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선과 악의 경계가 희미해질수록 더 분명해지는 것 [영화]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글 입력 2024.03.2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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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골자는 간단하다. 도시에서 떨어진 작은 산골 마을에 글램핑장 설명회가 열린다.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아서인지 마을의 모습은 보다 자연과 가깝다. 그러나 마을이 보조금을 얻기 위한 연예 기획사의 신사업 먹잇감으로 낙점되면서 지역 주민들과 담당자 간 갈등이 발생한다.

 

마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주민 타쿠미와 그의 딸 하나 그리고 글램핑장 건설을 위해 마을에 발을 들이게 된 기획사 직원 타카하시, 마유즈미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하류에 쌓이고 쌓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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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와 주관적인 해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줄거리는 다소 단순하지만 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에 명백히 문제의식이 담겨있다. 특히 마을 회장이 설명회에서 설파한 ‘상류에서 한 일은 반드시 하류에 영향을 준다’는 구절이 대표적이다. 두 담당자는 마을을 상생 협력 파트너라 칭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일방적인 것처럼 보인다. 회사는 오물과 산불 등 건설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주민의 피해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허점 많은 계획을 하루빨리 실행에 옮길 생각뿐이다.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다.

 

해당 대사를 통해 상류, 즉 자신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도시가 벌이는 행동들이 쌓여서 하류의 마을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점을 짚는다. 그리고 이 지점은 비단 작중 도시와 시골 간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상류와 하류, 도시와 시골의 관계는 곧 인간과 자연의 차원으로 옮겨간다. 그러니까 인간이 한 일은 반드시 자연에 영향을 준다. 어쩌면 당연한 사실에 주목한다. ‘그럼 사슴은 어디로 갈까?’라는 타쿠미의 대사로 이는 분명해진다. 계획이 실행되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고통받는 대상은 주민들 이전에 자연이다. 인간은 사슴이 지나다니는 길과 들판을 헤집고 그들이 물을 마시며 쉬어가는 호수에 난입할 것이다. 물론 글램핑장 건설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도 넘은 사냥과 개발로 생태계에 개입하고 자연을 통제하려 드는 인간의 태도 자체를 시사한다.

 

이렇게만 본다면 하류에게는 상류가, 내부인에게는 외부인이, 자연에게는 인간이 악이다. 하지만 영화의 시선은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특정 인물이 선이나 악으로 느껴지려 하면 그 인상을 전복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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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예로, 극 초반의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마을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이기적인 외부인으로 다가오지만 그들은 사실 상부의 지시에 따르는 힘없는 직원들일 뿐이다.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들의 상사 또한 그럴지도 모른다. 반대로 마을을 지키려고 혈안이 된 주민들도 불과 몇 년 전까지는 외부인이었으며 그들의 본질 역시 자연에 개입한 인간 중 하나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동시에 인간과 자연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인물들의 묘사로 선과 악의 구분을 더욱 흐린다. 이 모호함은 몇몇 장면들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먼저 아이들이 순수하게 웃으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던 모습을 생각해 본다. 고요하게 멈춰있는 그들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는 나무를 연상시킨다. 타쿠미와 하나도 때로는 인간, 때로는 자연의 일부같이 보인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타쿠미와 먼 곳을 응시하는 하나의 얼굴은 사슴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타쿠미의 단절된 대화 방식 역시 인간의 일반적인 소통과 거리가 멀어 보이나 이내 그가 나무를 베고 도끼질하는 모습이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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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영화는 다양한 수단을 통해 선과 악의 경계는 희미하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경계를 알 수 없다는 것은 도리어 악은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자연에게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이 아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자연의 법칙대로 상류에서 한 일은 하류에 쌓이고 또 쌓인다. 선악은 모호하지만 결과는 분명하다. 사냥과 개발이라는 행위 자체는 악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단한 악의를 갖지 않았더라도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인간이 한 행동의 결과로 남는 것은 하류의 오염, 그러니까 파괴된 자연이다. 선과 악 사이의 수수께끼를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선택은 아마 우리가 자연에 초래한 결과를 직시하고 두려워해야 하지 않냐는 물음을 뚜렷이 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자연에게 선악의 구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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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 영화가 자연을 묘사하는 방식이 위 물음에 과중을 싣는다. 초반부의 롱 테이크가 가장 인상적이다. 땅에서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보이는 숲의 모습을 담은 장면이지만 가지들 사이의 여백에 집중하면 마치 바깥에서 내려다 본 지구의 표면이 보이기도 한다. 그 거대함이 경외롭게 다가오면서 결코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질서에 대해 명심하라는 목소리가 느껴진다. 무심코 인간이 자연보다 우위에 있다고 착각하며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어설프게 행동하는 우리에게 던지는 경고일 수도 있다.

 

종종 등장하는 특이한 시점의 숏 역시 메시지에 무게를 더한다. 시선의 당사자가 없는데도 차의 후미에서 창밖을 쳐다보는 시점을 찍음으로써 마을과 숲의 모습을 관조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또한, 땅 와사비와 사슴 사체의 위치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시점의 숏을 통해 외부인으로서의 인간을 상기시키는 듯하다. 인간과 자연이라는 서로 다른 두 세계 간에는 넘지 말아야 할 경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장면들을 모두 지나 마지막에 다다르면,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진다’는 대사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타카하시는 인간과 자연의 경계에 서 있는 타쿠미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의중이 어떻든 자연에게 그는 정도를 벗어나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으려 하는 파괴자로 여겨졌을 뿐이다.

 

다시 한번 분명해진다. 자연에게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초래한 결과는 거대한 자연의 질서에 따라 언젠가 우리를 덮쳐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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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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