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슬픔의 서 - 보람이에게

동생에게
글 입력 2024.01.01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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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네게도 편지를 쓰마, 보람아.


오늘 아침, 새벽, 일어나자마자 나는 어딘가 슬펐다. 그건 우울이나 울적한 감정 따위가 아니라, 순수한 슬픔이었다. 강바닥을 끓이고 달여내 구름 위로 응축된, 정제된 수증기처럼 깨끗한 슬픔이었다. 담배를 하나 꼬나물면서, 나는 그 슬픔을 들여다본다. 하늘엔 아직 어스름, 고요한 하늘 위로 연기 같은 골몰을 흩뿌렸다.


또, 또 그때 그 순간이었더구나. 너도 기억하겠지, 내 누차 말하였으니. 잠에서 깨자마자 내 기억해낸 건 우리 어린 시절이다. 동우와 내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니가 자꾸 좇아오려는 그 순간. 너는 내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부르며, 그 짧닥한 다리로 뒤따른다. 같이 놀자고, 자전거 뒤꽁무니를 잡으려는 듯 버둥댄다. 닿을 리 만무한 애닳는 손길을 나는 성가시다는 듯 팽개치고 페달을 밟았다. 우리 집으로부터 신호등이 있는 야트막한 언덕까지 달린 후, 나는 언덕으로부터 뒤돌아보았다. 너는 양팔을 벌리고 휘두르고, "같이 가, 같이 가" 아직도 달려오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서는 너를 향해 뒤돌 것인가, 앞으로 달려갈 것인가, 뿌리칠 것인가 하는 성가신 고민이 생겼고 나는 눈을 질끈 감고서 언덕을 넘었다. 협동유통에 걸쳐진 그 다음번 신호등에서 다시 뒤를 돌아보았을 때, 언덕 위엔 네가 없었다. 그 언덕 너머 네가 어떤 모습으로 뒤돌아 갔는지를, 그러므로 나는 모른다. 네 기억 속에도 사라졌을 테니, 우리는 영영 모른다.


나는 잠깐, 쓰다가 울었다. 네 답을 알지, 나는 괜찮노라, 고로 슬퍼할 하등 필요가 없노라고, 아마 말하리, 예전에 그랬듯. 허나 이건 미안함이나 죄스러운 마음이 아니야, 그러므로 네게 사과를 건네고 싶게 하는, 그런 종류의 마음이 아니야. 이건 내 심상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슬픔의 원형, 그중 하나일 뿐이야. 사람을 슬프게 하는 여러 가지 유형, 울게 하는 그 여러 가지 모습 모습들에는 원형이 있고, 이건 그 중 하나일 뿐. 나는 그것을 귀히 여겨 잊어버리지 않고자 되새기고, 마침내 편지로 쓴다. 내 슬픔을 걱정하지 말아라, 나는 슬픔을 느끼는 어느 때마다 그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다행이라 생각한다. 불안이 그치고 난 후 마음에 감도는 안도감과 같은 다행스러움으로 생각한다. 아직은 내게 온 심장으로 느껴볼 슬픔, 북받치는 것이 남아있다는 것에 대해.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 나는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사람인 누구나 행복을 향하여, 하다못해 평온함을 향하여 그 마음이 달려나가는 동안, 슬픔은 배제되거나 잊히게 마련. 슬픔은 나기를 거절당하게끔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로부터. 그러는 동안 시간은 흘러 나이를 먹고, 우리는 사뭇 괜찮아졌다. 까닭을 낱낱이 알 수는 없으나, 대략 젊은 날의 고민들이 준 선물이라는 섣부른 귀결을 매듭짓고서. 여하간 이제 모든 것이 괜찮아졌노라, 나를 그토록 슬프고 초라하게 했던 것이 이제 이 가슴에 없노라, 나는 이제 평온하고 그저 괜찮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허나 우리가 슬픔을 극복한 것이냐, 아니면 슬픔이 우리로부터 물러난 것이냐. 우리가 슬픔을 물린 것이냐, 아니면 슬픔이 먼발치로 도망간 것이냐. 나는 후자를 생각한다. 슬픔을 물리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었다 한들, 이 가슴으로부터 아주 조금 밀어낼 수 있을 뿐 아예 닿지 않을 먼발치로 떠밀어 보낼 수 없었음이니. 우리는 무감해진 것이다. 내가 슬픔을 보낸 것이 아니라, 슬픔이 우리로부터 떠나버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그르다 여기지 않는다.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 다만, 안타까이 생각할 뿐이다. 언젠가 아무런 슬픔도 느끼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무감해진 나의 미래를 상상하며.


