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올해의 작가상 2014 - 4명의 작가가 말하는 한국현대미술의 영역

글 입력 2014.09.25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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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올해의 작가상 2014


4명의 작가가 말하는 

한국현대미술의 영역


2014. 8 . 5 ~ 11. 9








국립현대미술관과 SBS문화재단이 함께하는 올해의 작가상은 햇수로 벌써 3년째 진행 중인 행사이다. 한국 현대미술에 새로운 담론을 제시할 수 있는 작가들이 후보로 4명씩 매년 선정되어왔다. 올해의 작가상의 목표는 한국미술의 문화 발전을 도모라고 한다. 이 상은 미술관이라는 장소가 작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수혜 그리고 작가가 미술관에 줄수 있는 수혜가 아닌가 생각된다. 올해의 후보는 장지아, 노순택, 구동희, 김신일이다. 네명의 작가는 모두 각자의 작품세계가 확고하며, 표현하고자 하는 내러티브도 훌륭하다. 먼저 국립현대미술관의 범주안에 들어오게 된 네명의 작가는 각자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시를 통해서 표현해내려고 하였다. 재밌게도 전시장안의 구도는 네 작가 모두 개별적으로 달랐다. 이는 작가의 작품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구도라고 생각한다. 전시는 모두 작가의 신작이 하나 이상 포함되어 있었고, 장지아, 노순택작가는 그동안 작가가 작업해왔던 작업을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나는 장지아, 노순택, 구동희, 김신일 작가의 순으로 전시를 관람했는데 리뷰도 그에 따라서 서술하도록 하겠다. 


먼저 장지아 작가의 경우 전시장 입구에서 부터 19금 이하 출입금지라는 문구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오히려 더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불러일으켯다.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를 먼저 보게 되었다. 작가의 오줌이라는 아브젝트로 이루어진 작품은 정화되어 싹을 틔우는 물로서 작용한다는 것에서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오줌이라는 것을 알고있었지만 전혀 꺼려지지 않았다. 왜그랬을까? 작가의 작업이 아브젝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 그런것일까? 



 장지아,P-tree,혼합재료설치,300x270x300cm, 2007


이 맥락은 영상작업인 와 2000년도에 촬영된 <작가가 되기 위한 신체적 조건 - 둘째, 모든 상황을 즐겨라!> 그리고 사진, 영상으로 이루어진 <서서 오줌 누기>로 이어졌다. <작가가 되기 위한 신체적 조건>은 유투브로 먼저 접한 영상이었다. 영상 속에 장지아 작가는 한 남성에 의해 침으로 공격을 받고, 주먹질을 당하며, 계란을 투척당한다. 이런 끔찍한 상황속에서 작가는 피식 피식 웃고 있었다. 작가조차도 영상을 찍으면서 자신을 공격하게 한 남성이 점점 더 강하게 공격하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촬영이 끝나고 영상을 보자 웃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고 한다. 작가는 스스로 미술계에서 작가가 되기 위한 고행길을 시각화한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사회속에서 ‘무엇’이라는 위치에 자리잡기 위해서 겪는 모든 과정과 비슷한 맥락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서서 오줌 누기>의 영상작업에서는 촬영하는 모델이 웃는 장면을 보고 야릇하지 않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모델은 여성이 서서 오줌을 누어서는 안된다는 사회적 금기에 대한 저항을 한다는 것에서 웃은것인지 아니면 배출의 쾌감을 느낀것일지 혹은 부끄러워서 웃은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오줌이라는 배설물을 분출하는 순간 그녀의 웃음은 사회적 금기를 조롱하는 것 처럼 느껴졌다. 모델들의 포즈는 너무나도 당당했으며 ‘이것을 보아라’라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침과 오줌 피와 같은 아브젝트 소재를 사용하는 장지아 작가의 작업세계가 잘 반영된 작업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장지아, <서서 오줌 누기>, C-print,150x120cm, 2006



더 나아가 <앉아있는 어린 소녀>를 보았다. 이 작품역시 세간에 이슈를 불러일으킨 작업이었다. 나체의 여성과 그 밑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어항속 장어떼를 보는 순간 나 역시 불안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금기라는 소재에 대한 관심이 그녀의 작업을 이어가는 매개체라고 생각이 되었다. 



