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나는 속도에 질려버렸다. 나무의 시간을 살고 싶었다. - 내 속에는 나무가 자란다

글 입력 2024.02.27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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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속도에 질려버렸다. 나무의 시간을 살고 싶었다.”


“나무의 시간”이란? 현재를 즐겨라, 순간을 움켜쥐어라, 지금을 살아라.

 

우리는 속세를 벗어나기 위해 숲으로 향하곤 한다. 작가의 삶은 마감에 쫓기는 삶이었다. 시간과 달력이 있는 삶. 작가가 “나무가 되고 싶을 정도로 나를 궁지에 몰아붙인 것은 다름 아닌 소음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세상의 자극이 크게 느껴지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작가가 나무를 향한 사랑은 단순한 해방이 아니었다. 나무를 인간으로 보고. 나무를 자식처럼 생각하고. 그녀의 삶은 진정한 나무가 되기 위한 여행이었다. 이 책은 작가의 나무가 되기 위한 여행기를 담았다.


작가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나는 어떤 나무가 되고 싶은가?”


“나는 도시 생활에 숨이 막혔다. 교실, 교직원실, 사무실, 극장 쇼핑몰, 시장, 버스, 기차, 그리고 기차역 등 이 모든 공간에서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과의 접촉을 피해 달아나고 싶었다."


작가는 ‘해방’과 ‘자유’를 원하며 나무를 꿈꿨다. 나무는 다양한 것에 비유된다. 그러나 여성은 꽃으로 비유된다. “꽃으로 비유되는 것은 분명 여성의 얼굴이었다. 총명함에 감탄하면서도 그걸 꽃이라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작가는 여성이 꽃으로만 비유되는 점을 분명히 비판했다. 세상의 모든 나무는 화장하지 않으며 작가는 그런 나무처럼 각종 사회적 위치의 꼬리표에서 해방되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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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프네 이야기>에서 큐피드는 자신을 놀리는 아폴론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폴론에겐 사랑에 빠지는 화살을 그가 사랑하는 다프네에겐 사랑을 피하는 화살을 쏘았다. 다프네는 구애하는 아폴론에게서 도망치다 결국 나무가 되었다. 


작가는 이처럼 궁지에 몰린 여성이 성폭행을 피하려고 식물로 변하는 이야기를 하나씩 읽을 때마다 인도 언론에서 끊임없이 언급하는 니르바야(남성 여섯 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의 이름) 사건이 반복해서 떠올랐다고 한다.


“나무가 시각적으로 드러나 성적인 부분이 없는 점도 내가 인간들보다는 나무와 함께 있을 때가 더 편한 이유다.”


인도에서는 명예 살인이 매우 흔한 일이어서 가족들의 뜻을 거스르고 결혼을 한 연인들은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어쩌면 작가가 나무와 사랑하고 싶은 건 인도인인 그녀의 굉장히 현실적인 이유에서 기인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와의 로맨틱한 포옹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의 관념을 믿어서 사랑을 하는 게 아니다. 그게 무엇이든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 사랑할 뿐이다.”


작가는 만약 자신이 나무가 된다면 성관계를 못해서 아쉬울까? 하고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낭만적인 사랑에 익숙해진 탓에 상호주의 욕구가 만족되지 못할 것에 아쉬움을 표했다.


샤라냐 마니반난의 산문시 “반얀트리 같은 남자친구를 갖고 싶다”에서 반얀트리는 침묵 속에서 연인에게 하듯 나무가 땅에 몸을 비벼대고 뿌리처럼 서로 얽혀있다고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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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인간관계를 틀어지게 한 것은 상호주의 욕구다.”라고 작가는 말했다. 그녀는 낭만주의를 원하지만 동시에 그런 인간의 연인에 지쳐있는 상태였다. 반얀트리처럼 서로에게 무엇을 원하지 않은 채 그저 얽혀있고만 싶어 했다.


“움직여야 살아있는 것이라는 관점은 대단히 배타적이다.” / “사실상 볼 수 있는 것만 역사가 된다.”


