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는 해를 보는 일을 싫어한 적은 없었다. 여기 앉은 나 혼자만이 존재하는 듯한 정적을 즐기는 일, 깨어나지 않은 세상으로부터 불어오는 첫 번째 바람을 맞는 일은 어쩌면 나의 취미이자 보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 근래 한 달간은 뜨는 해를 볼 때마다 서럽거나, 허무하거나, 짜증이 났다. 다가올 아침으로 끌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늦은 저녁부터 밤까지 시원한 바람 속에서 온전히 안정적이던 창 앞의 의자가 그리워지기도 하고.
왜 새벽 다섯시에 찾아오던 그 비스듬한 어스름이 싫어졌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전에는 나를 가라앉혀주던 그때의 정적이 지금의 나에게 소음이 되었다는 것뿐이다. 정확한 단어를 통해 모두가 알 수 있게끔 확실하게 전달하고 싶지만,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싶어 또 그저 머무르게 된다. 엄밀히 말하자면, 귀찮은 것이다. 새벽의 내가 가졌던 감각을 아침과 점심의 내가 온전히 공감할 수 없듯이. 어떤 단어를 쓰더라도, 그 누구도 공감할 수 없을 것이라 믿는다.
도서 '슬픔에 이름 붙이기'는 그래서 신기하다. 저자는 장장 12년 동안이나, 누구도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고, 어쩌면 시도조차 안 할 수도 있는 의미들의 "예쁜" 표현을 찾아왔다. 아무렇게나, 무성의하게 지어진, 설명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줄임말이나 신조어가 아니라는 점이 놀라웠다. 책에 담긴 것들은 서로 다른 어원과 어원이 섞이고, 그것이 에세이가 되고, 보는 사람을 절로 설득시키는 감각의 단어들이었다. 슬픔은 차오르는 감각임을 말하는 부분에서는 일견 동의하게 되기도 했다. 무엇이 차오르는 것인지는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저자는 누군가의 공감, 누군가의 응원 한 번으로 그 긴긴 세월의 동력을 얻었다고 말한다. 단어의 매무새들을 섬세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이 스쳐 지나가는 공감으로부터 힘을 얻은 것이다. 어쩌면 나는 행해보지도 않고, 생각도 해보지 않았을 것들의 시도를 목격하게 되는 현장에 선 듯했다. 저자의 시도는 내게 새롭게 다가온 차원이었다. 존재하는 단어들에 매몰되고 그것들이 짓누르는 압력을 이겨봐야겠다는 일말의 동기조차 가지지 않았던 이전의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만약 내가 그때 그 감정을 누르지 않고 예쁘게 표현했다면, 공감받지 못할 거라 생각해서 숨겼던 것을 나만의 언어로 들려줄 수 있었다면, 몇 개의 상황 정도는 바꿔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이상하고도 미련한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고, 마침 내일 아침 해도 봐야 할 것 같으니, 오늘과 어제 느꼈던 '아침으로 끌려가는 듯한 감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본다. 사실은 바빠서 정신이 없는 게 아니라 힘들어서 정신이 없는 게 아닐까. 저녁부터 밤까지, 밤부터 새벽까지 분투했는데 결국 얻는 게 없어서 허탈했던 것은 아닐까. 저녁에만 느낄 수 있는 시원한 공기를 오롯이 나에게 투자했는데, 투자한 만큼 차오르지 않아서, 오히려 비스듬하게 쫓아오는 어스름이 나를 들뜨게 해버려서 속상했던 것은 아닐까. 아침이 불러올 낮의 시간이 부담스러웠던 것은 아닐까.
말이 길어지는데, 책에서 알려준 대로 간결하게 "오바드와르(aubade+abattoir)"라고 표현해 본다. 아침에 바치는 송가(aubade), 도살장(abttoir). 새벽 다섯시, 늦은 밤의 흐릿한 멜로드라마가 아주 이른 아침의 근면한 형광빛과 어색하게 합쳐지는 시간 직전의 딴 세상 같은 분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