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수학이라는 렌즈로 예술 마주하기 -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

글 입력 2024.03.21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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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은 1부에서는 채호기 시인이 분석한 이상남 화가의 작품관이 주된 내용이며, 2부에서는 채호기 시인과 이상남 화가의 대담이 이어지는 구성이다.


이때, 채호기 시인은 주로 수학적 기호들을 도입하여 여러 요소들을 분석한다. 특히,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층위에 대해서는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사영 기하학'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재미있는 점은 2부의 인터뷰에서 이상남 화가는 이러한 기하학에 기댄 해석은 이제는 '낡은 방법'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한 작품을 두고도 여러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은 예술의 묘미다. 특히, 서로 다른 전공을 가진 예술가들이 '수학'을 통해 소통하는 것은 보기 드문 장면이다. 다만, 두 사람의 모든 의견을 이해하기에는 모호하고 난해하고 어려운 부분이 있어 풀어서 작성해 본다.

 

 

그리되그리지-표1띠.jpg


 

 

# "직선은 죽음, 원은 삶" 그리고 비유클리드 기하학


 

서문에서 잠시 언급한 非유클리드 기하학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여집합 격이다. 그렇기에 설명을 위해서는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기원전 그리스의 수학자 유클리드는 당시까지 밝혀진 수학적 지식을 집대성한 '원론'이라는 저서에서 기하학에서 지켜야 하는 다섯 가지 공준에 대해 발표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어떠한 점에서 어떤 다른 한 점으로 선분을 그릴 수 있다.

(2) 임의의 선분을 선을 따라 다른 선분으로 연장할 수 있다.

(3) 어떤 한 점을 중심으로 하고 이에 대한 거리로 하나의 원을 그릴 수 있다.

(4) 모든 직각은 서로 같다.

(5) 두 직선이 한 직선과 만날 때 같은 쪽에 있는 두 내각의 합이 두 직각보다 작으면, 이 두 직선을 연장할 때 두 직각보다 작은 내각을 이루는 쪽에서 반드시 만난다.

 

 

이후 약 2000년이 지난 19세기에 들어서서야 이 법칙에 예외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는데, 유클리드가 제시한 공리 중 하나 이상이 해당하지 않는 기하학을 두고 非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칭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구면 기하학이 있다.

 

구면 기하학은 지구본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구본 위에서 임의의 한 점을 잡고 90도의 각도로 선을 2개 내린다음 그 반대쪽에서 선을 그어 삼각형을 만들면 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가 아닌 270도(모두 직각이므로)가 된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평행선은 절대 만나지 않는다고 알려졌지만, 이 기하학에서는 구체의 양 끝에서 평행선이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는 마지막 공준을 벗어난 것이다.

 

최근 SNS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는 최진영의 '구의 증명'은 이 구면 기하학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의 증명'은 사랑해서는 안되는 운명의 한 연인이 두 번의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을 겪으며 일어나는 기괴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소설에서는 두 개의 평행선의 끝과 끝이 죽음을 통해 서로 감응하고 그 사이에서 다시 새로운 평행선이 시작되는 돌고 도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이는 채호기 시인이 설명하는 이상남 화가의 '직선은 죽음, 원은 삶'이라는 말과 상통하기도 한다.


 

화가는 "직선은 죽음이다. 원은 삶이다"라는 말을 여러 번의 인터뷰에서 반복해서 하고 있는데, 이때 죽음은 삶의 결과나 완성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다. 완결된 질서에서 떠나 새로운 질서를 찾아나가는 출발로서의 죽음을 가리킨다. 하나의 체세포가 죽고 새로운 세포가 만들어짐으로써 우리 신체가 성장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은 하나의 질서로 세워진 삶이면서 한편으로 정체되고 닫힌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고, 반대로 선은 삶에서 이탈하는 죽음이면서 정체된 것을 뚫고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삶이기도 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화가의 말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책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 中

 

 

 

# 삶의 여러 층위를 하나의 화면으로 옮긴, 그리고 사영 기하학


 

또한, 채호기 시인은 일반 회화가 주류가 아닌 시기를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회화를 고집하는 이상남 화가의 비주류적 면모를 비유클리드적 기하학에 빗대어 표현한다. 특히, 그 중에서도 '사영 기하학'을 언급하기도 한다.


 

다각형 그림은 노란 원 속의 세계를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선 잠재적인 층위와 현실적인 층위의 관계, 그리고 잠재적인 층위의 기능을 표상하고 있는 노란 원에 주목해보자.


노란원은 사영기하학에 기초하고 있다. 알다시피 사영 기하학은 유클리드기하학의 하나의 공리를 무너뜨리면서 비유클리드 공간을 사유하게 함으로써 유클리드기하학과 비유클리드기하학을 포괄하는 기하학이다.


