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한창이던 8월의 마지막 주, 가깝게 지내던 유학생 친구들과 남프랑스 로드트립을 다녀왔다.
제안부터 기획, 진행 총괄까지 여행의 주축은 전부 내 담당. 계획 짜기 쯤은 식은 죽 먹기인 나에게 이러한 역할 분담은 곧, "니 마음대로 해라!". 즉, 전권을 위임 받은 축복이나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만든 일정은 베르동 협곡(Gorges du Verdon) - 칸(Cannes) - 멍통(Menton)으로 해안가를 따라 쭉 이동하는 코스.
마지막 행선지인 멍통으로 넘어가는 날, 즉흥적으로 '안티베'라는 작은 마을에 들렀다.
구름 많은 흐린 날이어서인지, 바닥난 체력 때문인지, 아니면 여행지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인지 딱히 새로움을 느끼진 못했다. '요새도시'라 불리우는 안티베의 옛 성곽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피카소미술관이 나왔다.
미술관에 대한 궁금증에 앞서 미술관 앞 요새 벽면에 붙은 조각상에 더 관심이 쏠렸다.
단단한 청동 조각은 아무리 봐도 피카소의 것이 아니었기에 의문을 가지고 길의 끝까지 걸으니, 탁 트인 바다를 낀 해안 산책로("예술 산책로")에 비슷한 이미지의 조각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바로 네덜란드 출신의 예술가 니콜라스 라바렌(Nicholas Lavarenne)의 조각 시리즈 《Defi》.
라바렌과 안티베의 인연은 1998년 열린 단체전 〈열린 하늘에서(A Ciel Ouvert)〉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많은 사랑을 받은 라바렌은 이듬해 안티베에서 또 한 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2023년 예술 산책로에 작품 설치를 허가 받았다. 그리고 올해 8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되는 〈천상의 몸짓(Geste Celeste)〉전에서 디자인부터 청동 제작까지 자신의 작품세계를 한데 모아 선보인다.
라바렌의 작품은 항구마을 안티베와 조화롭게 어우러져 안티베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초입까지만 해도 특별할 것 없던 작은 도시가 이 길 덕분에 예술이 깃든 도시로 바뀌었다.
피카소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사랑한 마을이라는 명성에 걸맞는 광경이었다.
사실 나에게 라바렌은, 처음 들어보는 작가이자 인터넷 검색으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없는 '미지의 작가'다. 여러 가지로 미루어볼 때 도시를 상징할 만큼 유명한 작가는 아니라는 게 나의 추측이다.
그럼에도 안티베는 과감히 그의 작품들을 관광 포인트에 두어 시선을 끌고 도시의 상징으로 삼았다.
예술을 애호하는 사람으로서 이 점에 높은 가치를 두고 싶다.
한국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안양공공미술프로젝트, 홍제천공공미술프로젝트 등)와 공공미술 조례의 실패 및 오남용 사례들이 떠오른다.
한국의 정책들은 공공미술을 삶에 녹여내려는 목적을 부자연스럽게 풀어내어 대중의 반감을 산 데 비해, 프랑스는(적어도 안티베는) 공공미술의 핵심 요소인 장소특정성을 적극 활용해 분위기를 압도하는 적절한 작품으로 관람객의 시선을 뺏고 도시 이미지 형성에 성공했다.
덕분에 나에게 안티베에서의 짧은 시간은 예술 산책로에서 도심까지 이어진 라바렌의 작품을 따라 걷는 순간으로 상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