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불꽃처럼 타오르는 힘들에게 - 연극 '붉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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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해보자면, 나는 지금껏 세상 돌아가는 뉴스에 별 관심이 없었다. 관심을 가질 이유도, 계기도 없었다고 느껴왔다. 세상 돌아가는 꼴은 언제나 어지럽고, 내가 결정하거나 변화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사회이자 급물살처럼 휩쓸려가는, 그저 흘러가기만 한 것이라 생각했다.
오른쪽 발목 인대가 파열되어 한 달간 휠체어를 타고 다녔던 고등학생 시절. 딱 한 달간 매일 새벽 아버지 차를 타고 등교했다. 그때 차 안에서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라디오 뉴스가 귀 따가울 정도로 듣기 싫었다. 왜 아침부터 나와 관련 없는 세상 이야기를, 그것도 부도덕한 정치인들의 싸움과 이름 모를 사람들의 분쟁을 폭포수처럼 들어야 하는지 그저 성가셨다. 미친 듯이 잠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귀를 막지는 못하고 불편한 라디오 소리를 꾹꾹 참아가며 귓바퀴 뒤로 흘려보냈다. 그나마 운전하는 아버지의 피로함을 깰 수만 있다면, 나와 상관없는 소음 따위는 그냥 무시하지 뭐. 눈을 질끈 감고 나몰라라 했던 그 시절의 관성은 오래 현재진행형이었다.
관성, 당연하게 몸에 붙어있던 이것이 조금씩 떨어져 나간 건 완전히 최근의 일이다.
문득 현재 발 딛고 서있는 이 삶이 완벽한 과도기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아이도 어른도 아닌, 그렇다고 청소년도 아닐뿐더러, 마냥 어리기만 한 병아리 새내기도 아닌 이 상태. 돈을 벌 수 있는 몸은 있지만 스스로 의식주를 0부터 100까지 책임질 수는 없는 상태. 세상은 나를 포함한 동년배들의 발달 시기를 ‘청년’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기로 했다.
청년의 정체성을 온몸에 무장했다는 걸 인식한 후 삶의 새로운 챕터를 여니, 이제야 세상의 주파수가 몸에 진동하기 시작했다. 현재 ‘청년’이라는 상태는 곧바로 더 크나큰 책임의 눈덩이들이 커지는 출발선에 왔다는 것. 더 이상 가족 울타리 안에서 분유 먹듯이 요람 속에만 있을 수 없는 상태. 두 팔 두 다리 거뜬하면 얼른 사회로 나가 일인분 몫을 하는 것이 응당한 상태. 어떤 상황에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와 관계없이 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 그래서 더 바스러지기 쉬운 상태. 몸은 탄탄해졌지만 마음과 정신은 보다 더 연약한 상태로 위축될 위험이 도사리는 시기.
“어쩌면 모든 ‘나’라는 존재는 태생적으로 자폐아일지 모른다. 우리는 세계의 실체와 대면해 본 적이 없고, 타자의 본질에 닿아본 적이 없다. 우리가 궁극에 이르러 하나의 의식으로 수렴할 때까지, 모든 나란 존재는 그렇게 홀로 무한한 시간 동안 세상을 여행할 것이다”
- 도서 <열한 계단(채사장)> p.396
그리고 언젠가 읽었던 책의 한 구 절이 정신에 이슬처럼 맺혔다. 태생적으로 모든 ‘나’라는 존재가 자폐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단 한 번도 세계의 실체와 대면해 본 적 없을 수도 있다는 물음표가 수면 위로 올랐다. 사회 속에서 자랐고 길러졌지만, 정작 사회에 대해서 진정으로 아는 것은 정말로 별로 없었기에. 그 많은 세상의 소리 또는 소음이 한 번도 달팽이관을 넘어 이 몸의 실체 안에서 울려 퍼진 적은 없었기에.
이제서야 나와 세상의 단절된 상호작용을 감각했다. 이제야 세상을 뒤늦게 파헤쳐 보게 되고, 무수히 벌어지는 역사들에 시선을 보낸다. 양방향적 관계를 맺으려는 최초의 시도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반성하기로 했다. 연극 <붉은웃음>을 보기로 결심한 것은 단 한 걸음이나마 세계의 실체와 대면해 보고자 낸 용기였다.
아트인사이트 활동을 3년 넘게 하다 보면 연극 포스터나 소개 글만 읽어도 대략 어떤 분위기와 느낌의 이야기일지 감이 온다. 그런 측면에서 <붉은웃음>은 원래의 관성대로라면 스크롤을 빠르게 넘기고 창을 닫아버렸을 수도 있었다. 어두운 배경에 허망한 듯, 쓸쓸한 듯, 한이 서릴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는 포스터를 보면 그 칠흑 같은 공포가 0.1초 만에 그려지면서 조금은 도망치고 싶었던 거다. 안 그래도 마음이 갑갑하고 답답하면서 막막하기만 한데, 자발적으로 더 극한의 어두움에 나를 몰고 가야 한다면 망설여지는 것이다.
그래도 단 한 가지는 믿고 있었다. 정말로 이 세상의 모든 ‘나’가 태생적 자폐아라면, 세계의 실체와 단 1mm라도 가까워지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심지어 3년 전 아트인사이트 문화 초대로 봤던 <산책하는 침략자>에서 인상적인 무대를 보여준 윤성원 배우가 무려 1인극을 펼치는 <붉은웃음>이라면, 기꺼이 한 줌의 용기를 붙들고 관객석에 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11월의 마지막 주 월요일, 더줌아트센터로 찾아가 <붉은웃음>에 블랙홀처럼 빠져들었다.
