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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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보는 느낌이다. 영화의 원작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임을 알고 난 후 책을 넘기며 보는 듯한 느낌은 영화의 고독만큼이나 짙어졌다. 공허함. 이 영화는 나에게 너무나도 큰 부피로 다가오지만 정작 그 속은 비어있다.

 

따지고 보면 <토니 타키타니>는 꽉 차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내레이션이 나오고 카메라의 우측 이동을 통한 화면 전환이 반복된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참여한 음악은 쉴 틈이 없이 영화를 가득 채우며 지금의 ‘웨스 앤더슨’ 감독이 생각나는 배우들의 독백이 무게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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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영화는 한없이 가볍다. 영화가 끝나고 생각난 건 영화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토니 타키타니’가 아닌, 그의 아내였던 ‘에이코’였다. 그녀의 삶이 영화와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월급의 대부분을 옷을 사는 데에 썼던 그녀. ‘토니’와 결혼한 후에도 옷과 구두를 계속 샀지만 고독함에 지배되었던 그녀. 165cm인 한 육체에겐 너무나도 넓은 집과 많은 옷들. 물질로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그녀를 압도했다.

 

 

예술성이나 사상성 있는 그림의 어디에 가치가 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그림들은 토니에게 단지 미숙하고 추악하며 부정확할 따름이었다.

 

 

마치 <토니 타키타니>의 구성과 비슷하다. 음악, 내레이션, 연출로 가득하지만 이런 기술들로 채울 수 없는 인간 내면의 쓸쓸함과 고독함이 느껴진다. ‘토니’는 어땠을까.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지만 그림에 체온이 없었던 그. 사람보다는 기계를 그리는 데에 적성이 맞았던 그. ‘에이코’와 5번의 만남이 있었지만 외관과 표면에 매료되어 청혼을 했던 그. 그 또한 텅 텅, 비어 있다.

 

사실 이들은 알고 있다. 표면적인 걸로 점차 넓어져간 그들의 내면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에이코’에게 과연 많은 옷이 필요한지 그는 묻고 그녀 또한 하나의 몸에 많은 옷이 필요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공허함은 참을 수 없기에, 고독함은 어쩔 수 없기에 그녀는 선택을 반복하고 ‘토니’에게 무거운 존재를 남긴 채 가볍게 떠난다. 삶이 쓸쓸하고 공허해도 한 사람의 존재는 그의 말처럼 꼭 걸맞은 무게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도 공허함은 ‘에이코’가 남긴 존재의 무게로 더 이상 편하고 참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옷을 입고 일할 165cm의 230mm인 여성을 찾는다. 다시 기술적으로 재며 표면적으로 자신의 쓸쓸함을 덮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녀를 꼭 닮은 ‘히사코’란 여성이 찾아온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 있는 것은

생명의 뿌리를 잃고 빠르게 쓰러져가는

그림자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지닌 삶의 무게는 다른 누군가가 대신할 수 없다. 그는 ‘히사코’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아내의 옷을 헌 옷 장수에게 처분한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악기와 레코드 또한 처분한다. 아내의 옷과 아버지의 유품이 있던 방은 이제 비워진 채 그 혼자 덩그러니 누워있다. 다시 이 고독함을 선택한 건 깨달음일지, 귀찮음일지, 혹은 두려움일지 모르겠지만 삶이란 원체 고독한 것이고 그 고독을 없애는 게 아닌 무언가로 채우고 다시 비워가며 같이 동행하는 것임을 영화는 말한다.

 

그리고 고독은 반복된다. 일찍 아내를 잃은 아버지와 일찍 ‘에이코’를 잃은 ‘토니’. 감옥에 누워 있는 아버지와 고독이란 감옥이라며 아내의 옷 방에 누워 있는 ‘토니’. 하지만 고독은 DNA와 다르게 피를 넘어 삶에 맞닿아 있다.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에이코’와 그녀를 닮은 ‘히사코’는 모두 다른 피가 흐르지만 고독이란 이름으로 한데 묶이며 ‘토니’에게 공허함을 주는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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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는 무엇으로 가득하며 어떤 존재가 남긴 무게가 나를 짓누르고 있을지 생각해 본다. 그들처럼 표면적이고 물질적인 것도 가득하고 오래된 물건에 쌓인 먼지도 있을 것이다. ‘토니’처럼 빈 공간을 찾아 누워 보면 뭐가 다를까 싶지만, 고독이 누르는 무게에 애써 못 이긴 척하며 그냥 조금 누워있고 싶다.

 

‘토니’가 태우지 못한 ‘히사코’의 사진처럼 나는 또 몸을 일으켜 고독함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러다 바람이 불면, 다시 그 바람이 가져온 공기를 마시고, 그 공기가 내 안을 채우고. 바람으로 일어나는 행사장의 풍선처럼 내 안을 채워 줄 바람을 찾아 고독함의 부피를 줄여 다시 일어나 본다. 영화가 끝난 검은 화면은 나의 방이자 나의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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