장지아, <앉아있는 어린 소녀>, C-print,170x150cm, 2009


그리고 전시장 중앙에 아름다운 도구들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 있었다. 퍼포먼스 영상과 설치된 작업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도구들 3(브레이킹 휠)>은 작가의 그동안의 작업에서 알 수 있는 고통과 쾌락의 경계에 대한 물음에 대한 작업이다. 퍼포먼스를 실제로 보지 못해 너무나 아쉬웠다. 영상에서 여성들은 바퀴를 굴린다. 이것은 노동이자 고통으로 보였다. 바퀴에는 깃털이 달려있는데 이 깃털은 여성의 음부를 간지럽히며 쾌락을 준다. 그렇게 바퀴형상의 설치물은 고통과 쾌락을 동시에 주는 존재였다. 영상에서는 노동요를 부르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이 노동요에 대해 알지못한 상태로 들었을때 그것은 숭고한 상황을 불러일으키는 노래 같았다. 이 노래에서 곡은 서양에서 퇴폐적으로 낙인찍혀 중세시대에 금기시된 프리지안 음계이고, 가사는 충북 음성에서 구전되어온 디딜방아타령이라고 한다. 그것을 알았다고 한들 작품이 보여주는 느낌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작가의 작업이 그 소재가 가지는 금기적 특성과 야릇함을 잘 결합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금기에 대한 그녀의 작업은 아브젝트 소재인 피나 오줌, 배설물로 나타나기도 하며, 금기적인 상황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장지아 작가의 작업은 금기라는 것을 ‘미술’로 보여준다. 이것은 ‘미술’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일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우리가 버리고 터부시하는 금기들 아브젝트들을 다시 돌아보게 하며 미술관안에서 작품이라는 맥락으로 만나게 될때 그것을 꺼리지 않게 되는 상황들은 그녀의 작품이 금기라는 것에서 풍기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장지아, <아름다운도구들3(브레이킹휠)>,혼합재료 설치, 크기가변, 2014



다음으로 노순택 작가의 전시장을 보게 되었다. 작가의 작업은 분단 현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관심을 주로 한다. 이번 전시에 공개된 작업에서는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찍어낸 작품을 볼 수 있었다. 작가의 작업은 예술사진의 경계와 보도사진의 경계를 방랑하는 듯이 느껴졌다. 사진을 찍는 군상들의 모습에서 나는 노순택 그가 사진기 렌즈에 눈을 대고 셔터를 누르는 장면을 상상하게 되었다. 전시 제목인 <무능한 풍경의 젊은 뱀>에서 작가가 사진 그리고 분단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전체적인 공간 구성은 <무능한 풍경>과 <젊은 뱀>으로 나뉘었다고 한다. 무능한 풍경의 경우에는 그동안 작가가 촬영해온 우리 사회의 갈등과 충돌의 장면이 담겨있었다. 대추리 강제이주, 용산참사, 쌍용차 살인해고, 밀양 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갈등, 강정마을 해군기지 문제, 천안함 침몰, 연평도 사태, 세월호 참사와 같은 것이었다. 이것들은 사회에서 일어난 문제이다. 이것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을 작가는 무능하다고 말하며 그것을 촬영한 풍경은 참혹하면서도 무능하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작가의 사진이 주는 메시지가 저널리즘과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기반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보도사진의 맥락을 이어가는 것 같다. 하지만 일반적 보도 사진과의 차이점을 느낄 수 있었다. 일반적인 보도사진은 금방 잊혀진다. 그것은 사진이 포착하는 그 풍경을 남기기 보다는 그 사실, 상황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새로운 사실이나 상황이 포착되면 그 이전의 것은 덮혀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순택 작가는 그 저널리즘적 기반을 넘어서서 그 풍경을 촬영하기도 하고, 사진을 찍는 이들을 촬영하기도 한다. 일반적인 보도 사진과의 차이는 작가가 가진 사진에 대한 고민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처음 사진과 마주보았을때 보도사진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허나 그 사진은 단순한 고발이 아닌듯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긴박한 상황은 뜨거운 현장을 보여주지 않고,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 중에서 <얄읏한 공> 시리즈는 평택 대추리 강제이주의 문제와 그곳에 설치되어있는 흰 공 모양의 구조물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정주하 작가의 원전탑을 촬영한 사진을 생각나게 하였다. 그 사진 속에 자리하고 있는 구조물은 사진안의 상황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비상 국가>시리즈는 보는 내내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끼게 하였다. 수많은 전경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집단으로 움직인다. 그 상황에서 끌려가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선명히 보여지고 있었다. 작가의 작업은 견디기 힘든 현실, 내가 살아가는 시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 사건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노순택, <비상국가 #18>, 피그먼트 프린트, 100x147cm, 2006


