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총천연색 모순과 멸시와 고통의 집합체, 사랑 - 사랑과 결함

글 입력 2024.09.10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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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성장하고 삶을 꾸리게 될 때,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것이 상실의 아픔이다. 소중한 물건을 잃기도 하고, 소중한 사람을 잃기도 하고, 소중한 마음이나 가치관을 잃기도 한다. 그것이 필요에 의한 상실이든, 예기치 못하게 박탈당한 것이든, 우리는 성장하며 상실을 겪고, 그 상처를 바탕으로 한 걸음씩 더 발전한다. 어쨌거나 사랑의 상실은 삶에 꼭 수반되는 것이다.

나무에 나이테가 새겨지듯, 상처는 우리 삶에 흔적을 남겨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주름으로 녹아든다. 우리 삶에 결함이 새겨지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결함 있는 존재가 결함 있는 말과 감정을 내뱉고, 결함투성이의 사랑과 상실과 고통을 경험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우리가 미숙하던 시절 생채기를 내던 불완전한 부분이 내 삶과 사랑에는 녹아있는 것이다.

<사랑과 결함>은 이처럼 내 삶에 녹아있는 결함의 흉터를 다시금 되새긴다. 마음에 남은 흉터는 더 이상 끔찍하지만은 않지만, 여전히 단단히 주름으로 남아있다. 이제는 만져도 아프지 않지만, 그 주름을 다시 만진다면 선명한 감각이 느껴질 것이다. 다시금 만지면 분명하고 선명하게 떠오르는 나의 주름을 쓰다듬는 책, 그래서 그때의 감정이 다시 총천연색으로 튀어 오르는 책, <사랑과 결함>이다.
 
 
 
미숙함은 철들지 않는다

 

<아주 사소한 시절>-<우리는 계절마다>-<그 얼굴을 마주하고>로 이어지는 단편 3부작은 나를 몹시 괴롭게 했다. 어렸을 적 으레 느꼈을 모멸감과 수치심, 공포감과 중압감, 외로움과 괴로움이 너무나 선명한 색깔로 소설에 덧칠되어 있었다. 나에게 해로운 집단을 끊어내지는 못할망정 거기에 속하고자 하는, 무작정 외면할 수 없는 그 시절의 어리석음과 생존 본능. 그리고 피어나는 미묘한 우정과 사랑 사이의 감정. 핍진한 복잡함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그 두 본능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것이 비단 학창 시절에만 국한되는 것인가? 투명하게 영악했던 유년 시절에 더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되기도 하고, 체면치레하며 은둔하는 이 시절에 더 미숙하고 유아적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사랑 앞에서, 삶 앞에서 미숙해지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미숙함은 철들지 않는다.
 
 
나를 돌보려면 나를 돌아보아야 하는데, 나는 나를 돌아보는 데 미숙했다.
 
p33, <우리 철봉 하자>
 
 
삼십 대가 되어도 석주는 인생에 여전히 미숙하다. 스스로, 삶에, 사랑에 미숙하다. 오히려 어른이 될수록 나를 돌아보는 게 무서워진다. 나를 구성하는 것들이 너무 복잡다단해졌고, 그걸 어설프게 합리화할 수 있는 능력도 탑재되었고, 현상 유지만으로도 인생이 큰일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하기도 한다. 유해한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고, 해로운 사랑에 매번 아파하는 같은 방식을 선택한다.
 
 
나는 인생이 적당한 시점에 최악의 결말로 끝나버릴 거라는 염세적인 기분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최악의 결말은 존재하지 않고, 늘 최악의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p86, <우리는 계절마다>
 
 
십 대의 희조는 최악에는 끝이 없음을 깨닫는다. 최악의 지점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시점에 도달한다고 해서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어느 순간에 당도했다고 해서 멈춰지는 것도 아니다. 최악은 순간이고, 그 순간은 늘 존재한다. 최악의 길을 걸어온 ‘나’는 ‘최악인 상태’로 계속 존재할 뿐이다. 이 서늘함이 드라마 <안나>의 대사를 떠올리게 했다. 순간순간마다 날 옥죄는 지옥. 최악의 나란 그런 것이다.
 
 
“사람들은 지옥을 공간이라고 생각하잖아?
공간이 아니라 상황인데.”
 
- 드라마 <안나>
 
 

모순의 항상성에 대한 모순

 

이 책을 굳이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자면, 나는 <우리 철봉 하자>부터 앞서 말한 3부작까지를 전반부로 나누겠다. 그리고 굳이 구분하자면, 전반부가 결함, 후반부가 사랑의 이야기라고 분류하겠다. 전반부는 내가 나를 좀먹게 되는 그 과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마음속 떼어내지 못하는 결함, 삶 속 씻어낼 수 없는 결함. 스스로 염오하는 감정을 드러낸다.


반면 단편 <사랑과 결함>부터 후반부는, 상대방에 대한 애증이 보인다. 좋은데 싫은 것, 미운데 예쁜 것. 잘해주고 싶은데 짜증도 나는 것, 화나는데 망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상대방을 보며 떠오르는 복합적인 감정들이 너무 명료하게 쓰여 있어서 오히려 더 헷갈린다. 모든 사람이 다 이렇게 사는 게 맞구나, 하는 안도감과 그렇다면 사랑은 너무 피로한 것 아닌가, 하는 고달픔.
 