[시놉시스]
1904년, 전쟁에서 두 다리를 잃고 피폐해진 영혼으로 돌아온 형은 두 달 동안 책상에서 쉬지 않고 글을 쓰다 죽음을 맞이했다. 무엇을 쓰는지, 왜 책상 앞에서 쉬지도 않고 쓰기만 하다가 죽었는지, 전쟁에서 겨우 살아 돌아왔는데 왜 그렇게 죽어야만 했는지, 동생은 이 모든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형의 죽음을 더 알고 싶다. 그는 형에게 질문한다. 도대체 붉은 웃음이 무엇인지를…
2024년, 쓰레기로 뒤덮인 한 평 남짓 작은 원룸에서 한 청년이 죽은 지 두 달이 넘어서야 발견됐다. 집주인의 연락을 받고 찾아간 유품 관리사에게 청년 고독사는 이제 낯선 일이 아니다. "실례합니다." 간단한 목례 후 방문을 열자 작은방을 채우는 무거운 질문이 그를 맞이한다. 젊은 영혼은 왜 이 작은방에서 나오지 못하고 홀로 쓸쓸한 죽음과 함께 고립되어야만 했을까…
연극 <붉은웃음>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러시아의 대표적인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레오니드 안드레예프의 소설을 원작으로, 1904년 전쟁의 광기 속에서 고통받는 형제와 2024년 작은방에서 고독하게 스러져가는 청년의 이야기를 그렸다. 원작인 소설은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전쟁의 광기와 인간 내면의 공포를 리얼리즘과 상징주의 기법으로 그렸다.
2024년 11월, 우리 앞에 이 이야기로 실재하는 자는 단 한 명이다. 시대를 초월하는 등장인물 4명은 윤성원 배우가 홀로 연기한다. 극 중에서 그는 1904년의 형과 동생, 2024년 고독사한 청년, 유품정리사가 되었다. 전쟁에서 두 다리를 잃고 영혼을 잃은 듯 돌아온 형과, 미쳐가는 형의 모습에 분노하고 좌절하는 동생. 아무도 찾지 않는 방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지금의 청년과 그곳을 찾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하게 등장하는 유품정리사까지.
더줌아트센터 제공
무대를 보는 내내 ‘지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정한 연극을 보고 있구나’를 느꼈다. 왜 지금까지 이런 연극은 세상에 없었을까, 이렇게 무대 위에서 한 명의 살아있는 사람이 이만한 ‘힘’을 보여준 것을 마주한 적 없었을까. 탑처럼 쌓아 올려진 비닐봉지 더미를 나뒹굴고, 공포와 광기에 압도되어 폭발하며, 발작인지 광기인지 미쳐버리는지 모를, 초신성 폭발 같은 움직임을 보여주는 무대에 단 한 명이 있었다.
연극은 그저 무대 위에서 일시적으로 전시되고, 막이 끝나면 “그렇게 모두가 행복하게(또는 불행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사라져버리는 무엇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붉은웃음>은 달랐다. 태생적으로 세상에 대한 자폐아인 모든 ‘나’에게, 지금 여기에서 그 사람들이 실제 ‘살아있었음’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정말 눈앞에서 그 살아있음을 목도하도록 말이다.
사실 무대에서 보여주는 사건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이 연극이 만들어진 의도. 그것은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공명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100년 전 전쟁의 잔혹함 속에서 바스러졌던 한 명의 별 같은 청년과, 극단적 개인화와 고독에 질식해 서서히 죽어가는 또 다른 현대의 별 같은 청년이 결국 같은 ‘나’로 보였다. 여기서부터 이 연극의 플롯이라든지 장면 전환의 자연스러움이라든지, 그 캐릭터가 지니는 서사들 자체는 부수적인 것이 되었다. 애초에 연극에서 그들의 서사를 더 깊게 꺼내지도 않았을뿐더러, 프로그램북 인터뷰에서도 서사를 자세히 건져올리는 것은 지양했다는 이야기를 보았다.
더줌아트센터 제공
1인극의 정수가 아닐까 싶다. 무대에는 단 한 명의 사람만 등장해 20세기와 21세기를 한순간 종횡무진하며 무수히 많은 ‘나’들을 표현한다. 별이 죽어갈 때, 별은 태양이 평생 방출할 에너지를 한꺼번에 방출하며 초신성이 되는데 윤성원 배우가 무대에서 보여준 그 힘은 가히 초신성과 맞먹었다. 한편으로, 한 명의 인간이 죽어갈 때 미쳐버릴 때 이렇듯 압도적인 힘을 방출하고 스러진다는 것은 역으로 얼마나 무수한 가능성을 본질적으로 지닌 존재겠냐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같은 시기의 청년으로서, 이 연극은 “우리에게 이만한 힘이 있으니 부디 살아달라”라고 간곡히 외치고 있는 것처럼 들려왔다. 단지 통계적 숫자로 밝혀지거나 세어지는 한 인간이 아닌, 폭발적인 힘을 내재하고 있는 존재의 실체를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부디 “살아내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극을 다 본 그날에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자꾸만 비현실감이 들었다. 혜성처럼 지나간 무대의 시간을 다시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 이름 모를 관객들에게 100년을 거스르는 수많은 ‘나’들, 차마 펴지 못하고 으스러진 힘들을 보여주고자 부단히 애썼을 단 한 명의 배우, 윤성원 배우의 무대 뒤편 다짐들이 자꾸만 추측되면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한 무대가 소중한 선물처럼 느껴졌다. 그가 소생한 불씨 같은 외침이 자꾸만 귓속에서 윙윙 맴도는 것 같았다. 흙바닥을 나뒹굴고, 공중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뚝뚝 맞으며.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신지예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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