<젊은 뱀>이라는 맥락에서 작가는 사진이라는 상대적으로 젊은 매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교활한 뱀과 같은 젊은 사진이라는 매체가 표현하는 풍경과 작가 자신의 매체에 대한 진중한 사유를 볼 수 있었다. 사진은 인간의 삶에서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 바뀌어갔다. 작가의 작품은 어떤 증거로서 남아야 하는 사진이 사실은 무엇을 감추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하고 이야기하며 사진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감추는 것을 추리해야한다고 한다. <무능한 풍경의 젊은 뱀> 시리즈는 2013년부터 2014년 사이의 작업들이었다. 그 작업들 중에서는 경찰의 체증과 역으로 그것을 촬영하는 상황을 보여주기도 하였고, 촬영을 막는 용역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사진 속의 상황은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절대 아니었다. 그것은 그 상황을 보여주고 또 감추고 있었다. 사복 경찰은 인권운동가를 체증하다가 역으로 운동가의 카메라에 잡히자 얼굴을 가린다. 이 상황을 문구없이 보았을 때 권력을 가진 자는 촬영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은 인권운동가가 경찰에게 탄압받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사진에서 나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사진이 보여주는 사실과 감추고 있는 것을 파악하라는 것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사진을 찍고 있는 순간은 정말 사실을 찍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분단현실에서 일어나고 실행되는 현실과 사진이라는 매체가 보여주고 감추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그동안의 전시보다도 작가의 작업이 사진을 찍는 자신에 대한 돌아보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작업의 맥락은 이어져왔다. 비판의식, 저항의식은 물론 그의 작업안에 내재되어있다. 그가 쓴 글과 사진이 함께 전시되어있었다. 그는 고민만큼이나 글을 잘 쓴다. 그리고 그것은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기보다는 작품을 보면서 스스로 깨닫는 과정을 불러일으킨다. 블랙유머와 미적감각 사이의 기이한 느낌을 작품에서 볼 수 있었다. 



노순택, <무능한 풍경의 젊은 뱀 #P-XIV010501>, 피그먼트 프린트, 100x147cm, 2014



노순택, <무능한 풍경의 젊은 뱀 #P-XIV010601>, 피그먼트 프린트, 100x147cm, 2014



노순택, <무능한 풍경의 젊은 뱀 #RWJ-XII040201>, 피그먼트 프린트, 82x120cm. 2013




노순택, 무능한 풍경의 젊은 뱀, 2014_1


구동희 작가의 작업은 하나의 놀이와 같았다. 작품을 관람하기에 앞서 두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외부에서 전시장을 가득채운 <재생길> 작품을 둘러보는 것 그리고 안전모와 안전수칙에 동의하고 작품 내부에서 그것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작가가 전시하고 있는 과천관 그리고 그 주변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과 같은 것을 가지고 구성된 것이라고 한다. 작가는 과천관 주변의 놀이동산에서 놀이기구를 탈 수 있는 제한된 시간 사이에 최대한 많은 것을 즐기려고 했던 기억이 있다고 말한다. 그 말 처럼 작가의 작업은 작품을 보는 관람객의 시간에 영향을 주고자 한 것 처럼 느껴졌다. 






