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환상과 현실이 지나간 자리의 유령 - 더 원더스 [영화]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자전적인 영화 '더 원더스'
글 입력 2024.08.0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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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글은

영화 <더 원더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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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닿는 자리


 

새까만 어둠을 헤치며 작은 빛이 등장한다. 사냥꾼들이 탄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다.

 

사냥꾼들은 손전등으로 주변을 비춘다. 낡은 농가 한 채가 빛 속에 드러나고, 사냥꾼들은 서로에게 저기 집이 원래 있었는지 묻는다. 사냥꾼들의 둥근 손전등 불빛은 집 안에 잠든 어린 소녀들을, 영화의 주인공 젤소미나를 비춘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더 원더스>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빛은 외부 세계로 난 통로이자 ‘이곳’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조명이다. 사냥꾼들이 가족의 집과 아이들을 비추는 손전등 조명, ‘전원의 기적’ 쇼에서 출연자들을 비추는 무대 조명, 그리고 사라진 마틴을 찾기 위해 섬을 비추는 조명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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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봉업자 볼프강의 첫째 딸 젤소미나는 아직 어린 동생들과 일하기 싫어하는 둘째 마리넬라의 몫까지 아버지의 일을 돕는다. 벌들이 가득한 벌집을 용감하게 붙잡는 것부터 아버지의 등에 박힌 벌침을 뽑는 것까지 그다지 싫은 내색을 하지 않으며 묵묵히 해낸다. 자신처럼 양봉업을 하는 농부가 되길 바라는 아버지 밑에서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던 젤소미나의 삶에 새로운 만남이 찾아온다.

 

바로 진정한 농촌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농가에 막대한 우승 상금을 주는 ‘전원의 기적’ 쇼 진행자 밀리와, 전과가 있는 청소년을 교화시키는 프로그램을 통해 농장 일꾼으로 찾아온 독일 소년 마틴이다.

 

 

 

마틴, 볼프강, 낙타


 

어린 소녀들만 사는 집에 온 마틴은 처음부터 아이들의 주목을 받는다. 방화, 절도 등 전적이 화려하다는 마틴은 누구와도 눈을 맞추지 않는다. 마틴과 함께 온 사회복지사는 그를 통제의 대상으로, 어머니 안젤리카는 위험한 소년으로, 아버지 볼프강은 일꾼으로 생각한다. 젤소미나와 마리넬라는 또래 남자아이의 등장에 호기심을 가진다. 누구와도 말하지 않는 마틴은 아름다운 휘파람을 불어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동생 마리넬라가 마틴을 잘생겼다고 할 때 시큰둥하게 대꾸하지만, 젤소미나에게 마틴의 존재감은 점점 커진다. 안젤리카와 볼프강이 자리를 비워 젤소미나가 작업장의 책임자가 된 날, 마리넬라와 젤소미나가 좋아하는 사랑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재빨리 볼륨을 키우고 함께 춤추자고 하는 마리넬라에게 퉁명스럽게 대하는 젤소미나는 분명 마틴을 의식하며 바보같이 보일 것을 걱정하고 있다. 급기야 당황해서 마리넬라가 아직 기계 안에 손을 넣고 있을 때 기계를 작동시키는 실수를 한다. 손을 다친 마리넬라를 치료하기 위해 작업장에 있던 모두는 응급실로 향한다.

 

젤소미나는 그런 와중에 꿀 양동이를 비우지 않고 왔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황급히 돌아간 작업장에는 바닥에 흘러넘친 꿀이 가득하다. 설상가상으로 볼프강 몰래 신청했던 ‘전원의 기적’ 관계자가 작업 현장을 살펴보러 온다. 주체할 수 없이 사건의 겹이 쌓이며 상황은 폭발한다. 집에 돌아온 볼프강은 선물을 사 왔다며 젤소미나를 찾지만 이내 젤소미나가 자신을 속이고 '전원의 기적' 프로그램에 참여 신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선물을 사왔다며 웃던 볼프강의 모습에 집 밖으로 나간 젤소미나가 마주한건 다름아닌 낙타다. 어린 시절 좋아했지만 지금은 딱히 바라지 않고, 양봉업을 하는 농촌에서 존재 의미를 찾기도 모호한 낙타다. 토스카나 농촌에 불쑥 등장한 낙타는 이국적이고 환상적으로 보이지만 그밖에 의미를 찾기 어렵다. 낙타는 젤소미나의 어린 동생들에게 잠시 구경할만한 존재가 되어주지만 당장 해결해야 할 가족의 살림살이에는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 자신을 구경하는 어린아이들에게 공격적으로 입을 내미는 낙타는 외부 세계에 적대적인 볼프강과 마틴, 그리고 현실성을 잃어간 채 구경거리가 되어가는 농촌 그 자체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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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의 기적'이 가져온 깨지기 쉬운 환상