 
삶은 기괴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그 기괴한 얼굴을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는 도무지 그 기괴한 얼굴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p167, <사랑과 결함>
 
 
나는 정선이의 그런 모습에 끌려 가까워지게 되었지만, 동시에 언젠가 내가 그런 정선이를 제일 저주하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정선이에게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며 동질감을 느꼈고 그건 애초에 잘못된 관계의 시작에 불과했다.

p315, <내가 머물던 자리>
 
 
나와 다르게 삶을 대하는 것 같아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기도 하고, 나와 너무 비슷한 부분 때문에 사람이 싫어지게 되기도 한다. 정말 모순적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클수록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움의 감정도 커진다는 것이 참으로 모순적이다. 그 사람의 한 조각 때문에 가까워졌는데, 그 조각이 나를 찌르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아파진다는 것. 이러한 모순을 너무나 명백히 담은 바이블 격인 책이 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을 시작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워하게 된다는, 인간이란 존재의 한없는 모순….
 
- 양귀자, 《모순》
 
 
개인적으로 《모순》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나는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모순이 존재하는 것이 사랑의 깜찍함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잘 모르겠다. 왜 모순은 항상 존재하는가? 우리는 모두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고 논리적으로 살아가게끔 프로그래밍이 된 고등 사고의 인류인데, 왜 논리적 오류는 늘 존재하느냐는 말이다. 마치 결함이 탑재된 최고 성능 로봇처럼.

 
그런데 삶이라는 게 정말 누군가에게 해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는 건가? 기어코 해가 되고 마는 것이 삶 아닌가.
 
p118, <그 얼굴을 마주하고>
 
 
그냥 죽고 싶은 마음과 절대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매일 속을 아프게 해. 그런데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온갖 것들이 나를 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거야.
 
p239, <그 개와 혁명>

 
불가해한 삶을 살고 싶은데도 결코 누군가에겐 유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인데, 죽어갈 때는 모두 나를 처절하게 살리는 방식이 되고 마는 것도 삶이다. 내 의도와 완벽하게 부합할 수 있는 사랑과 삶은 없다. 그것이 아이러니한 이 세상 순리의 깜찍함인 것이다. 예소연 작가는 정말로 너무나 각기 다른 온도와 소재의 이야기로 삶과 사랑의 냉소적인 면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래서 이게 냉랭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상처 나고, 고통스럽고, 온갖 모순이 뒤섞인 이 온도가 그냥 사랑 그 자체다.
 
 
 
선명한 멸시, 폭력적인 깜찍함

 

<사랑과 결함>의 전반적인 상태는 ‘견딜 수 없음’이고 전반적인 정서는 ‘멸시’라고 생각한다. 서늘한데 소심하고, 따가운데 참을만하다. 삶과 사랑에서 계속 염증이 느껴지는데, 그렇다고 아프다고 와락 소리를 지를 정도는 아닌, 폭발하기 직전의 견딜 수 없는 마음. 내가 나를 견딜 수 없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나도 견딜 수 없고, 그 사랑하는 사람 자체도 견딜 수 없다. 이를 삶의 깜찍함이라고 칭했지만, 이 칭호조차 폭력적인 느낌이 든다. 진정 삶과 사랑이 휘두르기에.


이 시대에 이런 책을 쓴 예소연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숏폼과 웹소설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 한동안 보기 어려울 거로 생각했던 미묘한 감정들을 겹겹이 쌓아 풀어내는 소재에 큰 힘을 느꼈다. 거칠었고, 야성적이었다. 냉랭하고 서늘했지만, 매정하지는 않았다. 누구보다 신랄하게 ‘나’를 멸시하는 표현을 보며, 불쑥불쑥 목 끝에 매달린 슬픔이 아우성쳤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내 서사에 완벽하게 가담한 인물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온전한 슬픔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p133, <그 얼굴을 마주하고>
 
 
때로 누군가에게 은총은 아주 사소한 것이 될 수 있다. 친구가 나에게만 말해 준 비밀 얘기 하나,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만 건네준 사소한 호의 한 톨, 조금 상했을지라도 내가 베어 물 수 있는 사랑 한 조각. 때때로 삶은 우리를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이끌고, 절망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흔히 이끌린 스스로를 꾸짖는다. 경멸하고, 멸시하고, 탓한다. 그것이 응당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단죄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소연 작가는 이 문장도 썼지만, 아래의 문장도 써주었다.
 
 
내몰린 사람이 스스로에게 먼저 기회를 주는 것만큼 마땅한 일은 없다.
 
p186, <사랑과 결함>
 
 
내 서사에 완벽하게 가담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은 온전한 슬픔뿐만 아니라 기회를 내어주는 것 또한 있지 않겠는가? 그저 ‘LOVE MYSELF’ 하라는 말이 아니다. 스스로를 온전히 멸시해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권리도 행사하라는 말이다. 나는 예소연 작가의 이 문장을 읽기 전에는 그러한 권리가 있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의무가 있으면 권리도 있는 법.

결함으로 가득 찬 스스로에게 사랑의 기회도 줄 것. <사랑과 결함>은 이 마땅함을 받아들이는 긴 과정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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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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