 구동희, <재생길>, 혼합재료 설치, 가변크기, 2014




나는 두가지 방법을 모두 시행해 보았고 시간을 재봤다. 먼저 그냥 둘러보는 것은 2분 20초라는 시간이 나왔다. 작품을 빙 둘러보았을때 나는 타자라는 느낌을 받았고, 그것을 즐기고 있진 않았다. 단지 관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전수칙에 동의하고 안전모를 쓰고 작품속으로 들어가자 나는 그것 속에서 주체가 되었다. 나는 조금 전에 내가 외부에서 바라보고 있었던 공간을 내부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작품은 일종의 고행길과도 같았다. 매우 더웠고, 힘들게 움직여야 했다. 이런 환경들은 작품을 보다가 쉬고 다시 움직이게도 하였으며 중간 중간에 상영되는 놀이기구 영상을 바라보게 하기도 하였다. 나는 관람시간을 관습적으로 빠르게 지나치지 않고 있었으며, 내가 보고싶은대로 움직이고 싶은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형광색으로 칠해지고 설치된 구조물을 지나면서 그안에 상영되는 롤러코스터 처럼 <재생길>은 나 스스로가 즐기게 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에 작품은 트램펄린에 낙하하면서 종료되었다. 이 낙하의 과정에서 짜릿함이 느껴졌다. 낙하하기 전에 촬영된 작품 내부의 사진은 롤러코스터가 움직이는 영상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작가는 전시장 입구에서 시작되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하지는 않았다고 했지만 왠지모르게 전시장에 들어가는 입구와 작품의 입구는 이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구동희, <재생길>, 혼합재료 설치, 가변크기, 2014


작품을 보면서 외부와 내부 타자와 주체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하였다. 작가의 작업이 체험하게 하려고 한 모든 것을 느끼지는 못하였겠지만 적어도 스스로 작품을 걸어보는 과정은 나에게 짜릿한 놀이로서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내부에서 작품을 체험한 시간은 5분 20초 였다. 무엇이 나를 더 오래있게 하였을까? 그것은 관습적으로 빠르게 작품을 보고 지나가지 않게하고 스스로가 작품내부에서 빠르게 혹은 더 느리게 관람하게 할 수 있게 한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것같았다. 무엇보다 전시장에 설치된 물잔 그리고 바둑판 ‘손 있는 날’과 같은 문구의 의미는 쉽게 파악하기 힘들었다. 이에 대한 작가의 인터뷰에서 물잔은 관람자의 위치표지이며 전시 작품의 일부라고 했다. 불완전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손 있는 날’은 이삿날을 정하는 방법이라고 하는데 ‘손’이라는 것이 손님이나 마가 끼어 운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고, 전시장이라는 공간을 움직이는 유동적 영역표시이고, 인간과 사물이 충돌 햇을 때 뒤집힐 수 있는 경계면이라고 하였다. 확실히 물잔과 문구는 우리가 움직이는 영역을 나누고 있었고, 작품 내부에서 체험할때도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것은 지금 내가 어디에 위치해있는지 판단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구동희, <재생길>, 혼합재료 설치, 가변크기, 2014


김신일 작가는 글자를 이용한 조각을 보여주었다. 먼저 전시장에 들어서게 되었을 때 한 영상을 볼 수 있었다. <42000초안에서 대화>라는 제목의 영상작업은 사진을 확대해 픽셀이 보이게 만든 것이었다. 그 영상속에서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것이 무엇인지 쉽사리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영상은 픽셀로 구성된 화면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확대되었을때는 몰랐지만 그것이 우리 일상적인 장면으로 보이게 되었을때 실체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고 도시, 자연의 환경으로 이미 아는 것을 다시 파악하게 했다. 





김신일, <42000초안에서 대화>,비디오,가변크기, 2014


작가는 이번에 ‘Ready known’이라는 것을 주제로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미 알고 있는이라는 이 단어는 나에게 ‘Ready made’를 떠올리게 하였다. 레디 메이드는 이미 만들어 진 것이다. 그 개념은 미술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더 다층적인 의미를 가진다. <마음, 믿음, 이념>시리즈는 모두 같은 맥락으로 보였다. 그것은 영어 혹은 한국어로 <마음, 믿음, 이념>의 글자를 조각한 작품이었다. 물론 나는 이 단어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그 조각을 보았을 때 이것이 단순한 알파벳의 철자의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관찰하였을 때 그것은 Mind, belief, ism 그리고 마음, 믿음, 이념이라는 글자로 파악되었다. 맨 처음에 만나는 조각은 상자안에 투명하고 검은색의 인쇄가된 두 글자가 들어있는데 마음은 서로 붙어있고, 믿음은 어떤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념은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작가는 마음이 다양함이 그대로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시각적으로는 마음은 하나로 되어있었다. 다음으로 믿음에 대해서 작가는 다양함이 투명막으로 만든 벽에 갇히는 것이라고 했다. 시각적으로는 믿음은 어딘가로 향했다. 다음으로 투명막이 콘크리트 벽으로 굳어져 완고해졌을때 이는 시각적으로 둘로 나뉜 이념이라는 글자로 표현되었다. 글자는 더이상 쓰여져서 파악되는 것이 아닌 시지각적인 미술작품으로 보여졌다. 거대한 전시장 공간으로 들어서기 전에 명주실로 거미줄처럼 만들어놓은 <무제>작품이 있었다. 이 작품은 전시장 안을 그냥 들여다보게 하지 않았다.  



