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진리만이 영원히 참일 수 있는 명제가 아닐까. 무언가를 보존하기 위해 존재하는 박물관은 있는 그대로와 변하지 않는 소중한 가치를 보여주는 매력적인 공간이란 생각이 든다. 호밀밭의 파수꾼 주인공 홀든은 박물관이 좋은 이유에 대해 전시품들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가운데서도 박물관은 고고하게 보존의 가치를 내세운다. 박물관은 언제부터 우리 곁에 있었을까?
도서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역사 속 지나가는 시간을 붙잪고 싶은 마음에서 과거를 있는 그대로 간직하는 '보존'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과학에서 소설이 탄생하다' 부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조지 엘리엇의 소설, <미들마치>로 역사가 어떻게 인식되어 기록되었는지 설명한다. 영문학의 거장 엘리엇이 이 책에서만큼은 역사학자가 된다.
<미들마치>에는 역사 학자 에드워드 커소본과 결혼한 도로시아 브룩이 등장한다. 에드워드 커스본은 과거에 푹 빠져 모든 신화의 열쇠를 찾으려는 괴짜 같은 인물이다. 커스본의 제자였던 도로시아 브룩은 그의 학문적인 애정에 매료되어 결혼했지만 신혼 여행을 하며 자신이 그를 보며 품었던 기대와 상상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인물들에서부터 역사를 보는 시각이 담겨있다. 엘리엇은 역사 소설 <미들마치>를 통해 그녀가 갖고 있던 역사관을 드러냈고, 커소본이라는 인물을 비판하고자 했다.
엘리엇의 역사관은 당시의 진보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진보하는 역사의 관점에서 역사는 정치적 발전이든, 기술적 발전이든, 물질적 발전이든, 스스로 계속 발전하고 있으며 되돌릴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은 시대의 격변기라는 궤도 속에서 발전을 이해한 것이다. 조지 엘리엇이 활동한 19세기 영국은 산업화로 인한 격변기였다. 과거는 축소되고 쇠퇴했다. 진보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의 양적, 질적 의미를 생각해 보게 했다. 물리적으로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고 느껴짐과 동시에 사람들의 사고관과 감정도 바뀌기 시작해서다. 앞으로 나아감은 건물이 파괴되고 새로 구성되는 것을 넘어서 현재와 과거가 더 멀어짐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책은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역사적인 산물을 오롯이 보존하려는 박물관이 전면에 나오게 되었다. 과거로의 회귀가 이루어지는 박물관이 잠시나마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게 주는 타임캡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과거를 기억하고 재구성하려는 역사의 방법론적인 고민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부터 과거 경험의 본질을 밝히는 것으로 역사가 이해되기 시작하며 역사 과학이 받아들여졌다. 과거를 다루는 과학의 관점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과거를 존중했기에 폐허여도 그 자체로 두고 배우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조지 엘리엇은 이러한 새로운 과학에 틔어 있었다. 엘리엇은 진보라는 관점을 받아들였을 뿐만 <미들마치>를 기술하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특히 과거는 과거로서 연구해야 한다는 헤겔의 새로운 접근 방식에 영향을 받아 모든 신화의 열쇠를 찾기만 하려는 소설 속 인물 '커소본' 을 조롱하고자 했다. 신화 역시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한 것이기에 이를 역동적인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19세기는 역사 소설이 유행하여 엘리엇 또한 본격적으로 역사 소설 작가로서 활동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그녀는 이야기의 영향력을 빌려 역사적 변화를 이끄는 힘을 설명하려 했다. 역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소설이라는 형식을 선택했다. 다른 작가들이 만연하게 역사적인 연구와 사고를 소설에 옮겨 적은 것과 달리 그녀는 역사를 위한 소설을 집필하고자 했다. 그만큼 세심하게 역사를 소설에 도입했다. 역사를 만드는 사람의 역할을 높이 샀고, 직접 도서관과 기록 보관소에서 자료를 찾으며 깊이 있게 역사를 파헤치며 소설을 집필했다.
이렇게 탄생한 <미들마치>는 사회, 정치적 진보에 관한 소설로 분류된다. 소설의 배경은 인구의 약 2.6%만 투표할 수 있는 제도를 바꾸기 위해 1차 선거법 개정안의 논의가 활발했던 1862년이다. 당시 선거 법 개정으로 소작농을 포함한 다양한 신분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며 적격 유권자 수가 40만 명에서 65만 명으로 늘어났다. 책은 이 외에도 다양한 부분에서 진보적인 관점이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미들마치>는 '역사 대한 소설'이 아닌 '역사를 위한 소설'이었다. 작가는 <미들마치>에서 역동적인 과정 속의 역사를 보여주고자 했다.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을 제안함으로써 소설 자체가 박물관의 역할을 한다. 소설이라는 매개체로 역사에 대한 인식을 전하면서 역사의 역동적인 힘에 대한 인식이 더 많은 대중에게 닿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빠른 변화를 겪으며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소중해졌다. 인간의 메모리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을 선별해서 기억할 수밖에 없다. 산업혁명의 19세기부터 빠르게 변화하는 것에 대한 경각심으로 인해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 이루어졌다. 이 사실은 현재의 우리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현대 사회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전 속도엔 가속도만 붙는 것 같다. 지금 사회는 더 빨리 변하고 있고 제도와 법은 기술의 속도를 따라가고 있지 못 하고 있다. 개인의 맥락에서 보아도 하루하루 기억하는 일이 더욱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 SNS를 '기록'의 용도로 활용하는 것이 그 예이다. 놓치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자 미련이다. 우리가 취해야 할 기억의 방식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과거는 과거의 흐름 속에서 기억해야 한다는 진보주의 역사의 관점에서 현대인에겐 자신만의 박물관, 기억 저장소가 필요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