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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우리에게는 이런 상상력이 필요하다 [영화]

by 강민지 에디터
2024.10.20 16:54

 

 

<오징어 게임>, <머니게임>, <배틀 로얄>과 같은 장르물을 좋아하지 않는다.세 작품의 공통점이라면 모두 인간을 극단적인 상황에 가둬 두고 관객으로 하여금 인간의 본성을 회의하게 만든다는 것. 이 작품들은 오직 살기 위해서 인간 이하의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조명하며, 이것이 인간이고,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타적인 행동은 사치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듯한 시선을 견지한다. 마치 이렇게 묻는 것 같다. "네가 이 상황에 던져진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겠어?". 나는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쉽게 납득할 수 없었으며, 이것이 정말로 최선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영화에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나라면 다른 선택을 했을 거라는 자신이 없었다. 목숨과 같은 가치는 모두를 절박하게 만드니까.

 

나는 인간이 최악의 상황에서 최악의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는 주장에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창작자가 인간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것은 안일한 선택이라고도 생각한다. 선을 상상하는 일은 악을 상상하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다. 선을 조명하는 것은 창작자의 확고한 윤리관과 관객의 시선 사이에서 아슬한 줄타기를 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주인공의 선택을 관객이 납득하는 동시에 끝까지 그의 윤리를 지켜야 한다. 둘 중 하나라도 실패할 때 영화는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선을 상상하는 일이란 불확실한 먼 곳으로 가는 좁은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일일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나는 인간이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인간이 어디까지 존엄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믿는다. 뉴스를 틀면 사건사고 뉴스를 들으면 알 수 있듯이, 악은 늘 산재해 있고 눈닿는 거리에 있으니. 시몬 베유는 악은 진부하고 선은 복잡하다고 말했지만, 전형적인 악 앞에서 우리의 선에 대한 상상력은 빈곤하기만 하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영화가 있다면 선의 복잡성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2002년작 <아들>은 다르덴 형제가 그것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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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주인공 올리비에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다섯 살 아들이 있다. 아니, 있었다. 어느 날 그의 아들이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이유도 없이 잔인하게 목이 졸린 상태로. 그때부터 올리비에는 일하던 목공소를 그만두고 소년범이 출소 후 직업교육을 받는 학교에서 목공 일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의 아들을 죽인 범인이 소년범이었기 때문에, 언젠가 범인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동안 아들이 죽은 후 점점 사이가 멀어진 아내는 다른 남자를 만났고, 그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단조로운 일상이 반복되는 채로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영화는 이 시점에서 시작된다). 범인이 출소하는 해가 되었고, 아들을 죽인 범인은 그가 일하는 학교에 들어온다. 이제 그의 아들을 죽인 소년이 올리비에 앞에 서서, 그가 희생자의 아버지인 것을 모르는 채로, 목공 수업을 듣고 싶다고 말한다. 이제 주인공는 어떻게 할 것인가. 범인을 똑같이 죽이고 감옥에 갈 것인가, 뺨이라도 때릴 것인가, 아들의 죽음을 따져 물을 것인가, 아니면 그를 외면할 것인가. 당신이라면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수많은 그럴듯한 선택지를 뒤로하고 올리비에는 뜻밖의 선택을 한다. 아들을 죽인 소년에게 목공을 가르치는 것. 흉기가 도구로 쓰이는 목공소에서 올리비에의 손을주시하는 카메라는 계속하여 관객에게 서스펜스를 유도한다. 올리비에가 소년을 해하지는 않을지, 언제 그에게 자신이 그가 죽인 아이의 아버지라고 말할지, 그것을 알게 된 소년이 되려 올리비에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않을지. 하지만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 어쩌면 이 지점에서 이 영화가 올리비에가 소년을 용서하는, 인류애를 말하는 진부한 영화라고 예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누군가를 더 자세히 아는 길이기에. 물론 올리비에는 소년범을 가르치면서 그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아가지만, 소년범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용서받을 만한 인간'이 아니다. 첫째. 그는 살인을 저질렀다. 둘째, 그의 죄의식은 희박하다. 어떤 범죄로 소년원에 들어갔느냐고 물어보는 올리비에 앞에서 소년은 별다른 죄책감을 내비치지 않는다. 영화 내내 그의 이러한 자질은 바뀌지 않는다. 결말에서 주인공이 자신이 희생자의 아버지임을 밝힐 때도 소년은 빠르게 도망치는 길을 택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말한다. 너를 해하지 않겠다고. 주인공이 돌아온 소년과 함께 목재를 운반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몰락의 에티카>에서 몰락한 자들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나는 늘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라고. <아들>의 주인공은 몰락하는 자들 중 하나다. 그가 이미 몰락한 상태에서 영화가 시작되고 영화 내내 그는 꾸준히 몰락한다. 영화가 결말에 다다를 때까지 그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며 상황도 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혼자이며, 곁의 누구도 주인공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는 앞으로도 아들의 살인범을 볼 때마다 아들 생각을 멈출 수 없을 것이며, 살해된 아들은 어떻게 해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남은 것은 주위의 수군거림, 그리고 전 아내의 경멸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소년범이 자신의 행동을 통해 교화되었다는 도덕적 고양감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범인이 교화되었다고 믿을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의 죄의식은 희박하며, 그가 다시 범죄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 모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소년범과 동행하기로 결정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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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에게 중요한 것은, 저희가 촬영하는 인물들이 속을 알 수 없는 불투명한 존재여야 하고, 살아 있는 실체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라는 다르덴 형제의 말을 보여주듯, 한국판 포스터와 다르게 영화의 프랑스판 포스터에서 범인을 바라보는 주인공은 초점에서 벗어나 흐리게 보인다. 사실 영화 내내 그렇다. 주인공의 불투명한 안경을 낀 것처럼 관객은 주인공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다. 말수가 적은 주인공은 자신의 심정이 어떠한지 말하지 않으며, 영화 앞에서 관객은 그저 칼을 잡는 주인공의 손의 떨림, 눈동자의 움직임 같은 것으로만 그의 심리를 짐작할 뿐이다. 굳이 말해야 한다면, 그가 소년범을 한 인간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소년이 저지른 일의 추악함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 소년의 처지를 연민할 수 있기 때문에. 잘은 몰라도, 소년을 단죄하는 것보다는 주인공의 행동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그 행위는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자 이해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다. 하지만 이 문장은 주인공의 행동에 대한 설명이 완벽한 설명이 될 수 없고, 2002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가 지금도 유효하다면 아마 우리에게 늘 있는 질문, 선한 행동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물음에 다르덴 형제 특유의 모호함으로 답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그 모호함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답의 전부일 것이기 때문에. 선은 늘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하니까.

