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래식 음악은 짧게는 100년, 길게는 4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주 고른 채에 걸러져 살아남은 작품이다. 그런 작품을 비범한 재능을 지닌 음악가들이 평생에 걸쳐 일궈 낸 총체적 미적 감각으로 창조한 산물이다. 이런 인류의 유산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억울한 일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p.138)
'일생에 한번은 베토벤을 만나라'에서 안우성 작가는 그의 삶과 음악을 연계하여 설명합니다. 일상 속에서 흘려들었던 많은 효과음과 벨소리들이 베토벤의 음악에서 나온 것임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각 챕터 별로 하나의 곡에 담긴 사연과 악장 설명, 그리고 노래를 들을 수 있는 QR코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클래식 음악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부담없이 읽기 좋은 책입니다.
'일생에 한번은 베토벤을 만나라'에서는 총 25곡에 대해 당시 베토벤의 인생사와 함께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난에 굴복하지 않는 법: 강인한 의지가 느껴지는 곡' 챕터에서는 베토벤이 청력을 잃어가면서 작곡한 '운명'을 쓸 당시에 대한 설명이 쓰여 있습니다. 베토벤은 '운명'을 쓰면서 '나는 운명의 목을 비틀어 움겨쥐겠어. 그렇지 않고선 녀석은 나를 짓밟고야 말테니까'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처럼 당시 베토벤의 편지, 인생사 등을 토대로 설명이 쓰여있어, 클래식에 흥미가 없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베토벤의 삶은 대략 세 시기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초기는 22세에 빈으로 이주해 32세에 유서를 남겼던 시기 사이, 중기는 33세에서 45세 사이에 베토벤이 독창성과 개성을 꽃 피우며 걸작을 쏟아내던 시기, 후기는 45세부터 56세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로 완전히 청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초인적 의지로 작품을 생산했던 시기입니다.
베토벤은 알콜중독자 아버지 요한이 그를 돈벌이로 이용하고자 했기에 매질을 당해야했습니다. 또한 아버지 요한은 베토벤을 '신동'으로 마케팅하기 위해 자주 나이를 속였기에, 베토벤은 자신의 진짜 나이를 40세가 되어서야 알게 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1778년 3월 베토벤은 쾰른에서 첫 연주회를 하기도 했고, 십대에 수준 높은 노래를 쓰기도 했습니다.
22세에 베토벤은 독일을 떠나 오스트리아 빈에 정주하게 됩니다. 독서모임에서 만난 발트슈타인 백작에 의해, 베토벤은 후원도 받고, 하이든 스승 밑에서 음악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기대한 바와 달리, 하이든은 베토벤에게 시간을 많이 내주지는 않았습니다. 이에 베토벤은 살리에리, 알브레히츠베르거 같은 음악가를 직접 찾아다니며 배웠다고 합니다.
25세가 되던 즈음, 베토벤은 명실공히 당대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자리잡아가고, 유럽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공식적인 첫 데뷔 무대에서 '피아노 협주곡 2번 내림나장조, Op.19'를 연주합니다. 이때 피아니스트로서 대중에게 처음 보인 작품이 독주곡이나 실내악곡이 아닌 자신이 직접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을 택한 것은 연주회를 통해 '내가 빈 최고의 작곡가가 되고 말겠다'라고 선포를 한 것이라 해석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악보 출판에는 '피아노 삼중주, Op.1'을 택합니다. 여기서 읽을 수 있는 베토벤의 의도는 '악보의 흥행' 이었습니다. 아마추어 음악가도 악보를 사서 연습할 수 있도록 연주 난이도가 너무 어렵지 않게 구성하여 많은 사람이 악보를 살 수 있도록 의도한 것입니다. 또한, 귀족이 좋아하는 실내악을 선택함으로써 상품적 가치를 높인 것입니다. 그리고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첼리스트 등 최소 3명의 연주자 모두가 악보를 필요로 하도록 삼중주로 구성을 하여, 독주곡 악보의 최소 3배의 구매자를 확보한 것입니다. 이러한 장치를 통해, 베토벤은 '피아노 삼중주, Op.1'의 출판으로 843플로린, 즉 본의 궁정으로부터 받던 연봉의 2배를 벌게 되었으며, 꾸준한 흥행으로 3쇄까지 재쇄를 찍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28세에 난청을 진단받고, 베토벤은 극심한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이에 숲에서 오랜 산책을 하고, 괴테의 문학 등을 읽으며 스스로를 다독이게 됩니다. 여담으로, 나중에 베토벤이 동경하던 괴테를 만나기도 하지만, 곧 '자유로운 영혼'의 베토벤과 '정치, 사회 생활을 배운 예술가'의 괴테는 서로 맞지 않아 교류가 끊어지게 됩니다. 당시 음악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출세이자 가장 안정적인 직장은 '궁정악장'이었으나, 베토벤은 안정적인 삶이나 사회적 지위보단 '자유로운 삶'을 더 중요시했을 정도였기에, 음악가 최초의 프리랜서 예술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최초인 것은 또 있었습니다. 바로 작품 번호입니다. 베토벤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작품 번호를 대개 붙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잔칫상에 같은 음식을 두 번 올리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로, 같은 곡이 여러번 연주되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고용자인 귀족, 교회, 왕의 요청에 따라 그때그때 쓰이고 버려지는 일이 다반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베토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직접 작품에 번호를 매겼습니다.
