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래를 좋아하시나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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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고래는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찬 존재가 됐을까.
매연과 경적을 울리는 자동차들, 그리고 늦도록 번쩍이는 네온사인이 있는 도심에서 나고 자란 탓에 바다내음과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온전히 느껴본 적 없는 나에게도 고래는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일을 시작하고 새로운 사람, 낯선 환경, 서툰 업무에 둘러싸여 지쳐갈 때쯤, SBS에서 했던 ‘고래와 나’ 다큐멘터리가 극장판으로 영화관에서 상영한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했다. 그 상상만 해도 설레는 동물과 얇은 스크린 한 장만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에 퇴근하자마자 고민 없이 집 근처 영화관으로 향했다.
사람이 아니라 거대한 동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왜인지 공허한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불이 꺼지고 나만 남은 듯한 영화관, 서서히 화면이 밝아지고 웅장한 크기의 고래가 눈앞까지 헤엄쳐왔다. 고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그래서 영화 초반엔 내레이션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장엄한 고래의 헤엄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영화엔 여러 종류의 고래가 등장한다. 수컷 간 치열한 경쟁 끝에 한 쌍이 된 혹등고래 커플과 새끼를 공동 육아하던 향고래 가족, 쉴 새 없이 수다를 떤 벨루가 무리까지. ‘고래목’이라는 동일한 집단으로 분류되지만, 생김새와 성격, 특징이 모두 다른 고래들의 삶을 영화는 풍부하게 그려냈다.
고래가 사랑의 춤을 추는 장면과 새끼 고래가 어미 고래의 젖을 먹는 장면, 사람에게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하고 다가오는 장면 등 귀중한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섬세히 담아내며 넓은 바다 깊은 곳까지 관객을 끌어당긴다.
그렇게 낭만이 지속될 것 같았지만, 후반부에 도달하면 영화는 관객에게 현실을 일깨운다. 그동안 고래를 ‘상상 속 동물’처럼 대상화해 온 내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잔인하고 아름답지 않은 ‘진짜 모습’을 들이밀며. 2023년 3월, 서해안에서 태어난 지 1년 남짓한 흔적을 가진 새끼 보리고래가 죽은 채로 발견됐다.
일반적으로 보리고래는 수심이 깊은 바다에서 살기 때문에 20년간 국내에서 목격된 적이 없었는데, 수심이 얕은 서해안에서 사체로 발견돼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소에서 부검을 진행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부검 중 플라스틱 컵 뚜껑이 고래의 내장에서 나와 질병이나 부상과 같은 자연적 요인이 아닌 외부적 요인(인간의 환경오염)이 사인일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참혹한 현실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북극곰이 기후위기로 인한 환경의 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벨루가를 사냥하는 장면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원래라면 빙산 위를 뛰어다니고 바다표범을 잡아먹는 북극곰이, 높아진 기온으로 꽃이 핀 풀밭에서 뒹굴다가 바다에 뛰어들어 조그만 바위에 몸을 의지하며 벨루가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기후위기가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을 넘어, 이제 카메라 렌즈로 선명하게 담을 수 있는 것들까지.
버석버석한 해변가 모래로 떠밀려 온 거대한 새끼 보리고래, 해수면이 높게 차올라 겨우 발만 디딜 수 있는 작은 바위 위에서 외로이 사냥감을 노리던 북극곰, 원양어선의 혼획(본래 목적이 아닌 종이 섞여 잡히게 되는 것)으로 몇 시간동안 공중 그물에 매달려 비명을 지르다 죽어갔던 고래 한 쌍… 이 생명체들이 경험하는 비극에 인간이, ‘내가’ 오버랩 됐다.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멀지 않은 미래,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벌어질 일일테니.
지난해 전 세계 온실가스 평균 농도가 또다시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고 한다. 고래에 관한 낭만과 환상을 품고 영화를 찾았던 난, 무거운 발걸음으로 반성하며 극장을 나섰다. 정말 고래를 좋아한다면, 아름답게 포장해 둔 미디어 속 고래가 아닌 매년 혼획으로 죽는 30만 마리의 고래를, 인간이 버린 쓰레기를 삼켜 죽은 고래를 오롯이 마주해야만 한다.
[이예리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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