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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ration by sasa.
{Jellyfish Monologue}
1. 피지 못하고 시든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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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그르르.아가미에서 새어 나오는 한 줌의 공기 방울처럼 피어오르는 상념이 있다. 모래알 같은 공기 방울은 각자의 우연을 지니고 부유하는 것 같지만, 한 아가미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게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보글. 보글. 물속의 날숨 하나. 첫 번째로 영근 물방울이 불현듯 꽃으로 승화한다. 꽃잎의 선단을 오므린 채 바싹 메마른 모양새다. 개화를 기대하기엔 너무도 시들었고, 미안하게도 나는 이미 죽은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늦가을의 바람이 짓궂게도 생기를 모조리 앗아갔나. 마음이 묘해져서 꽃을 보며 별의별 생각을 하던 중이었는데,
[넌 주인공이야]
해파리가 뜬금없는 혼잣말을 한다. 물방울처럼 또옥 떨어진 혼잣말은 독백에 들어서자마자 가느다란 줄기가 되더니 아무렇게나 뭉쳐지기 시작한다. 데굴데굴 한참을 방황하더니 자그마한 회전초가 되어 시든 꽃 곁을 나뒹군다. 무슨 일이지. 여기 시든 꽃 말고 방 안에 다른 일이 일어났나 싶어서 주변을 빠르게 훑는다. 하지만 회전초가 독백을 살살 긁는 소리만이 또렷할 만큼 고요하다.
[특별한 꽃이야] 흠칫 놀라 독백을 향해 뒤돌아서니 그새 두 번째 회전초가 첫 번째 회전초와 함께 시든 꽃 주변을 나뒹굴고 있었다. [왜 계절을 끝까지 맞이하지 못하고 시들었을까. 아닌가, 이 계절이기에 이런 끝을 맞이해야 했던 걸까. 어디가 아팠나. 못된 벌레를 만났던 걸까.] 해파리는 관심 있는 척, 궁금한 척, 얄팍한 혼잣말을 쏟아냈다. 그럴 때마다 떨어지는 말캉한 한 방울은 피할 수 없는 저주에 걸린 듯 버석버석한 회전초가 되어 독백 속을 나뒹굴었다.
[모두가 너를 궁금해할 거야. 모두가 너를 보며 온갖 사연을 상상할 거고, 그렇게 모두가 네게 관심을 주고 또 좋아해 줄 거야. 그러니까 넌 특별해. 아주 특별해. 시들어서 괴롭다 한들 넌 특별해. 뭐 잘 피어났어도 특별했을 테지만. 지금. 더. 아마도.] 얼기설기 정성 없이 뭉쳐진 말들이 독백을 무서운 속도로 채워나간다. 중요한 건 어느 하나 생기 머금은 것이 없었다. 해파리는 의무감에 사로잡힌 것처럼 떠오르는 대로 함부로 읊어댔고, 이 초라하고 마음 없는 것들이 무언가를 어떻게든 숨기려는 듯 다급하게 쏟아져 나왔다.
바닷속에서 뜬금없이 풀이라니. 해파리가 꽃이라니. 시든 꽃도 회전초도 얌전하질 못해 안절부절 떠는 꼴도 내게는 너무도 익숙한 감정의 단상이어서 거울을 보는 듯 멍하니 지켜보던 찰나, 나는 지금 해파리 속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아직 바다에 온전히 스며들지 못했구나. 해파리를 만나기 전에 배회하던 내면세계가 아직 살갗 위를 맴돌았던 것이다*. 근데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자리 잡지 못해 겉돌기만 하는 심란한 기류의 이유를 찾고 싶은데, 아마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내면의 모순인데, 혼란스러운 마음은 겨우 찾아보려던 여유마저 낚아채 혼란에 남기를 종용한다. 지금 내가 그렇다는 얘기다.
*해파리 이전에 몽상가는 물 내음을 머금은 품들이 가득한 정원 모양의 우울을 거닐었었다.
