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재즈’하게 살아가는 법 – 데블스도어 재즈 페스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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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것과 살아있다고 느끼는 것은 다르다. 할 일에 치여서 매일매일 똑같은 하루를 보내다 보면 달라진 것 하나 없이 지나가 버린 시간에 당황스럽기만 하다. 올해도 벌써 9월이 되었다. 내 생각엔 9월이 제일 당황스럽고 황당한 달인 것 같다. 8월까지는 간신히 부정할 수 있지만 9월부터는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하반기가 닥친 기분이다(사실 하반기는 진작에 닥쳤다).
작년 9월에도, 재작년 9월에도 나는 시간의 흐름에 당황했었다. 여기서 말하는 당황은 ‘한 것도 없이 벌써 9월이라니’와 같은 한탄이 아니다. 정말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서 실감이 안 날 뿐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시간이 흐르는 게 무섭지 않아졌다. 뚜렷한 성과가 없어도 힘겨운 하루하루 살아남은 것만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거창한 목표를 이루진 못했지만, 매 순간 나는 최대한 즐기며 살아왔다.
올해도 나는 치열하게 즐거워하고, 외로워하고, 불안해하고, 서러워하고, 행복해하며 시간을 보냈다. 9월 8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하반기에 접어든 그날 데블스도어에서 ‘오늘도 즐겁게 살아있는 날이구나’ 느꼈다.
데블스도어 재즈페스타는 올해로 3년째를 맞이하는 실내형 재즈 페스티벌이다. 강남에 위치한 대형 복합문화공간인 ‘데블스도어’ 센트럴시티점에서 진행되는 페스티벌로, 감미로운 재즈 선율과 함께 맛있는 음식과 와인도 음미할 수 있다.
올해 재즈 페스타에서는 총 9팀, 30명의 아티스트가 출연했는데, 내가 페스티벌을 찾은 9월 8일에는 유키 후타미 트리오, 준 스미스 쿼텟, 데블스도어 퀸텟, 댄 니머 트리오의 공연을 볼 수 있었다.
공연이 3시에 시작된다는 정보를 염두에 두고 시간에 맞춰 자리에 도착했다. ‘실내형 재즈 페스티벌’이라는 정보만 알고 있어서 기존 실내 공연장과 비슷할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하니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 펼쳐져 신기했다. 음식을 먹으면서 라이브 공연을 보는 모습은 서양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본 모습이었는데, 그 로망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처음엔 유키 후타미 트리오가 연주가 펼쳐졌다. 어떻게 공연을 즐겨야 할지 몰라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공연을 보다가 자유로운 분위기에 가방에서 아직 시작하지 못한 책을 꺼내 읽어보았다. 책 읽을 때 재즈 음악을 듣는다는 지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사에 신경 쓰는 편이라서 책 읽을 땐 가사 있는 음악 대신 클래식을 듣는 편인데, 가끔 너무 선율이 날카롭거나 화려한 음악을 들으면 그것대로 몰입이 깨지곤 했다. 그러나 그날 들었던 재즈 음악은 아무리 신나도 듣기 편안한 정도를 절대 넘지 않았다. 완전히 몰입해도 지루하지 않고, 편하게 책을 읽어도 집중이 깨지지 않는 연주였다.
한 시간 정도 쉬는 시간을 가진 뒤 다음 준 스미스 쿼텟 공연은 더욱 편한 마음으로 볼 수 있었다. 아예 뒤에 서서 연주자들을 더 자세히 지켜보다가 중간에 합류한 일행과 함께 피자를 주문했다. 대부분 식당에 배경음악이 있지만, 바로 옆에서 최고의 연주자가 들려주는 재즈 음악을 들으면서 음식을 먹다니 꿈만 같았다.
그 다음 쉬는 시간엔 다른 음식을 먹으며 편하게 대화를 나눴고, 이어지는 데블스도어 퀸텟과 댄 니머 트리오 공연에선 연주에 몰입하다가 책을 읽고를 반복했다. 덕분에 그날 하루 만에 책 한 권을 거의 다 읽을 수 있었다.
나에게 극장은 카페 다음으로 친숙한 공간이다. OTT 서비스보다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 수가 훨씬 많고, 연극과 뮤지컬 관람은 이제 내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취미 생활이다. 편하게 예술을 관람하려면 집에서 보는 걸 택해야 한다. 난 집보다 훨씬 몰입하기 좋은 환경을 택했고, 그 대가로 다른 사람들도 몰입할 수 있도록 최대한 조심하는 게 예의다.
나도 다른 사람 때문에 몰입이 깨져서 불쾌한 경험이 여러 번 있었으므로 이러한 관람 문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뮤지컬을 보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철저히 ‘관람’만 해야 하는 한국 극장과 다르게 전용 극장에서 판매하는 음료를 마시며 자유롭게 공연을 즐기는 분위기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오히려 터놓고 자유롭게 즐기는 분위기가 조성되니 소음 하나하나에 전보다 둔감해졌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줄지도 모른다는 긴장을 내려놓고 편하게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페스티벌은 자유가 허용되는 공연장이다. 탁 트이고 넓은 곳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행동해도 된다. 실내형이라면 기존 실내 극장과 같지 않을까 싶었는데, 데블스도어 자체가 공연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어서 여느 페스티벌과 같이 음식도 먹고, 대화도 나누고, 책도 읽으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페스티벌의 마지막 날이 무르익어갈 즈음 영화 <소울>이 떠올랐다. ‘삶의 매 순간이 아름다움이고 열정’이라는 영화의 메시지에 깊이 감동받았었는데, 생각해 보니 재즈 뮤지션을 꿈꾸는 ‘조’가 주인공이었다.
<소울>에선 ‘Jazzy’라는 영어 신조어가 나온다. 직역하면 ‘재즈하게’인 이 단어는 주인공의 직업과 맞춘 말장난에 불과하지만, 그날 데블스도어에서 감미로운 재즈 선율을 잔뜩 만끽하고 나니 그 의미를 알 것 같다. ‘재즈하다’는 건 여유를 가지고 삶을 즐기는 태도를 의미한다.
긴 시간 재즈의 여유로움에 흠뻑 젖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재즈한 하루를 보내서일까,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밤공기가 싫지 않았다.
[진금미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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