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희망 없음을 부정하지 말기 - 나의 올드 오크 [영화]

글 입력 2024.03.0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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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나의 올드 오크>의

줄거리 및 내용 일부에 대한 묘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정.jpg

 

 

<나 다니엘 브레이크>와 <미안해요, 리키>의 감독 켄 로치의 신작 <나의 올드 오크>는 탄광이 폐쇄된 후 쇠락한 영국의 외곽 마을에 시리아 전쟁 난민이 유입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선술집 올드오크의 주인인 TJ와 사진작가가 꿈인 난민 소녀 야라의 관계 맺음 과정을 중심으로 기존 마을 사람들과 난민 간의 갈등과 연대를 표현했다.

 

갈등과 연대. 그 둘을 우리는 다른 것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연대는 늘 갈등을 포함하는 개념이곤 한다. 그러나 <나의 올드 오크>는 갈등과 연대를 분리시켜 버렸고 그 점에서 아쉬움이 남았다.

 

 

 

차별하기와 차별받기의 혼잡함


 

반년간 교환학생으로 독일과 인근 유럽 국가를 돌아다니며, 흔히 인종차별이라고 하는 것들을 적지 않게 경험할 수 있었다. 가장 보편적인 것은 ‘니하오’ 였다. 나의 얼굴을 보고 나의 국적 및 민족성을 마음대로 평가하는 것은 대표적인 인종차별의 래파토리다. 이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니하오’는 인종차별 표현임을 모두 주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의도성만 보더라도 이것이 고약한 마음에서 비롯된 표현임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고민이 되었다. 주로 나의 인종차별 경험을 백인인 독일인 친구들에게 털어놓으면, 그들은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매우 교양 없음을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말은 참 맞았다. 교양 있는 다수의 시민은 외국인에게 친절하거나 도움을 제공하지 다짜고짜 인종 및 종교, 성별과 같은 속성을 근거로 누군가를 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양 없음은 또 무엇일까. 나에게 ‘니하오’라고 했던 사람들을 돌아보면 다수는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지 않을 것으로 추측되는 사람들이었으며 백인이 아닌 경우가 더 많았다. 교양있고 이주민을 친절하게 대하는 교육받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인간들 앞에서 나는 이 버릇없는 인간들에게 차별당한 것을 말하기 어렵게 느껴졌다. 그들을 비판하자면, 그들의 교양 없음을 주조한 이 사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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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도 난민의 유입을 모두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노골적인 혐오표현으로 난민들을 괴롭히거나 잠재적 범죄자, 혹은 마을 공동체를 해치는 집단으로 대하는 은근한 태도를 지닌 사람들도 다수 등장한다. 이러한 논쟁은 마을 사람들 간에도 벌어진다. 누군가는 좀 더 호의적이며 누군가는 매우 적대적이기에 이 간극 사이에서 마을 사람들이 난민의 유입이라는 사건에 대해 공동체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합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가장 노골적으로 폭발하는 것은 올드 오크에서 TJ의 오랜 친구이자 고객들이 모여 나눈 대화에서였다. 결국 가난한 도시에서 난민을 수용하게 된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 갑자기 준비 없이 늘어난 학생들 때문에 수업의 질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걱정. 친구들 간에도 미묘한 입장 차가 존재했다. 누군가는 난민의 존재 자체를 적대시했으며, 누군가는 어쨌거나 발생하고 있는 혼란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또 누군가는 그럼에도 그들이 매우 안타까운 상황에 놓인 것만은 맞다고 말했다.