탓.타닷.타.타닷. 회전초가 부딪히는 소리로 존재감을 키워간다. 독백 위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풀 먼지가 잔뜩 인다. 저기 처음엔 뭐가 있었더라. 기억마저 저 멀리 나뒹구는 사이 옴짝달싹 못 할 만큼 가득 차오른 회전초들이 하나둘 밖으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풀 뭉치의 군상은 어쩐지 안쓰러워 보인다. 너희 별 의미 없는 존재들이란 걸 아니? 회전초가 들을 리 만무했지만 툭 모진 말을 내뱉는다. 바닥에 떨어진 회전초를 손가락으로 집어 올린다. 아무것도 안 잡는다면 이런 기분일 것이다. 손가락을 구부려 움켜쥐자 마른 낙엽처럼 바스스 부서지더니 가루 흩날리듯 사라진다. 빈 손바닥에는 끈적이는 풀의 진액이 남는다. 아, 아직 살아있는 거야. 물기가 남아있잖아. 작은 입김에도 존재감이 희석되어 버릴 것이 살아 숨 쉰다.
무작정 독백에 손을 집어넣는다. 손을 쥐었다 폈다 회전초를 하나씩 바스러뜨린다. 손바닥이 점점 끈적해진다. 후우- 풀 먼지를 입김으로 날려 보낸다. 남은 회전초가 물에 젖은 눈처럼 녹아내리면 독백 가장 바닥에서 까만 동공 같은 두려움을 만난다.
[나도 그런 끝에 다다르면 어떡하지]
비로소 만난 까만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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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리는 지쳐 잠들었다. 그 가냘픈 꽃도 남아있다. 아직도, 아무도 그 상념을 놓질 못했다.
[내가 꽃이라면 얼마나 자라난 걸까] 상념 사이를 헤맨다. 해파리가 꽃을 상상하니 분명 망상일지도 모른다. [아직 꽃봉오리일까, 아님 망울도 맺지 못한 볼품없는 줄기일까. 정말 자라다 말고 긴 시간 망울에 갇혀있는 거면 어떡하지.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갑자기 피어나면 좀 당황스럽지 않을까] 바다에서 육지의 생태계를 그리는 망상. 우리는 다른 세계에 침범하기까지 하며 고민을 다채롭게 하는 재주가 있다. [피면, 시들잖아.] 결국 닿고 만 자연의 이치 그 어느 정점에서 새삼스럽게 겁을 먹는다. 푸르르륵 공기 방울이 쏟아진다.
여기구나. 무언가 깨달은 기분이 들 때, 해파리는 시든 꽃이 된다. 불안이라는 게 그렇다. 남의 말을, 남의 존재를 끌어안고선 이게 나라고 울적이기 딱 좋은 연약함이지. 내면 상황만 보자면 시든 꽃은 해파리가 스스로 알아차리기도 전에 찾아온 은연중의 두려움이기도 하다. 해파리는 시든 꽃을 발견했지, 불러내지는 않으니까. 사실 두려움이 아닐지도 모른다.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나 상태일지도 모르고, 그들은 보통 이름보다는 승화의 과정으로 불리어야 더 정확하니까.
참 낯선 몽상 속에 덩그러니 남은 해파리는 바싹 말라버린 제 모습을 차근차근 살펴본다. [어쨌든 난 ‘하나’. 그러니 한 송이.] 그렇구나? 나도 모르게 몽상을 향해 되물었고, 몽상 밖으로 늘어진 상념 끝에 갈고리에 물고기 걸리듯 의문이 걸린다. 해파리는 어째선지 망설인다. [하나뿐이니까 소중히 피워내야 해] 해파리는 제 마음을 다독여본다. [아니야, 아니야] 이런 위로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내 삶이 도달할 꽃이 단 한 송이라니. 나는 살아가다 피어나더니, 시간이 흐르면 또 피어나고, 먼 훗날에도 피고 싶은데]. 아직 ‘피어나기’를 경험해보지 못한 - 평생 해보지 못할 - 해파리는 화려한 개화의 순간을 마냥 낭만으로 여긴다. 그렇게 반짝이는 순간이 여럿 없고서는 바다를 떠다니는 지루한 삶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이상한데. 와중에 난 기시감을 느껴서 의아스레 해파리가 꾸는 꼴을 지켜봤다.
상념이 거기까지 닿자, 해파리는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 [애초에 난 이런 꼴인데 그렇게 피어날 만큼 특별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누군가 반가워할 존재는 아니야.] 상념 끝의 갈고리가 잘못 돌아가 몽상의 가장자리를 푹 찌르고 만다. 해파리는 시퍼런 바다로 돌아온다.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지] 다음 파도가 ‘자괴감’이란 이름을 달고 세차게 다가올 즈음 무언가 홀연히 날아와 해파리 곁에 톡 떨어진다.
웬 낙엽. 평연히 말라비틀어진 순간에 이른 낙엽에 시선이 닿는다. [되게 어디서 본 것 같잖아] 동시에 읊는다. 나도 모르게 툭 내뱉는다.
