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누군가의 한 걸음이 세상의 한 걸음이 된다 - 달의 뒷면을 걷다
글 입력 2024.11.2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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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만화와 SF 소설 컬래버레이션 시리즈’라는 제목을 보고 떠오른 것은 몇 해 전 읽었던 강경옥 작가님의 <노말시티>였다. 아주 즉흥적으로, 만화방도 아니고 방구석에서, 스마트폰으로 보았던 <노말시티>는 완독한 첫 순정만화였다. 기억하기로는 남성이면서 여성인 인물을 통해 남녀 간의 로맨스가 단순한 연애 이상의 문제로 묘사되었다.순정만화는 그런 힘이 있다. 관계에 집중하는 순정만화의 특성은 ‘나는 누구인가’, ‘사람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특별하게 만든다. 상대방과의 사이에서 나름의 답을 찾아가며 둘의 관계가 깊어지기 때문이다. '왜 하필 나였어야 하는가'에서 '너이기 때문에'로 이어지는 서사에서 자신에 대한 질문은 자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곁의 누군가에까지 확장되곤 한다.그리고 SF에서는 혹은 비일상이 일상이 된 세상을 그릴 수 있다. 당연한 현재의 질서가 무너지기도 하고 예상하지 못한 변화가 당연한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SF에서 등장하는 비인간 존재들은 외계인이나 안드로이드, 로봇, 최근에는 ai의 모습으로 인간에 대해 보다 직접적으로 질문한다.이 두 가지 장르가 결합하면 시너지가 생긴다. 사람 간의 관계에 집중하는 순정만화의 특성은 기술 문명에 대한 상상력이 결합하여 ‘나는 누구인가’, ‘사람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특별하게 만든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사람과 사랑할 수 있을까? 규격에서 벗어나는 존재가 '사람'처럼 살아도 될까? 누군가에게 유일해지고 싶은 이야기에서 이 질문은 절박하게 들린다. 나를 나로 긍정하는 건 오직 당신뿐이라는 답을 찾아지곤 하므로.로맨스에서 으레 이런 질문이 사랑하는 누군가에게서 답을 찾는 것으로 마무리된다면 원작을 재해석 <달의 뒷면을 걷다>에서는 현실적으로 가져오며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 지닌 절박함의 톤을 바꾼다. 사회와 나, 세계와 나의 관점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소개에 따르면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는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삶과 죽음을 반복한 한 '진화하는 영혼'에 관한 이야기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에서 태어나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넓은 세상으로' 나갔고, '세상의 모든 산을 오르고 싶었고, 달의 뒷면을 보고 싶었던' 디오티마라는 이름의 여성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후, 과거의 기억을 간직한 채 계속해서 새로운 삶을 반복하는 '진화하는 영혼'이 된다. 그렇게 2000년의 기억을 담고 다시 태어난 새로운 삶의 이름은 '나머 준', 2092년 '달의 뒷면'이 보이는 거대 함선 우주정거장 '디오티마'의 역장이다.‘나머 준’과 같은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의 주요 인물들은 본작 <달의 뒷면을 걷다>의 말미에서만 등장한다. 본작의 주인공 ‘디오티마 우코’는 원작의 메인 캐릭터가 아니다. 원작의 000의 누나인 디오티마 우코는 <달의 뒷면을 걷다>에서 달에서 태어난 ‘월인’의 인권 문제나 달의 환경 문제를 두고 끊임없이 싸우고 나아가는 인물로 그려진다.원작의 여러 캐릭터를 두고 디오티마 우코라는 여자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는, 작가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원전의 디오티마가 광막한 우주를 바라보던 그 자리에서 디오티마라 불리는 또 다른 여자아이가 우주를 바라보는 이미지를 떠올린 순간, 이 이야기는 반드시 내가 써야 한다고 확신했다."
원작의 디오티마(나머 준으로 되살아나는 영혼)는 '세상의 모든 산을 오르고 싶었고, 달의 뒷면을 보고 싶었던’ 호기심과 탐구심으로 무수한 생을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이에 떠오른 달의 뒷면을 걸으며 달의 뒷면 너머의 우주를 올려다보는 한 소녀의 이미지는 존. H. 서얼이 죽고 나머 준이 원작에서 등장하기 전의 시간을 연결하는 또 다른 디오티마처럼 보인다.이런 인상을 받은 이유는 원작의 디오티마가 가진 여러 속성에서 그가 마치 더 넓은 세상을 알고 싶었던 인간의 호기심이자 호기심으로 이룩한 기술 문명이 의인화된 존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문화와 문명을 통해 속에서 과거의 삶은 되풀이되고 되살아난다. 과거인이 남긴 이야기 다음 세대로 전수하고 전수받으며 기억 속에서 재생된다. 지식과 지혜, 통찰력이라는 이름으로 어쩌면 인간은 세대를 거듭하여 다시 살고 축적된 기억을 힘으로 삼아 ‘진화'하는지도 모른다.끊임없이 우주로, 달로 나가려는 노력 끝에 달에서 인간이 태어나는 세계가 도래했다. 하지만 진화는 여기서 멈출 수 없다. 그토록 꿈꾸던 달에서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나타나기도 하고, 지구와 유사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지구가 아니라 달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월인의 삶은 다양한 사회문제와 소수자성을 내포한다. 디오티마 우코가 운전면허를 따고 대학을 가기 위해 달에 대학을 유치하고자 애쓰는 과정을 보면 아마도 연상되는 뉴스 기사나 사건들이 있을 것 같다. 보호인지 구속인지 알 수 없는 기계적인 제도, 철저히 외부의 시선에서, 근시안적으로 만들어지는 행정 처리부터 질병, 기후, 환경으로 인한 차별적 대우까지 지구 밖에서 그 무엇보다도 현재 지구의 쟁점들을 드러낸다.기술 문명이 발전하여 달에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일들이 있다는 점이 다소 회의적으로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열망만이 진화의 원동력은 아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끝이 정해진 삶에서도 변화는 일어난다.원작의 진화하는 영혼 디오티마가 인류로 이어지는 발걸음을 연상시킨다면, 본작의 디오티마는 유한한 삶에서의 진보를 연상시킨다. 디오티마의 걸음은 그 자체로 디오티마의 삶을 설명한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자기 자신으로 스스로를 긍정한다. 지구인보다 중력에 약하고 달을 벗어날 수 없고 어쩌고저쩌고 지구인의 기준을 걷어차고 월인 디오티마의 삶을 산다.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 의해서 살았던 디오티마의 삶. 누군가는 유별나다고 했을 디오티마 우코의 삶은 세상에서 하나의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노력이었다. 디오티마가 월인의 삶을 바꾸기 위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기에 그의 동생 라테라사가 달 밖으로 밀항하여 원작의 일행에 합류할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노력이 이어져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고, 전혀 상상하지 못한 현실을 만들어낸다. 스스로를 인정한 디오티마로 인해 다른 인간들의 삶이 달라진다.아이작 뉴턴의 유명한 말을 빌려보자면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달의 뒷면에 서 있는 디오티마 우코는 사실 달의 뒷면을 궁금해했던 여러 세대의 디오티마의 어깨 위에서 그 너머를 본다. 그리고 디오티마 우코의 한 걸음이 다음 세대의 누군가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그러면 자연스레 나 역시도 삶에서 되살아나는 디오티마들과 다음 디오티마들을 생각해 본다. 먼저 살았던 이들에게 어떠한 것을 빚지고 있는가, 무엇을 남기게 될 것인가.[이승희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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