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도 금세 늙어가고 있다. 나는 주말마다 ‘몬던(mornden)’을 꿈꾸지만 이번 주도 그럴 일은 없었다. 대신 기리보이의 신보를 들으며 ‘고보(gobo)’의 마음으로 충만하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이른 저녁, 잠시 ‘번 오폰 리엔트리(burn upon reentry)’를 느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나는 ‘주말 아침마다 동거인과 세상에서 물러나 잠옷 차림으로 시간을 느릿느릿 기어가게 만들며, 시간의 흐름을 최대한 정지시키며 함께하는 자족적인 세계’를 꿈꾸지만 역시 그럴 일 없었고, 기리보이의 신보를 듣고 테크노의 매력에 흠뻑 빠지며 ‘온종일을 심미적인 것을 좇는 마음으로 보내고서 느끼는 맹렬한 흥분’으로 한동안 외로울 일 없다가 낮잠을 자고 일어난 이른 저녁, 들여다본 핸드폰에서 ‘몇 시간 동안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지만 그동안 그 어떤 새로운 메시지도 도착하지 않았음을 알고 느끼는 쓰라린 실망감’을 느꼈다는 말이다.
이렇게 장황하고 구체적인 감정들에도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단어들은 모두 책 ‘슬픔에 이름 붙이기’의 저자 ‘존 케닉’이 만든 신조어들이다. 그는 2009년부터 자신의 개인적이고 모호한 감정을 표현하는 신조어를 만들어왔다. 그는 시인도, 언어학자도 아니지만, 개인 블로그와 유튜브에 자신이 만든 감정 신조어를 꾸준히 소개해 왔다. ‘모호한 슬픔의 사전(The Dictionary of Obscure Sorrows)’이란 이름으로.
‘번 어폰 리엔트리’를 조금 더 들여다볼까. 토요일 오후부터 할 일만 많고 아무런 약속이 없던 지라 나는 혼자였다. 심지어 일요일은 집에만 있었다. 아무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일어났는지 밥은 먹었는지, 심지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나는 과제를 하고, 음악을 듣고, 밥을 먹고, 설거지를 했다. 누구와 만나거나 연락을 하진 않았지만 딱히 심심하지도 않았다. 창문을 여니 봄바람이 불어왔고 기분 좋은 나른함에 잠이 들었다. 꽤 시간이 흐른 이른 저녁. 핸드폰에서 바뀐 건 시간뿐. 잠들기 전에는 별일 아니었지만 일어난 후 느끼는 아득한 공허함. 이토록 완벽한 고독은 원한 적 없다. 딱히 잘못한 적 없는 몇몇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들을 애석하게 탓하다 도착하는 기묘한 심연에는 확실히 지칭하는 말이 필요하다.
소셜 미디어 시대에 사는 우리에겐 새로운 단어가 절실하다. 인스타그램을 넘기는 머릿속에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로 가득 차오른다. 본 적도 한참이고, 다시 만날 일도 없을 것 같은 누군가가 오늘 무엇을 했는지 알게 되는 일은 묘하다. 궁금하지도 않았는데 업데이트되는 근황은 기억 한 편에 떨떠름하게 저장된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미 특색 있는 콘텐츠로 자리 잡아 심심할 때 궁금해지는 유희거리가 되었다. 입장이 바뀌어도 비슷하다. 내 소식을 수백 명이 본다는 사실에서 오는 민망함이나 부담감, 희열, 짜릿함 같은 것들. 또 교류한 적 없는 누군가가 내 소식을 알고 있다는 걸 들은 순간이나, 인스타그램이 아니었다면 연락할 일이 있었을까 싶은 관계에서 오는 고마움과 공허함 사이 어딘가의 감정까지. 그 외에도 특정한 감정이 떠오르는 순간은 일상 속에 분명 있다. 그것들을 오묘하고 이상한 상태로 관조하다가 흘려보내는 것과, 붙잡아놓고 명명해 하나의 실체로 만드는 일은 분명 다르다.
며칠 전에는 러닝을 하는 도중에 너무나 새하얀 구름을 보았다. 사진을 찍을까 했지만 기록을 측정하는 앱이 중단될까봐, 사진을 찍는 행위가 페이스에 방해되지 않을까 싶어 그러지 않았다. 러닝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니 그 구름이 계속 아른거렸다. 찍을 걸 싶었다. 근데 찍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두 눈에 힘을 주고 그 순간 최선을 다해 감상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슬픔에 이름 붙이기’를 읽다가 이 마음을 정확히 대변하는 단어를 발견했다. 바로 ‘모리이(morii)’. 존 케닉은 이를 ‘순식간에 지나가는 경험을 붙잡으려는 욕망’이라 정의한다. 무언가 놀라운 것을 보면 카메라에 손이 가는 본능은 이상할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 그는 사진은 피사체보다 더 진짜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가져갈 수 없는 세상의 다른 판본을 만들어준다고 덧붙인다. 우리는 순간을 살아가기에 경험하는 중에도 그것이 벌써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구름은 곧 사라진다. 포착하면 영원할 수 있다. 나는 피곤함을 느끼듯, 배고픔을 느끼듯 하나의 욕망으로서 ‘모리이’를 느낀 것이다.
요즘 나는 ‘미드서머(midsummer)’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이십 대 중반에 자신의 젊음이 당연하다는 듯이 끝나버려서, 비록 여전히 과거의 일로 마음이 어지럽거나 미래를 계획 중인 상황임에도 인생의 현재 단계에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 존 케닉도 내 나이 때 이렇게 느꼈던 걸까. 과거, 현재, 미래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지만 어쩐지 외롭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