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키메라', 과거와 현재의 관계 맺기 [영화]

'발굴'과 '봉인', 그 사이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은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글 입력 2024.04.3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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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신작 〈키메라(La Chimera)〉의 주인공 아르투는 사람들과 함께 Y자로 생긴 나뭇가지로 땅 밑의 오래된 무덤을 감지하고 그 안에서 발견한 부장품을 팔아넘겨 생계를 유지하는 도굴꾼이다.

 

유적 도굴꾼 집단인 ‘톰바롤리’ 일행들이 스파르타코와의 부장품 밀매를 통해 일확천금을 꿈꾸는 것과 달리 아르투는 금전적 이익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르투의 도굴 행위는 잃어버린 연인 베니아미나를 되찾으려는 그의 욕망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죽은 자의 무덤을 열어 수백수천 년간 봉인되어 있던 그의 역사를 온전히 느끼는 반복적인 경험은 아르투에게 돌아오지 않는 과거의 사랑과도 분명 다시 연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준다.

 

베니아미나의 엄마인 플로라도 아르투처럼 사라진 딸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는 깨끗한 새집을 마련해주겠다는 다른 딸들의 제안에도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올 베니아미나를 맞이하기 위해 사람이 살기 어려울 만큼 낙후된 저택에서 계속 살아가기를 고집한다. 그러나 플로라의 저택은 베니아미나의 기억에 존재하는 과거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지 못한다.

 

플로라는 추운 집을 데우기 위해 쓰지 않는 나무 의자를 부수어 장작으로 태우고, 그의 딸들은 엄마의 안부를 묻기 위해 왔다가 자기가 쓸 만한 물건들을 챙겨 집으로 돌아간다. 점차 훼손되어 가는 그의 저택은 마치 봉인이 해제되어 도둑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무덤 같다. 외부인의 발자국이 가득한 무덤에서 죽은 자의 영혼이 편히 쉴 수 없는 것처럼, 베니아미나도 많은 것이 사라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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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라의 시중을 들며 오페라를 배우는 이탈리아는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과거를 대하는 인물이다. 봉인된 무덤 속 부장품을 팔아넘기는 아르투와 톰바롤리 일행들이 파괴자(destroyer)라면, 폐역사를 집으로 고쳐 쓰고 버려진 나무토막으로 의자를 만드는 이탈리아는 창조자(creater)다. 이탈리아에게 과거는 현재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소중한 과거는 보존을 통해 어떻게든 지켜내야 하고, 버려진 과거는 재창조를 통해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이탈리아와의 사랑은 아르투가 도굴 일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는 시점과 맞물린다. 아르투는 기존 무덤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규모의 무덤 안에서 물고기를 안은 에트루리안 여신의 조각상을 보고 그것의 엄청난 가치를 단번에 직감한다. 그러나 경찰에 쫓기는 줄 알았던 톰바롤리 일행들은 급한 마음에 조각상의 머리를 잘라버린다. 이후 톰바롤리는 선상에서 부자들을 대상으로 조각상의 경매를 진행하는 스파르타코를 찾아가 여신의 머리를 거액의 돈과 맞바꾸려 하고, 아르투는 무덤의 주인을 위해 만들어진 이 아름다운 조각상의 온전한 모습을 그 누구도 볼 수 없도록 조각상의 머리를 바다에 던져버린다. 아르투가 개봉된 무덤은 과거를 온전히 품을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아르투는 에트루리안 여신의 조각상 사건을 계기로 톰바롤리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뒤 결국 돌아오지 않는 옛 연인 베니아미나와 재회하는 데 성공한다. 동네 남자들의 요청으로 공사 현장에 있는 무덤에 들어갔다가 입구가 무너져 홀로 갇혀버린 그는 그곳에서 베니아미나의 옷에서 풀려나온 빨간 실을 발견한다. 영화의 초반엔 베니아미나를 꿈을 통해 멀리서 바라만 보던 아르투는 영화의 끝에선 베니아미나의 피부를 직접 만지고 그와 따스한 포옹을 나눈다.

 

그토록 많은 무덤을 파헤치며 살아온 그가 현실로 돌아가는 문이 사라졌을 때 비로소 잃어버린 연인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이는 과거란 역설적이게도 현재의 이해와 단절되었을 때 비로소 그 자체로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고, 현재의 우리와도 온전히 연결될 가능성을 지닌다는 영화의 메시지와 직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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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어떤 태도로 과거를 대해야 할까. 이익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렇게 가만히 두는 것이 맞을까. 이 질문에 정답은 없다. 톰바롤리는 과거를 돈으로 환산하기 위해 토스카나 고대 선조들의 무덤을 잔뜩 파헤쳐 놓았다. 입구를 여는 순간 무덤 속 그림은 색이 날아가고 각종 부장품은 부패했지만, 그 덕에 아름답고 위대한 유물들은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아르투가 베니아미나를 만났듯이 지나간 것들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관계 맺는 올바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는 언제나 찰나의 순간일 뿐인 현재의 삶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어온다. 발굴된 과거의 가치와 봉인된 과거의 아름다움 둘 중 어느 쪽을 택할지 고민하는 것은 어쩌면 이러한 세상의 규칙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인간이 평생에 걸쳐 해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인생의 과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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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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