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이나 절절한 이별, 가슴 벅찬 청춘의 한 페이지까지. 가요의 주를 이루는 아름다운 주제들은 이제 클래식이 됐다. 다르게 말하자면 새롭지 못하다. 편하게 듣기 좋은 이지리스닝 음악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넘쳐나는 정형화된 음악들이 피로감을 주곤 한다.
그러나 K팝 시장의 견고한 틀을 깨듯, 곳곳에서 전례 없던 음악적 시도를 선보이고 있다. 여자 아이돌들이 그간 청순, 섹시, 걸크러쉬 등 단편적인 매력을 뽐내 온 것에 반해, 이제는 다채로운 콘셉트와 스토리 속에서 자신만의 '진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하며 리스너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트리플에스가 그려낸 잿빛 청춘
과연 청춘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파란색과 초록색 그 사이 어디쯤일까. 미디어는 찬란하고 싱그러운 청춘의 단면을 지속적으로 그려내면서 누군가의 현재, 또는 과거를 아름답게 포장한다. 온통 반짝이는 이야기 속에 OECD 10대 자살률 1위이라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 가운데 트리플에스는 지난 5월 8일 발매한 신곡 'Girls Never Die'로 청춘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조명했다. 제목 그대로 쓰러져도 또 일어나는, 모진 세상을 처절하게 견뎌내고 있는 소녀들의 이야기다.
tripleS(트리플에스) 'Girls Never Die' Official MV
뮤직비디오에는 제각기 죽음의 문턱에 선 이들의 모습이 담겼다. 인파 속에서 방황하는 소녀가, 물이 가득한 욕조에 숨을 참고 빠져드는 소녀가, 달려드는 차량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소녀가 위태로운 끝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들의 곁을 찾아온 누군가가 다시금 살아갈 힘을 전한다. "다시 해보자"라는 덤덤한 메시지와 함께.
트리플에스가 그려낸 청춘은 잿빛이다. 섭식 장애와 게임 중독, 손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느끼는 환각 등 여러 요소로 그 시절의 우울감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죽음과 맞닿은 절망을 메인 테마로 했다는 점은 K팝 뮤직비디오로서는 다소 도전적이다. 하지만 누구나 겪을 법한 추락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고스란히 투영하면서, 마냥 밝게 빛나지만은 않았던 청춘들에게 진실된 공감과 위로를 선사했다. 외국어로 가득한 여타 K팝 뮤직비디오와 달리, 한국어로 저마다의 사연을 공유하는 이들이 가득한 댓글 창은 결국 트리플에스의 꾸밈없는 메시지가 통했음을 입증한다.
소녀들은 "끝까지 가볼래 포기는 안 할래"라는 다짐과 함께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뮤직비디오는 묘지 속에서 힘차게 날아오르는 까마귀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말처럼, 상처로 말미암아 성장할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금 기대하게 한다.
트리플에스는 전작들의 뮤직비디오를 통해 청춘들의 여러 모습을 비쳐왔다. 'Generation'에는 사람들의 눈총에도 아랑곳 않고 숏폼 영상을 찍는 소녀들이, 'Rising'에는 자본주의 사회에 지쳐도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 줄 아는 소녀들이, 'Girls' Capitalism'에는 어둠 가득한 지하실에서 함께 꿈을 키워가는 소녀들이 있다. 생명력 가득해 보이는 이들은 사실 우리가 겪은 그 시절의 모습처럼 무질서하고 불완전하다. 환상에 가까운 노스탤지어를 쫓는 것 대신, 청춘들의 진짜 이야기로 애틋한 연대를 이루는 이들의 음악이 더욱 특별한 이유다.
'국힙 딸내미' 영파씨, XXL 사이즈의 꿈을 향해
수많은 고민과 상처가 함께해도 청춘은 여전히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다. 영파씨는 지난 3월 20일 발매한 곡으로 'XXL' 사이즈의 꿈을 키워가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전했다.
YOUNG POSSE (영파씨) 'XXL' MV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익숙한 비트가 흘러나온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Come Back Home'을 오마주한 올드스쿨 리듬이 본능적으로 심장을 뛰게 한다. 이 곡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평균 나이 16.6세의 멤버들이 재현한 90년대 힙합이다. 가사처럼 "배기팬츠 내려 입고 트리플 악셀"을 하는 듯한 이들의 모습은 K팝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영파씨는 기존 걸그룹과의 차별화를 위한 수단으로 힙합을 활용했다기보다, 힙합에 정말로 '진심'이다. 해당 EP와 타이틀곡명부터 미국의 유명 힙합 매거진 'XXL'을 메인 소재로 활용했고, 수록곡은 레이지, 아프로 비트, 붐뱁 등 힙합의 하위 장르로 구성했다. 문자 그대로 '여돌이 말아주는 올드스쿨'은 K팝은 물론 힙합 리스너들 사이에서도 입소문을 타게 됐다. 기세를 탄 영파씨는 여자 아이돌로서 이례적으로 힙합 전문 유튜브 채널 '딩고 프리스타일'에 등판하는가 하면, 힙합의 본고장 미국 뉴욕의 저명한 라디오, 대형 음악 페스티벌까지 출격하면서 '국힙(국내 힙합) 딸내미'의 기개를 떨쳤다.
겉보기에 극과 극인 영파씨와 트리플에스의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 또한 묻어두기 힘든 자신들의 '진짜' 이야기를 한다는 거다. 데뷔곡부터 꾸준히 작사에 참여한 영파씨는 직접 가사를 쓰는 것에 대한 고단함을 토로한다던가, 평범한 학교생활 대신 연습실에서 보낸 시간을 회상하는 등 내면의 이야기를 겁 없이 꺼내놓는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언어나 화려한 랩 스킬을 선보이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완벽하지 않아도 당당하고 싶은 10대들의 간절한 바람을 대변한다.
이들은 지난해 10월 18일 발매된 데뷔곡 'MACARONI CHEESE'로는 반복되는 일상과 다이어트에서 벗어나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고, 치즈처럼 늘어져 뒹굴거리고 싶은 마음을 담아냈다. 같은 앨범 수록곡 'POSSE UP!'에는 "POSSE 씬을 먹은 다음에 먹을 거야 밤새 / 링고 아메, 초코프라페, 애플 캬라멜, 크레페, 라멘 everything"이라는 가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10대 아이돌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다이어트를 '현실의 무게' 정도로 표현하는 대신, 이렇게나 발칙하고 솔직한 화법으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었다.
이미지 출처 - RBW, DSP미디어, 비츠엔터테인먼트
이윽고 영파씨는 올드스쿨을 영리하게 계승한 'XXL'로 근본으로 회귀했다. 누군가에게는 트렌디한 뉴트로의 진가를 보여줬고, 누군가에게는 그 시절의 청춘을 회상하게 했다. MZ를 넘어 X세대까지 향유할 수 있는 아이돌의 탄생을 알린 영파씨. 이제 이들이 새로운 근본을 세울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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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플에스와 영파씨의 음악은 결국 연대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때로는 애틋한 공감을, 때로는 속 시원한 대리 만족을 선사한다. 음악에 정답은 없다는 걸 느끼는 지금이다.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넘쳐나는 요즘, 또 어떤 음악이 가요계에 새로운 파란을 일으킬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