나무는 움직이지 않는다. 숲은 역사에 쓰인 적이 없다. 우리 모두 움직이는 것만이 살아있는 것이라는 관념 속에 살았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관심을 끌지 못한다.”라는 구절을 보면서 어쩌면 나는 보이는 것에 너무 집착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에 보이는 사랑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현시대는 빠르고 쉽게 한 번의 터치로 이모티콘을 보내 사랑을 표현한다. 그러나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만이 사랑일까? 무엇을 원하지도 않고 그저 얽혀있는 반얀트리의 나무는 나에게 사랑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주었다.


 


숲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



“숲 한가운데는 길을 잃은 사람만이 찾을 수 있는 예상치 못한 공터가 있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의 작품


데이비드 왜거너의 시 <길을 잃다> - “고요히 서 계세요. 당신 앞의 나무와 옆에 있는 덤불은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숲에서 길을 잃는다는 건 결국 숲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한다. 인간에게 숲은 집이 아니다. 인간에게 집은 따로 있다. 숲에서 길을 잃는다는 건 다시 집으로 향하는 특정 길이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숲에서 이방인이 된다.


간혹 문학을 보면 정원에서의 간음이나 숲속에서의 관능적 욕구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나무의 존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인간의 축적되고 조건화된 예의와 세련됨을 벗겨내고 야수처럼 변하게 하는 것 같다. 숲의 어떤 점이 인간을 일시적으로 사회적 진화 경로에서 거꾸로 돌아가 더 동물적인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일까?”


작가는 숲은 뭔가를 망각하게 만드는 환각제인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숲은 우리의 영구 거주지가 될 수 없고 책임과 결과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결혼식 전날 밤의 총각 파티와 같은 해방이라고 말한다.


“관리의 부재와 그러한 환경이 가져다주는 자유로움, 수평선까지 펼쳐진 물과 들판에서 느끼는 친근함, 일시적으로 버려진 것에서 오는 아름다움. “방해받지 않는 고요의 평화”와 압도적인 광대함이 혼재되어 있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의 흔적이 없는”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인간의 흔적이 없는 숲속에서 자발적으로 길을 잃는다. 진정으로 길을 잃어야만 숲의 사람이 될 수 있다. 길을 찾는다는 건 아직 인간이라는 것. 자발적으로 길을 잃고 그 속에서 우리는 숲의 동물로 돌아간다. 어쩌면 그것에서 우리는 해방을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어떻게 나무가 되었나


 

인도인인 작가는 부처의 가르침에서 진정한 나무의 삶을 깨우치기도 했다. “인간에게 요구한 탐욕과 욕망, 그리고 고통을 일으키는 모든 것 특히 우리를 통제에 집착하게 만드는 허영심, 이런 것들을 덜어낸 삶이 사실은 나무의 삶이라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작가는 자신의 생각이 때때로 죽음으로 향하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고 삶이라는 캔버스를 채우기 위한 치유법을 찾고 있었다. 그녀는 나무처럼 필요 이상의 것을 원하지 않고 속도와 과잉을 거부하고 나무의 시간에 맞춰 살려고 노력했음에서 자신이 완전히 나무 같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그녀의 어깨 위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을때 그녀는 마침내 나무가 될 준비를 끝냈음을 확신했다고 한다.


이 책은 작가가 인간, 인간적인 것, 인간이 사는 곳을 벗어나 온전한 나무, 진짜 나무, 숲에 사는 나무가 되고 싶은 여행기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나무가 될 준비를 끝냈다. 조금은 나무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정도로 너무 열렬한 사랑에 학을 떼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라도 삶을 이어나가고 싶었던 것 같다. 글쎄 그렇게라도 라는 말이 맞는 걸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데 목표가 있다는 것. 의지할 것이 있다는 것. 그게 나무가 됐든 인형이 됐든 돌멩이가 됐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


밀려오는 시간, 시끄러운 소리들, 휘황찬란한 빛들은 예민한 솜털을 자극한다. 나 또한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길을 잃는 다는 건 온전히 잃을 수 없다면 더 고독해질 뿐이다. 원하는 것을 분명히해야만 한다. 동물이 될 것인가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작가는 나무가 되기로 했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처럼.


해방감을 위해 도망친 숲속에서 우리는 더 고독해진다. 결국 본질을 알아야 한다. 작가는 나무의 본질을 그림, 소리, 언어 등을 통해 파고 또 팠다. 나무를 통해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뇌를 담은 책, <내 속에는 나무가 자란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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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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