼으면 된다"는 영화 속 대사처럼, 영원한 건 없다마는 그럼에도 여전히 제자리에 있는 무언가를 확인할 때 우린 안도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렇게 같은 곳을 맴돌며, 조금씩 외연을 확장해 가고 있다. 여전히 여전한 모습을 하고 같은 길을 반복해 걷는 듯했지만, 한참 지난 후 뒤돌아보면 '멀리 넓게 바라보는' 너무나도 초연한 시야를 가져버린 채로. 그렇게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무뎌지는 삶의 진리를 '미망'은 쓸쓸히, 그리고 담담히 그려낸다.

 

차마 풀어쓰기 어려운, 빠르게 주고받는 대화 사이사이 비유와 센스를 보는 재미가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영상으로 직접 관람하길 권하고 싶다.

 

시간의 공백을 두고 등장한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보면 지금과 또 다른 감상을 남길 수 있을 것 같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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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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