계절.
몽상은 우연을 필두로 필연을 향해 나아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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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핀다. 그리고 또 꽃이 피고, 그런데 또 꽃이 핀다. 비로소 계절을 맞이한 개화가 아닌 욕심 그득한 증식이다. 이건 징그럽다. 내가 잘 알 거든. 이 기시감은 내가 소망했던 아주 오래 전의 몽상에서 비롯되었으니까. ‘만개’라 이름 붙여 놓고 간절히 바라곤 하던 괴물 같은 꿈의 형상이 있었다*. 넘쳐 피어나는 꽃들에 파묻혀서 사라지기를 바라는 꿈이었다. 스스로 목을 죄는 간절함. 온기 한 점 없이 하얗게 질린 낯빛으로 피어나는 무한한 꽃. 그 낯에서 쏟아지는 공허한 눈빛. 꼭 그때의 나를 닮은 꽃이었다. 가득 피었었지.
*해파리의 내면, 그 이전에는 우울의 정원이었고, 그보다 더 옛날에는 아무것도 없는 하얀 벌판에 머물렀었다. ‘만개‘는 하얀 벌판에서의 이야기다. 울컥거리는 슬픔이나 우울 따위를 어떻게든 잊고 싶어서 꾸었던 꿈이다.
해파리의 망상은 괜한 우연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와 같지는 않다. 해파리의 ‘개화’는 나의 언어에 영향을 받았을지언정, 본질적으로는 나와 상관없이 해파리의 삶을 좇아 나타난 형상이다. 그러니까 오롯이 해파리에게 집중해야 있을지도 모를 필연에 가닿을 수 있다. 피차 이미 영향을 주고받은 거 더 개입해보기로 한다. 내가 계절이라고 했었지. 우리는 시듦을 두려워했지만, 그것이 삶의 끝을 의미하는 건 아닐지도 몰라. 티포트의 상념을 독백에 살금살금 부으며 열기가 피어올랐던 방의 온도를 차츰 낮춘다. 그러므로- 기괴하게 거듭되는 만개 대신 어느 계절이 되면 잠시 사그라들 줄 아는 마음을 생각한다. 아마 나도 모르게 묵묵히 제 주기를 밟아왔을지도 모를 내면의 계절을.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든다. 해파리는 어떤 마음일지 모르겠다. 몽상에 혼란스러운 사이 몰래 스며들어와 고여있던 불안이 차갑게 식어간다. 보잘것없이 시드는 순간을 받아들이고 싶다. 나는 움츠러들며 사라지는 까만 동공을 향해 외쳤다.
파도가 친다. 해파리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낙엽과 바다 위를 떠다니다가 머리 위에서 굽어지더니 그대로 세차게 떨어지는 파도를 맞는다. 물이 부서지며 피어난 포말에 휘말리는 낙엽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낙엽과 포말. 왠지 둘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사라질 줄 아는 존재이자 흔적들] 해파리는 문득 그 둘이 좋아졌다.
철썩.
다시. 깊게 휜 파도가 머리 위에서 무너져 물속에 욱여넣어진다. 하느작하느작. 다시 고개를 내미니 파도가 컸던 만큼 하얀 포말이 잔뜩이다. [겨울 같네] 섬에 쌓인 눈을 봤을지도 모를 해파리와 이미 눈이 무엇인지 아는 내가 읊조린다. 사라진 낙엽 친구를 찾으며 잎의 생애를 떠올린다. 정말 우연히 내려앉았을 땅 위에서 소복한 눈을 덮어 자취를 감췄을 평범한 낙엽들을. 단지 봄이었고, 여름이었고, 가을이었고, 그래서 겨울이었을 순간들을.
한 번 두 번 세 번 천천히 사그라지다가 한 번 두 번 세 번 소중히 피어나길 여러 번. 그 느리고도 뭉근한 박자가 다가올 시간이라는 거대한 막연함을 감히 마주케 하지. 우리는 비밀스러운 믿음에 도착한다.
넘실.
어느새 곱게 식어 제 모양을 찾은 ‘불안이었던 것’을 조심스럽게 꺼낸다. 까만 동공의 흔적과 시든 꽃. 한결 가벼워진 마음속. 해파리는 그제야 조금의 힘을 내어 부드럽게 헤엄쳤다.
제 삶에는 달리 주어지지 않은 포근한 겨울잠을 상상한다.
어디선가 봄을 닮은 난류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