 

다시 시몬 베유의 말로 돌아와서. 시몬 베유는 카톨릭 용어를 빌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힘이 있다고 말한다. 중력과 은총이 그것이다. 복잡하지만 짧게 쓰자면 중력은 인간의 관성을 따르는 힘, 그리고 은총은 그것을 이겨내는 일이다. 중력의 힘을 따르는 것은 쉬운 반면 은총을 따르는 일은 어렵다. 타인을 돕기 위해 한 시간 동안 서 있는 것은 어렵지만, 식당 웨이팅을 위해서 한 시간 동안 서 있는 것은 쉽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중력을 이겨낸다고 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공허한 자리가 생긴다면 모를까. 여기까지만 읽으면 회의감이 들지만, 시몬 베유는 이렇게도 말한다. 


"인간은 아주 짧은 섬광 같은 순간에만 세상의 법칙들을 벗어날 수 있다. (...) 도덕적 빈자리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런 순간에 인간은 초자연에 이를 수 있다."라고. 


그런 짧은 섬광 같은 순간들이 있다. 나는 영화의 끝에서 그것을 보았다고 믿는다. 다르덴 형제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낸다. 여기에 인간의 참혹한 아름다움이, 인간의 본성에 맞서는 어떤 존엄함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견뎌야 한다. 우리 안의 악한 본성을.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가상의 낙원보다 살아 있는 지옥"에서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이런 선택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상황이 최악일지라도, 우리에게는 항상 남아 있는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그것이 가장 힘든 선택이라고 해도,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 내가 몰락하게 만들더라도, 거기에 존엄과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그 덕분에 나는 아주 조금 덜 편협한 인간이 되었다고, 그것 때문에 나는 내내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 우리는 언젠가 죽을 것이고 특별한 사람이 아닌 나는 세상에 어떤 족적도 남기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인간의 삶에 의미가 있다면 그런 순간들에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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