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흔하고 흔하지 않은 이야기 -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글 입력 2024.03.22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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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상상력이 절실한 지금이다. 자연은 순수를 혐오한다는 말처럼, 공감과 다양성의 가치를 알고 행함은 외면할 수 없는 과제가 됐다. 어느 때보다 다양한 것들이 발아하고 사멸하는 모순의 시기에 구원의 상상은 어디에 잠들어있을까.


이따금 영화 <정말 먼 곳>의 시 수업 장면을 떠올린다. 고정관념을 쉽게 깨트리려면 거대한 상상보다 간단한 편집을 이용하라는 말. 핸드폰을 꺼낸다. 던진다. 부숴버린다. 주어와 어울리는 서술어를 나열하고, 주어를 전혀 다른 것으로 바꾼다.


가을을 꺼낸다. 던진다. 부숴버린다.


간단한 말 바꿈으로 근사한 시를 지어낸 아름다운 장면이다. 근사하다고 하니 어쩔 도리 없이 사랑이 떠오른다. 사랑으로 문장을 만들어볼까. 여자가 남자를 사랑한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 똑같이 주어를 바꿔본다.


여자가 여자를 사랑한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한다.


새로운 상상은 이다지도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머릿속 관념에서 현실로 넘어오는 과정은 그만큼 복잡하지만. 중요한 건, 시끄러운 논의 속에 가려졌을 뿐 매우 오랜 역사 동안 현실을 살아온 퀴어들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과 퀴어의 관계는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주장한 콜럼버스와 오랜 시간동안 먼저 생활한 원주민의 관계성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퀴어의 이야기는 예전부터 존재했고, 지금에서야 조명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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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는 ‘새로운 상상력’의 작품들과 궤를 같이한다. 연극은 재은과 윤경이라는 두 여성의 생애를 담는다. 그 속엔 단짝 친구로 만난 두 여성이 연인이 되고 가족이 되어 자신들만의 안온한 울타리를 만드는 과정이 담겨있다.


연극은 쉽게 찾아보지 못하는 구조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한 레즈비언 가족의 생애를 백여 년이라는 시간성으로 표현하는 점에서 그렇다. 대부분의 퀴어 서사는 불같은 한순간을 조명한다. 퀴어라는 위치가 자아내는 내면과 세상과의 불화는 극적 서사의 재료로 쓰이기에 더할 나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금해진다. 삶은 한 순간의 번쩍임이 아닌데. 별똥별 같은 찰나에만 존재할 순 없는 것인데. 그 외적인, 그러니까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잔잔한 크기의 시간은 퀴어에겐 부재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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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살아가는데 앞선 이들의 발자취를 확인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선택에 대한 격려가 되기도, 감정에 대한 허락이 되기도, 어려움을 해결할 힌트가 되기 때문이다. 당장 30대 40대의 삶도 상상할 수 없다고, 그들은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젊은 퀴어가 많다. 다양한 혐오와 고민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겐 명료하게 관측할 수 있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가 퀴어의 시간성에 주목한 이유일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제목을 차용한 연극은, “명백한 사랑 이야기인 동시에 사랑으로 명명되지 못한 현실을 들여다보고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한다.


나는 100여 년 이라는 시간성에서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퀴어의 이야기는 사랑인 동시에 사랑으로만 환원해서는 안 되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사랑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과 더불어, 모든 게 사랑으로만 일컬어지는 과잉된 대상화 역시 경계해야 할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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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는 사랑을 적극적으로 말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연극이라고 믿는다. 아직 사랑이란 언어가 포함하지 못하는 사랑을 발굴할 것이고, 사랑만큼 중요한 사랑 외적인 언어들을 조명하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명명으로서의 퀴어를 넘어, 결국 타자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모든 개인들의 형상이 될 것이다. 끊임없는 부조화 속에서 100년이라는 지난한 시간을 살아온 인물의 이야기는 모두에게 필요한 상상이다.


오는 3월 31일까지 국립정동극장에서 생생하게 그 상상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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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2000년에 태어난 재은과 윤경.

2007년에 만난 두 사람은 단짝 친구에서 연인으로,

연인에서 가족으로 살아가며 2099년까지의 시간을 함께 통과한다.

오래된 동네 빵집 앞에서,

하나뿐인 딸 재윤의 생일 초 앞에서,

40도가 넘는 열대야의 밤을 지나며

두 여성이 서로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삶의 궤적을 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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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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