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루즈 로트렉은 프랑스 몽마르트에서 작업하던 화가로 공연을 홍보하는 포스터를 판화로 남겼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작업은 물랑루즈 공연의 홍보 포스터이다. 판화를 통해 그가 남긴 포스터 작업은 현재에는 그래픽 아트로 대체된 것들이다. 판화라는 기법에 로트렉만의 손맛과 재치가 더해져 제작된 포스터들을 통해 당시 프랑스 예술적 부흥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몽마르트에서 볼 수 있었던 예술의 향연이 펼쳐진다. 광고 효과를 논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 작품이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선들
연극 속 등장인물들만 춤을 추고 있지 않다. 그가 남긴 그림들의 선들마저 춤추듯이 움직이는 것 같다. 어떤 인물의 윤곽선도 두께가 일정하지 않다. 직선도 찾아보기 어렵다. 똑같이 작품을 찍어내는 판화 작품임에도 규칙과 배열이 주는 미학보다는 역동적인 선들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인물의 눈동자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지 않아서 그림을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란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림 속 인물들은 예술 활동에 전념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툴루즈는 자신의 춤에, 노래에, 연기에 몰입한 인물이 있는 무대를 판화에 옮겨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를 사실적으로 그려내지 않았기에 재미난 요소들도 있다. 덕분에 그가 홍보하려는 연극과 주인공들의 움직임이 더욱 두드러진다. 정적인 그림에 동적인 생기가 느껴진다. 여기엔 절묘한 배치도 한몫한다. 혹자는 대충 그린 그림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물들의 배치와 강조된 부분들이 어느 하나 그가 무신경하게 남긴 것이 없음을 증명한다.
예술가의 시선으로, 휴머니즘 프레임
이번 전시의 특별함은 인본주의적 관점에 있다.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빈도에 있어서만 뿐만 아니라 화폭에 사람을 담는 방식 또한 경제적인 논리가 아닌 사람이 사람을 보는 방식으로 그렸다. 개성 있는 사람이 가진 특색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서커스 장면과 그의 뮤즈를 그린 그림들을 통해 그가 문화생활을 사랑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가 그림 맛 나게 포착한 공연 예술의 장면들은 그의 애정 어린 시선 끝에서 탄생한 것이다. 로트렉은 그림을 남기는 예술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예술을 탐닉하는 애호가였다. 이는 <카페 콩세르> 에서 로트렉이 예술가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남긴 작품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예술가이기 전에 한 개인으로써 예술가를 바라보는 것과 예술가가 남긴 작품을 통해 이해해 보려는 마음의 틀은 다르다. 툴루즈의 그림엔 관람객의 눈과 귀를 통해 감상한 관점과 더불어 예술가로서 인간을 이해한 관점 두 가지가 모두 담겨 있다. 툴로즈는 예술가들의 옆에서 관람객인 채로, 때론 예술가인 채로 직접 예술하는 사람들을 그림에 담았다. 그가 상업적인 목적에서 홍보하기 위한 작품을 남겼음에도 '휴머니즘' 프레임으로 그를 이해해볼 수 있는 이유이다.
인간을 광고하다
무엇을 알려야 할까? 무엇을 강조해야 할까? 으레 ‘광고와 마케팅’ 일을 떠올릴 때 마주할 수밖에 없는 관문이다. 이에 툴루즈 로트렉은 예술적으로 응답한다. 여기서 ‘예술적’은 그림의 언어로 알리고 싶은 것을 알리다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거 같다.
크로핑 기법이 일례이다. 크로핑(Cropping)은 특정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구성에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는 기법이다.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기보다 그가 강조하고 싶은 인물과 대상을 크로핑 기법을 통해 부각했다. 춤을 추는 무용수, 연기하는 배우들, 노래하는 가수들, 모든 것을 동시에 하는 뮤지컬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조화롭게 빛날 수 있게 하는 것은 조명이다. 조명은 무대 위 모두가 빛나고 있으면 좋지만 필요한 내용을 조화롭게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한 역할을 한다. 울림을 주는 내용을 곳곳에 있는 관객에게 닿을 수 있도록 무엇을 비추고 강조할지를 결정하는 것이 조명이라면 그림이 된 공연에선 크로핑 기법이 조명의 역할을 대신한다.