베토벤은 또한 사랑도 하게 됩니다. 헝가리 귀족 집안의 딸, 요제피네 폰 브룬스비크에게 피아노 과외를 해주던 중 서로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 베토벤이 귀족이었고 요제피네가 평민이었다면 결혼도 할 수 있고 그 사이에서 얻게 되는 자녀도 귀족 신분으로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토벤은 평민이었고, 집안의 반대로, 요제피네는 나이 많은 백작과 결혼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1802년, 32세에 베토벤의 난청은 이전보다 더 악화되었습니다. 이제는 고음부를 들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낙담한 베토벤은 '하일리켄슈타트의 유서'를 남기게 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나는 귀머거리니 더 크게 말해주시오'라고 말할 수 없었다. 아, 남들보다 더 완전해야 할 내 청각이 이렇게 망가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단 말인가. 나를 붙드는 것은 예술, 오직 예술뿐이었다... 나의 예술적인 재능을 모두 드러내기 전에는 '죽음'이 천천히 다가왔으면 좋겠다...죽음이여 올 테면 와 보라. 나는 용감하게 그대를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위기가 기회가 되듯, 이 유서를 기점으로 베토벤은 다시금 창작열을 불태우기 시작합니다. 특히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베토벤의 전기 작가인 로맹 롤랑은 이 시기를 '걸작의 숲'이라고 명명하기도 합니다.
베토벤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남편을 구하기 위해 남장을 하고 나서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로 '피델리오'라는 오페라를 쓰게 됩니다. 또한, 친구이자 후원자인 라주모프스키 백작의 의뢰로 현악 사중주단 '라주모프스키'도 씁니다. 그러나 점차 전쟁으로 화폐가치는 하락하고, 후원자들도 '베토벤은 최고의 예술가'라고 하면서 후원 금액은 줄이게 됩니다.
이에 38세에 베토벤은 승부수를 띄웁니다. 바로 후원자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을 떠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에 오스트리아 프란츠 1세 황제의 막냇동생 루돌프 대공은 계약서 한 장을 지니고 베토벤을 직접 찾아갑니다. 계약서 내용은 마음을 모은 세 귀족이 서로 각출하여 베토벤에게 매년 연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건은 단 하나, '베토벤이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떠나지만 않는다면'이었습니다.
베토벤은 이 루돌프 대공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줍니다. 루돌프 대공은 간질병을 앓고 있어 몸이 약했기에, 그가 건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베토벤은 '고별'이라는 곡을 쓰기도 합니다.
이후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합창'이라는 교향곡을 작곡합니다. 당시 곡은 썼으나, 청력 상실로 지휘는 베토벤 대신 다른 사람과 함께 지휘를 하게 됩니다. 오케스트라 소리는 못 듣지만, 단원들의 연주 모습을 읽어가며 지휘를 했고, 30년 간 작곡한 '합창'을 성공적으로 마칩니다. 박수와 환희로 음악회장이 가득찼지만, 베토벤은 이를 듣지 못해 여전히 악보를 보고 있었고, 이를 알아챈 알토 독창자가 베토벤의 옷깃을 잡아 객석을 향해 몸을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성공적인 삶을 누리는 듯 보였으나, 동생의 죽음 이후, 동생의 아내와 베토벤은 서로 조카 카를의 양육권으로 인해 분쟁을 겪었습니다. 양육권을 손에 넣은 이후에도, 카를은 직업군인이 되겠다 선언하고 베토벤은 결사 반대를 하는 등 갈등이 끊이지 않게 됩니다. 결국 카를이 권총자살을 시도했지만, 천만다행으로 자살 시도가 실패하여 생명에 지장 없게 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충격으로 베토벤의 심신은 급격히 쇠락합니다. 또한,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느냐는 판사의 추궁에 조카 카를이 '삼촌 베토벤 때문'이라 언급을 하며 다시 한번 충격을 주게 됩니다.
이후 베토벤은 더욱 음악 작곡에 몰두하지만, 건강 이상으로 인해 56세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베토벤의 삶은 참 고난의 연속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술은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 때 절정에 달해서 잔인하다'는 윤여정 배우의 말처럼, 베토벤의 고통이 역설적으로 대중에게는 최고의 음악을 선사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는 안타깝지만, 한 음악가로서는 성공적이었던 베토벤의 삶을 음악과 함께 접할 수 있어 '일생에 한번은 베토벤을 만나라'가 더욱 인상깊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