 

화려한 모자를 쓴 쇼의 진행자 밀리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단숨에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촬영 팀의 등장과 함께 바닷가 근처 계곡은 순식간에 고대 복식을 입은 사람들이 신비로운 모습으로 존재하는 환상 속 공간이 된다. 조명이 비추는 자리에는 아름답고, 과장되게 차려입은 밀리가 카메라에, 시청자에게 보이기 위해 서 있다.

 

하지만 어떻게 가져왔는지도 알 수 없는 무거운 조명과 소품들이 만들어내는 TV 리얼리티 쇼의 환상은 벗겨지기 쉽다. 영화 후반부에 젤소미나의 가족이 다함께 출연하게 된 '전원의 기적' 쇼는 처음 계곡에서 만난 환상이 유지되지 않는다. 쇼의 진행자 밀리는 세상이 망할 거라는 볼프강의 말에 황급히 화제를 돌려버버린다. 출연자들은 고대 복식을 입었지만, 본래의 자신인 채로 쇼에 참여한다. 다소 형식적인 말들 사이사이 진행자 밀리의 피곤한 얼굴이 언뜻 스쳐 지나간다. 얄팍한 환상이 고갈되어 무너진 자리에 현실이 드러난다. 

 

오랜 세월 양돈업을 했다는 이웃은 상금을 받으면 뭘 하고 싶냐는 밀리의 질문에 호텔을 세울 거라고 대답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농촌의 아름다움을 접할 수 있게 관광업을 시작할 거라는 포부다. 농촌은 이미 쇠락해 가고 있고, 볼프강의 믿음과 달리 잠깐 버티면 지나갈 폭우가 아닌 멈출 수 없는 흐름이 되어간다. 볼프강이 우리끼리 뭉쳐야 한다며 농촌을 지키기 위해 폐쇄적으로 살아갈 동안 세상은 이미 변해버린 것이다. 할머니가 카메라에 담기면 좋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기뻐하는 이웃의 모습을 통해 이미 농촌은 삶의 터전이 아닌 옛것, 구경을 위한 곳이 되어감을 짐작할 수 있다.

 

 

 

빛이 닿지 않는 동굴


 

영화의 후반부, 자신에게 키스하려는 코코를 피해 도망친 마틴은 '전원의 기적' 촬영이 끝나고 모두가 섬에서 나갈 때가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는다. 사회복지사와 경찰이 찾아와 마틴을 수배하려 하고, 젤소미나는 마틴이 어디 있는지 알겠다며 홀로 길을 나선다.

 

젤소미나는 외부의 빛이 닿지 않는 동굴 속에서 마틴을 찾아낸다. 두 사람은 그 동굴 속에서 춤을 추며 웃고, 동굴 속에서 불을 피우고 빛을 쬔다. 두 사람은 동굴 바깥을 신경쓰지 않고, 누군가의 구경거리가 되지 않고,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으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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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과 환상 


 

바다의 포말을 닮은 하얀 머리칼을 가진 신비로운 여인이 가발을 벗자 피곤하고 지친 TV 스타가 될 때, 마틴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가족의 곁에서 사라졌을 때, 환상은 사라져 버린다.

   

집 앞에 매트리스를 깔고 함께 누워 있는 가족들이 마틴을 만나고 돌아온 젤소미나를 반긴다. 가족들이 매트리스 한편에 마련한 자신의 자리에 앉은 젤소미나는 휘파람을 분다.

 

마틴이 여기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인 휘파람을 불자 동생들은 유령이라며 웃는다. 카메라는 휘파람이, 바람이 나아가는 방향을 비춘다. 다음 순간 카메라가 다시 비춘 매트리스는 텅 비어 있다. 자꾸만 사라지는 벌들처럼 젤소미나의 가족들도 살던 집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들이 살던 집은 텅 비어서 바람 소리만이 들린다. 집 안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휘파람 소리와 겹치고, 젤소미나의 환상과 현실은 모두 유령이 된다.

 

환상이 사라지고 유령만이 남았을 때 젤소미나의 유년기는 끝나고, 바깥의 빛을 향한 동경이 사그라들었을 때 비로소 나고 자란 농촌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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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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