프랑스 아르누보 포스터, 포스터 미술의 새로운 지평
4부에선 로트렉과 같은 시기에 활동한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여기엔 상업 예술의 천재 ‘알폰소 무하’도 포함되어 있다. 말로만 듣던 그림을 예상외로 접해 그 기쁨은 배가 되었다. 알폰소 무하에게 상업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라는 수식어는 부족할 정도이다. 전시는 ‘특유의 장식성’ 으로 알폰소 무하를 묘사했다. 내가 느낀 특유는 화려한 듯 정제된 규칙이 있고, 신비로운 듯 어딘가 익숙한 화풍에 있었다. 타로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강렬한 색채로 로트렉 보다 앞서서 석판화 포스터로 주목을 받은 ‘쥘 세레’, ‘테오필- 알렉상드르 슈타인렌’의 작품들은 모두 벨 에포크 시대를 수놓은 석판화이다. 같은 시기를 보낸 화가들의 작품으로 또 다른 느낌으로 벨 에포크 시기를 바라볼 수 있다.
언론 자유와 같은 경계를 공유한 문학 예술의 영역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1881년 프랑스에서 언론의 자유에 관한 법안이 통과되면서 출판 규제가 완화되었다. 이는 새로운 예술적 실험을 가능하게 하였고. 덕분에 다양한 형식의 작품들이 활개를 칠 수 있었다. 이렇게 ‘출판’이란 단어에 한정할 수 없는 새로운 미술 작품, 포스터 미술이 등장했다. 규제 완화가 창의성을 견인한 것이다. 지금 우리의 시대적 고민과도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한 인물과 작품을 생각해 보는 데 당시의 ‘분위기’를 읽어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과정이다. 보헤미안, 아방가르드, 벨 에포크 시대, 자포니즘 등 그를 감쌀 수 있는 여러 수식어가 있다. 미술관의 한쪽엔 시대적 흐름과 미술 용어에 대한 설명이 마련되어 있다. 박물관을 방문한 듯 미술 읽어내기도 가능하다.
툴루즈 로트렉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
상업미술은 분명한 목적이 있는 작품들이다. 특정한 반응을 유도하기 위한 그림이 진정한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예술 작품은 어떠한 목적도 담으면 안 된다며 목적이 있는 그림은 예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할 여러 화가가 봉기를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로트렉은 '현대 판화의 태동 속 석판화 광고 포스터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려 고급 미술과 저급 미술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평가를 받는 화가이다. 무언가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예술과 무위함의 최고 경지에 있는 예술의 양극을 어쩌면 조화시킨 화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전시를 나오며 저렴함에서 오는 로맨스라는 나만의 주제가 뇌리에 박혔다. 대중성이 견인되면서 예술과 사람들의 거리가 가까워질 수 있지 않았을까? 또 그가 홍보하려고 했던 작품들이 거리로 나오면서 조금 더 쉽게 낭만의 바람이 곳곳에 닿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보게 된다.
설명 중엔 거리 포스터에 대해 ‘덧없는 순간의 예술’이라 표현한 부분이 있다. 그만큼 수시로 바뀌는 포스터의 수명을 비유한 것이다. 한번 만들어진 작품이 영원한 예술적 가치를 가질 수 있지만, 포스터는 잠깐의 반짝임을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은 현대인들이 발걸음하게 만든다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일까. 궁금하다면 전시로 발걸음을 하도록. 예술과 예술이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선 가르기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줄 평이 되지 못한 두세 줄 평 - 상업과 예술의 조화로움. 자유와 만난 대중성. 판화가 광고가 되던 시절, 툴루즈-로트렉이 보여주는 프랑스의 예술 부흥기를 느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