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야기 말고 그림 사는 이야기
나에게 미술은 학과 과정에서 스치듯 다루었던 하나의 과목이었을 뿐, 미술사를 전공한 다른 큐레이터들과는 차이가 있다. 그렇기에 미술품을 전시할 때는 더욱 치열한 연구와 고민을 거듭하였고 다양한 주제의 미술 전시와 관람객들의 반응을 여러 해 경험하며 내가 깨달은 것은 미술은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었다. (…) 정보와 전시의 과잉 시대 속에서 나는 미술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림을 만나고 대화를 나눠보며 일상을 살아가는 이야기, 일상 속에서 작품을 소장할 때 도움이 될 만한 그림을 사는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p.6-7)
그림 이야기는 많이 보았지만, 그림 '사는' 이야기는 처음 본다. 책의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는 그림 사는(live) 이야기로 해석했는데, 프롤로그와 목차를 읽으면서 사는(buy) 이야기 또한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솔직히 중의적 효과를 노리기 위해 억지로 엮어 넣은 제목이 아닐까 싶은 의심도 있었지만, 책을 읽고 난 지금은 두 가지 사는 이야기 모두 이 책에 충실하게 담겨 있음을 안다.
책의 저자 송한나는 실내건축학, 디자인학, 큐레이터학을 전공했지만 미술사를 전공하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미술 자체만큼이나 그를 둘러싸고 향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풀어나가고, 사람이 미술을 소장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림 사는(live) 이야기
<그림 사는 이야기>는 카우스, 뱅크시를 포함한 여섯 명의 해외 작가, 그리고 네 명의 국내 작가 이완, 강준영, 허보리, 조광훈을 보여준다.
미술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알려주는 책이 으레 그렇듯, 이 책에도 객관적인 정보, 그리고 주관적이라고는 하나 객관적 기준에 따른 평가로도 해석할 수 있는 감상이 주로 담겨 있다. 하지만 여타 책과 다른 점은, 저자 송한나의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도 함께 들어 있음이다.
박물관을 처음 다니며 큐레이터를 꿈꾸기 시작한 기억, NFT 시장이 궁금해 직접 NFT 작품을 만들어 본 경험, ‘우리’라는 단어를 비로소 다시 생각하게 된 기회 등이 책에서 다루는 작품들에 얽혀 우리에게까지 닿는다.
그(비플)의 작품을 통해 나의 모든 날들은 어떠했는지 되새겨보게 된다. 진열장 속 작품을 만져볼 수 있는 큐레이터가 되기 위해 일 년에 백 곳이 넘는 박물관을 직접 찾아다녔고 일일이 찍은 사진을 인화하여 박물관 소개와 당시의 느낌, 내가 큐레이터라면 보완했을 만한 점을 기록해왔다. (…) 비플처럼 기술을 연마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개인의 일기와 같은 기록의 비체계적인 연작이었지만 그와 나의 모든 날들이 공통점은 경험의 기록화인 듯하다. 기록이 경험이 되고, 경험이 누군가에겐 작품이, 누군가에겐 꿈을 이루는 기반이 되는 과정의 예술인 셈이다.
(p.110-112)
5장에서 디지털 아티스트 비플의 예술 작품과 송한나 자신이 큐레이터가 된 과정을 겹쳐보며 이야기한 부분도 인상적이다.
전시장에서 혹은 여행지에서, 오직 정보만을 전하는 도슨트나 가이드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씩 섞어가며 귀를 기울이게끔 만드는 이야기꾼이 더 흥미로웠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술을 직접 하지는 않을지라도 모두 경험하는 입장이고, 그러니 예술보다도 경험자의 입장이 더 쉽고 가깝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우리보다 조금 더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채 앞서서 예술을 체험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술을 소개하는 직업을 가질 만큼 큰 애정을 가진 자의 경험은 다른 감상자에게도 소중하다.
그림 사는(buy) 이야기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어떠한 것일지라도 사람의 눈에 들어온 이상 사고팖의 영역 안으로 끌려들어 오게 되는데, 흔히들 가치를 숫자로 정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예술 작품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저자는 유니크 워크와 에디션 작품의 차이, 작품을 보관하는 방법, 희소성이 높은 작품의 기준 등을 알려준다.
엄청난 부자들만의 취미, 내가 직접 하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던 컬렉팅이 이 책을 읽고 나면 내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온 기분이다. 그에는 이 책이 작품을 수집하는 방법을 가볍게나마 알려주는 덕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에 관한 인식을 바꿔주어서인 듯하다.
예술은 작품이지,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 한구석에 있다. 물론 실제 예술가 중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으니 아예 허황된 생각은 아니겠지만서도, 나는 그들과는 달리 확고한 신념이나 서술할 수 있는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저 어디서 주워듣고 생긴 막연한 느낌일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의 눈에 들어온 이상 사고팖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물며 예술은 오직 사람의 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예술이 그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애써 거부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그림을 사는(buy) 것도 그림을 사는(live) 것의 일부일 뿐. 그래서 사람과 미술을 연결하는 큐레이터의 역할에 사람이 미술을 구매하고 소유하게 돕는 것이 포함되며, 그래서 저자가 우리도 그림을 사고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러한 책을 쓴 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