김신일, <마음,믿음,이념>,폴리카보네이트에 프린트,아크릴박스,120x60x60cm, 2014



김신일, <무제>, 명주 실, 2014


역시나 <마음, 믿음, 이념>의 세 글자로 된 작품들이 보였다. 심장박동 소리에 맞춰 진동을 울리는 거울 앞의 글자들과 중앙의 거대한 세개의 글자조각이 있었다. 진동에 맞춰 흔들리는 거울앞에 서서 마음, 믿음, 이념이라는 글자를 읽으려고 시도하게 되었다. 그 과정은 언어적인 의미를 해석하는게 아닌 개체의 시각적인 특성을 보려고 하는 것이었다. 떨리는 거울 앞에 서있는 나는 글자를 쉬이 파악하기 어려웠다.



김신일, <마음,믿음,이념>,혼합재료 설치, 200 x 50 x 50cm, 2014




전시장은 계속해서 불이 꺼졌다가 켜졌다가를 반복했는데 불이 꺼진 순간에는 양 측에서 숲과 도시의 비디오 프로젝션을 통해 글자를 비추고 있었다. 작가 인터뷰에 따르면 이는 “문자는 또 다른 다양함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쪼갬과 동시에 수많은 다양한 빛의 변화를 포용하는 문자라는 시각적 느낌을 나타내려 했다.”고 한다. 실제로 견고한 글자 조각은 투영된 빛의 이미지로 또 다른 시각적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김신일, <마음,믿음,이념>, ABS,투명패널에사진,240x180x63cm, 2014


작가는 마샬 맥루언의 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를 인용하기도 한다. 실제로 문자라는 것은 핫 미디어라고 하는데 그것은 정의되었기 때문에 벗어나기 힘든 틀속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작품은 쿨 미디어로 보는 이가 상상하는 대로 또,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작품을 보는 내내 그것을 읽기 위해 또 파악하기 위해 시각적인 노력은 관람객 스스로가 행동해야 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문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참여를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하였다.


올해의 작가상 후보인 4명의 작가의 작품은 그들 각각 ‘예술’ 그리고 ‘미술’이라는 것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달랐다. 장지아 작가는 금기에 대한 관심을 미술의 영역으로 끌고 오는 것을 보여주었고, 노순택 작가는 분단현실속에서의 우리 현실이 어떠한지, 사진이라는 젊고 교활한 뱀같은 매체가 표현하는 풍경 그리고 사진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었다. 구동희 작가는 작품과 관람객의 관계 그리고 그것의 불완전성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김신일 작가는 이미 알고있는 것 중에서도 ‘글자’라는 것을 사용해 시각적으로 그것을 다시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노순택, 장지아 작가는 그 작가들이 지금까지 해온 작업과 신작을 함께 보여줌으로써 작업세계에 대한 이해가 쉬웠던 반면에 구동희, 김신일 작가의 경우에는 신작으로만 전시가 이루어져있어서 작업세계에 대한 이해도는 조금 떨어지지 않았나 싶었다. 물론 그들이 주는 메세지는 충실하게 느껴졌다. 어떤 작가가 올해의 작가상을 타게될지에 대한 관심보다 이들이 만들어낸 한국현대미술의 담론과 그 이야기가 더 흥미로웠다. 작가 개개인이 말하고 있는 미술에 대한 내용들은 깊고 풍부한 세계를 제공하고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올해의 작가상전시는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전시장을 들어서는 순간, 전시를 보는 순간 그리고 전시를 보고 난 후 지금의 순간까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가와 작품들이었다.


사진 및 자료 출처 : http://koreaartistprize.org


by. 하마

[하재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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