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렸을 때 봤던 것을 다시 보았을 때 [문화 전반]

추억을 다시 되돌아보며 느끼는 것들
글 입력 2024.05.27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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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봤던 것을 다시 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연속선 속에서 존재한다면, 연속선이 그리는 변화의 궤적은 무엇인가? 그 변화의 궤적을 바라보는 것을 선택한다면 그것이 단순히 단선형의 직선으로 일어나지 않고 휘어지거나 굴절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과거를 향한 그리움, 향수, 추억, 반대로 거부와 트라우마까지 모두 지금의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와도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취향부터 소나무였던 한 ‘떡잎’은 무언가를 계속 좋아한다


 

어렸을 때 봤던 것을 지금 보면 지금의 내 취향을 형성한 것들의 기원을 알게 된다. 어렸을 때매료되었고 눈길을 확 잡아챘던 것, 인터넷이 지금보다 덜 발달되었고 접근권이 더 없었던 어린 시절 어떻게든 찾아서 ‘덕질’했던 것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게 된다. 어렸을 때 향유하던 문화 요소는 뇌리에 박혀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데, 그 취향이 어린 시절 나를 다른 아이들과 구별하게 하는 개별성의 기호로 기능하기도 했다. 무언가를 계속 좋아하면서 그것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되짚는 일은 그동안 겪었던 변화와 성장을 체감하게 한다. 어린 시절의 취향에 이름 붙이지 못했지만 점점 그 이름을 발명해내고 나 자신을 설명할 언어를 찾는다는 것, 그것은 성장의 한 방법이다.

 

 

 

내가 몰랐던 것을 알게 된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자아연출의 사회학』에서 이 사회 속의 상호작용을 연극으로, 사회적 행위가 발생하는 생활세계를 ‘무대’에 비유하며 연극학적 요소를 사회학적 상호작용의 분석에 가져온다. 배우를 연기자로, 삶을 무대로 비유했던 셰익스피어의 연극 속 대사를 참고했던 그의 이론에는 사회학적 행위자들인 사람들이 ‘인상 관리’를 위해서 일종의 연극을 하며 그 연극을 잘 유지하거나 이것이 연극이라는 것이 깨지는 순간들이 묘사된다. 고프먼의 주장에서 ‘무대 뒤편’은 앞무대에서 일어나는 연극의 주요한 장면과는 달리 역할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다. 관객은 이 곳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만 알지 않는 편이 낫다. ‘무대 뒤편’이라는 비유는 많은 사회 생활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특정 문화 요소에도 적용될 수 있다. 어릴때 무언가를 볼 당시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성장한 지금은 그 곳에는 무대 뒤편이 있고 모두에게 무대 뒷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리얼 버라이어티’를 표방했던 <무한도전>이나 <우리 결혼했어요>, <런닝맨> 같은 예능을 다시 보면 어디까지 짜인 행동이고 틀인지 짐작이 간다. 원하는 ‘그림’을 위한 어느 정도 짜여진 합의는 연극의 암묵적 규악이다. 방송은 실제이면서 실제가 아닌, 과잉된 현실이면서 동시에 만들어진 현실로 존재했던 것이다. ‘각본’이라는 비유처럼 삶에도 각본이 있다. 어린 아이는 나에게만 ‘무대 뒷편’, 비밀이 있다고 인식한다. 하지만 커가면서 다른 이들의 무대 뒤편을 알게 된다. 무언가를 상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커가면서 생긴 것이다. 하지만 내가 몰랐던 것이 아주 크나 큰 기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과거에 저항하게 될 수도 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다’ 라는 수사는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지시한다. 살아보며 알게 되는 진실 중 하나는 현실 세계는 동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내가 아무런 의심 없이, 아무런 비판 없이 보았던 것이 사실 억압과 혐오를 숨기고 있던 것이라면 그것을 한때 좋아했던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문화 텍스트 내부적인 요소로 인한 것이든 창작자 같은 외부적인 요소로 인한 것이든 그것을 다시 마주하는 지금 시점에서 균열을 발견하게 된다면 인식론적 충돌을 견뎌야 한다. 현재의 나라는 존재가 과거의 문화 요소가 가진 특성에 저항하거나 경합하고 전유하는 복잡하면서도 다양한 반응와 그 속 정동들은 ‘시대’가 무엇보다 빨리 변하고 있는 지금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많은 이들이 택하는 방안은 ‘삭제’의 욕망이다. 텍스트의 문제점을 삭제하거나 그것을 사랑했던 나를 삭제한다. ‘정준영 사태’ 이후로 <1박 2일> 시즌 3가 정준영을 모자이크하고 음성을 지운 유튜브 영상을 통해 방송 VOD 서비스를 대신한 것처럼 말이다. 사실 이러한 ‘삭제’라는 방법론은 일시적 해소이자 봉합이지만 모든 것을 해결하지는 않는다. 이 텍스트가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문제적이었는지 지우기 때문이다. 반대로 누군가는 결점을 무시한 채 예전처럼 수용하고 그 결점을 인식하지 않으려 한다. 또 누군가는 과거의 텍스트 중 일부 화소를 탈맥락화시켜 유희로 삼는다. 이렇게 다양한 반응은 어찌 보면 소비주의 시대의 여러 유형 중 일부라고 볼 수 있는데, 거대한 구조의 이야기와 그 속의 나라는 위치를 정확히 응시하고자 하는 의지 없이는 그 무엇도 완전하지 않다.

 

 

 

우리의 복잡한 취향들을 과거와의 연결 속에서 읽기


 

어린 시절을 향한 추억은 많은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환상이다. 환상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여러가지 방법은 환상과의 일치와 희망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부조화와 불화에서도 온다. 희망을 비롯하여 환멸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유용한 방법이다. 과거의 경험들이 구성하는 나 자신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어린 시절’에 보았던 것을 되돌아보는 것은 지금의 나의 모습이 보여주는 복잡성을 이해하도록 하는, 이해할 기회를 주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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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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