유클리드 공간에서 평행한 두 직선은 영원히 만나지 않는다. 그러나 무한대 개념을 추가한 사영기하학은 평행한 두 직선이 무한대에 위치한 원점인 무한 원점에서 만난다고 정의했다. 이는 실재하지만 현실화되지 않아 우리 눈으로는 지각할 수 없는 세계인 잠재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처럼 노란 원은 실재하지만 우리가 볼 수 없는 잠재적인 세계를 표상한다.


책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 中

 

 

사영 기하학은 공간 상에 있는 선들을 임의의 평면에 배치하는 것을 말한다. 공간 좌표들의 그림자를 옮긴 것과 비슷하여 射影이라는 한자를 빌리고 있다. 예를 들어, 4차원은 직접적으로 나타낼 수 없으니 풀이하기 위해서 3차원에 나타내는 데에 쓰인다.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에 설명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혼란스러운 이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유클리드 기하학은 큐브처럼 유한한 공간이다. 이때, 사영 기하학에서는 무한한 공간을 전제하기 때문에 인지할 수는 없지만 무한히 먼 어디엔가는 평행한 두 직선이 만나는 곳이 있게 된다. 그림을 그릴 때 주로 활용하는 '소실점'의 개념과 비슷하다.

 

참고로 이 리뷰에서는 자세히 다루진 않겠지만, 사영 기하학은 미술의 발전에서 원근법, 그리고 카메라의 발전 등과 많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상남 작가의 그림을 보면, 여러 개의 레이어(층위)에 있는 도형들을 평면에 하나로 나타낸듯한 작품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를 더 높은 차원의 도형을 더 낮은 차원으로 그리고 설명할 수 있는 사영 기하학에 빗대어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아쉬운 점은 기하학에 대한 설명이 다소 모호하고 난해하여 혼란스럽다는 점이다.

 

 

 

# 예술로서의 노동, 노동으로서의 예술 그리고 미적분


 

이상남 화가는 "편집의 세계에선 재현 또한 전략적 행위"라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서는 '오차'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무수한 노동의 결과다. 특히 책에는 여러 사람이 묘사하는 그의 작업 방식도 담겨있었다. 그 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점이 표면을 칠하고 매끄럽게 깎아내는 작업을 지리하게도 반복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이상남이 제작한 기호는 천여 개에 이르는데, 천여 개의 기호는 천여 개의 원 데이터가 되며 원 데이터를 확대, 축소, 변형, 증식하는 디지털 편집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편집 과정을 제외한, 원 데이터의 제작과 가공된 데이터 이미비를 색면 배치로 캔버스 위에 켜켜이 쌓는 제작 과정은 다분히 아날로그적 온기를 지니지만, 그 결과물로서의 표면은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기계적 세려미와 완성도를 거두며 디지털 시대의 감수성을 저격한다.

 

수십 회에서 백여 회에 이르는 표면 칠하기와 매끄럽게 문지르기의 엄격하며 노동집약적인 반복은 두께를 품고 있으나 동시에 시종일관 두께를 부정하며 평면성으로 환원하려는 편집적 투쟁으로(...)


책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에서 재인용

 

 

채호기 시인은 이상남 화가의 작품들을 단순히 '회화'로 보고, 설치나 미디어아트가 주류를 차지하는 요즘 시대에 이상남 화가는 회화를 고집한다고 표현했다. 나는 이 점에 대해 생각이 다소 다르다. 묘사된 이상남 화가의 작업방식을 고려해보면 오히려 설치나 공예와도 비슷한 점도 있다.

 

공예의 장르적 특징은 '노동'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예술을 취미로만 여기고 작품을 만드는 데 드는 시간이나 체력, 정신력 등의 비용을 간과하곤 한다. 그러나 예술가들에게는 그 행위 자체가 노동이고 동시에 돈벌이이기도 하다.


이상남 화가의 작품들은 100호가 넘는 대작인 경우가 많다. 특히, 그는 수학적 도형을 컴퓨터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그려내고, 이후 완벽한 화면을 위해 수 없이 깎아낸다. 이 과정은 도공이 도자기를 빚어낼 때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인지 작품을 직접 보고 퐁티적으로 해석해 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또한, 채호기 시인의 말처럼 회화를 고집했다기 보다는 이상남 화가가 스스로 추구하는 편집적 절제미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르가 회화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변동값에 주목하는 미분과 적분을 이용하여 덧바른 젯소와 긁혀 나간 젯소의 값을 통해 이상남 화가의 노동력을 예측해볼 수 없을까?라는 이상한 상상을 하며 글을 마친다.

 

 

[신동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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