 

나는 이것을 단순히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푸념으로 일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 중 다수는 실제로 정치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맞으며, 현실에서 그런 이들의 존재가 유의미하게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포기하고서는 어떠한 더 나은 미래도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난민을 혐오하고 인종을 차별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 사람에게 깊은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문제만이 아니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렇기에 영화 후반부에 올드 오크의 공용공간에서 난민을 내쫓겠다며 그 공간 자체를 누전시킨 TJ의 옛 친구들의 모략이라는 절정에서의 설정은 무척 아쉽게 다가왔다. 더욱이 그러한 상황 이후에 TJ가 조용히 다그치기만 하고 그들이 더이상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혐오범죄는 실재하며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들조차 자신들의 정당성 하에 가해자가 될 수 있음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관객으로 하여금 그 옛친구들을 더이상 사고하지 못하게-즉, 단호하게 욕을 해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리고- 만든 뒤 공동체에서 그들을 추방한 것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TJ의 옛친구들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어쩌면 그것이 우리의 일면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운동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마라와 TJ.jpg

 

 

TJ는 반려견 마라가 대형견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을 겪게 된다. 그리고 마라의 죽음을 계기로 TJ의 과거사 일부가 야라와의 대화 속에 언급된다. TJ는 강성했던 탄광노조에서 활동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탄광 폐쇄 이후 기울어간 마을 공동체를 재건하기 위한 활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그렇게 ‘바깥으로만 도는’ 그를 견디지 못한 가족과는 불화를 겪었다.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으며 하나뿐인 아들 역시 그와 만나기를 꺼려한다. 이 시기 열심히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마을, 가족의 붕괴, 점점 악화되는 재정 상황 속에서 그는 자살을 시도한다. 그때 자살 시도롤 멈춰준 것이 강아지 마라였다. 이를 통해 TJ가 사회운동에 참여한 것이 TJ의 삶을 실질적으로 위기로 몰아갔음을 추측할 수 있다.

 

사회운동에 대한 참여가 개인에게 남길 수 있는 일반적인 것들. 이를테면 가난, 운동 외 사람들과 관계 맺기의 실패, 사회로부터의 낙오, 건강의 악화, 가족의 외면, 전망의 부재, 해소되기에 늘 실패하는 깊은 우울감 같은 것들. 그것은 실재하며 다수 활동가들의 처지를. 그것들을 거대한 운동 앞에 투사가 감수해야할 것으로 일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선택하고 또 선택당한 자들이 경험하는 구체적인 삶의 곤란은 운동이 개인에 전가한 것일 수도, 우리가 지금까지 운동을 잘못해 온 것일 수도, 운동하는 쪽은 늘 쪼들리는 편이기 때문일지도, 혹은 그 총체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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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랬던 TJ가 자신의 상처를 다시 운동의 전면에 나서는 것으로 풀어낸다는 것은 충분히 섬세하지 못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TJ는 오래된 친구들과는 합의점을 만드는 데에 실패했고, 아들과는 여전히 연락하지 못한다. 야라를 포함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는 것은 분명 TJ에게 계기가 되어줄 수는 있지만 TJ는 자신이 2년 전 겪었던 문제를 또다시 반복할지도 모른다. TJ는 바뀌었는가. 그가 미처 바뀌지 못했음이 사회운동의 성찰 지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희망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용기와 희망.png

 

 

그러면서도 희망을 너무 전면에 내세워서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희망을 전면으로 내세워야 한다는 것은 지금 희망이 없다는 걸 들켜버리는 모양새 아닌가. 실재하는 갈등을 우회하고 던진 희망이라는 메시지는, 그렇기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물론 노동계급의 문제에 천착하던 그가 현사회를 함께 바꾸어나갈 집단으로 이주민과 난민에 주목한 것은 고무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또한 국민국가 내 노동계급의 문제를 다룬 그의 앞선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미안해요, 리키>의 경우 그들이 처한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고발적 성격을 충분히 띨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이주민에 대한 혐오와 그를 둘러싼 갈등을 같은 방식으로 묘사하는 것은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음이 사실이다. 좀 더 단호하게 지상에 어쩌다 떨어진 우리가 함께 살 수밖에 없음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현재 존재하는 무수한 이주민과 난민들의 처지를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루쉰의 말대로 희망이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니 기왕지사 그것이 있는 것처럼 태연히 사는 길이 희망을 만드는 것일 수도 있겠다. 누구 하나 우리 앞에 놓여진 혹은 놓여져야 할 전망에 대해 말하기 힘겨워하는 시대에 이렇게 사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희망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놓여 있는 조건들을, 함께 하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세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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