우리에게 무감한 지금이란 그토록 바란 미래일지도 모르나, 그에 대해 의심하기를 바란다. 하루하루 조용할 날이 없던, 연옥 같은 고통 속에서 우리 바라고 그리던 평온은 무애 無碍, 마음에 아무런 장애도 없는 평화였으나, 실상 우리 지금 누리고 있는 평화란 무감함일지도 모른다. 보람아, 나는 점점 굳어가는 우리의 심장을 두려워한다. 인식도 저항도 없이 굳어가는 심장,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도록 천천히 굳어버린 마흔의 심장 앞에, 펼쳐진 권태로운 세상과 그 앞에서 우리가 반드시 느끼게 될 절망감을 두려워한다. 나는 보았어, 너무 일찍이 보았어. 권태와 그 앞에 절망하는 인간의 무력함을, 우리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너도 기억하느냐.


'허나 오라방, 슬픔이 없다 하여 기쁨이 따라 없을런가, 이 또한 오라방의 오래된 습관, 불안하고 비관하는 습관은 아닐는지', 혹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마. 슬픔은 심장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진단하는 가장 명백한 감각이다. 고통으로 증명되는 살아있음의 감각이다. 동맥으로 나아간 붉은 피가, 시퍼런 것이 되어 심장으로 되돌아오는 듯이, 슬픔을 느끼는 것은 정맥으로 피가 원활하게 돌아오며 느껴지는 감각이다. 동맥에 대한 것, 말하자면 행복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서 나는 그다지 우려스럽지 아니하다. 당장에 행복하지 않은 사람 누구나 그것을 고통으로 생각하고 걱정하며, 들여다보기를 자연스레 행하기 때문이다. 허나 슬픔에 대하여 우리가 어떠하더냐, 우리가 슬픔을 생각하더냐, 비어버린 슬픔의 자리를 걱정하더냐. 오히려 자랑스레 생각하고 훌륭하게 여기지는 않겠더냐. 혹 별 우려가 없어 부러 들여다보지 않게 되지 않더냐.


'오라방, 사람이 기쁨만을 누릴 수는 없을런가, 세상에 그런 사람이 많더이다', 이리 묻는다면 답하마. 피는 순환해야 하는 것이다. 이 땅에 기쁨을 낳게 하는 것이야 그 얼마나 많을지 모르지. 얼마나 편리한 세상이냐, 한 가지에 지루해지면 또 다른 행복을 찾아 나서리,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허나 그것이 영원한 것이더냐. 우리는 두어 번 맛본 것에 대해서는 쉽게 질리어 하는, 권태로운 입맛을 타고났다. 그리하여 어린 때 그토록 놀라운 환희의 맛은, 지금에 이르러 모조리 익숙하고 밋밋한 맛이 되어 있었다. '한 가지 맛에 질리면 또 다른 맛을 찾지요', 허나 역치가 잔뜩 올라 바늘이 돋은 혀끝으로, 점점 더 맛볼 만한 환희가 적어진 그 삶에, 행복은 차차 어려운 것이 되어 간다. 너무도 자명하지 않으냐! 궁핍할 적엔 천상의 맛과 같았던 행복이, 지금엔 겨우 만족할만한 한 끼 식사가 되어 있었다. 우리가 벌써 그러한 권태의 초입에 서 있다. 행복감이 줄어든 삶 앞으로 세상은 권태라는 본모습을 보인다. 얼마나 무량한 권태가 이 세계에 자리해 있는지를 나는 보았다. 어쩌면 너무 일찍이 보았어, 끝이 없을 것 같은 우울과 허무 속에서.


삶이 길다. 삶이 어쩌면 너무 길어. 내가 이르기엔 우습고도 섣부른 말일 것이나, 삶은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땐 너무 길어. 그러므로 우리 기쁨은 자주 씻겨내려야 한다. 우리 기쁨은 슬픔을 통해 덮어져야 한다. 슬픔을 통해, 기쁨의 달콤한 뒷맛을 쓰디씀으로 씻어내야 한다. 순환시켜야 한다, 피를 내쉬고 다시 들임으로써 심장을 뛰게 해야 해. 그렇게 꾸준히 자신의 행복을, 자신의 나태한 심장으로부터 지켜내야 해. 그러니 다시 물으마, 너는 지금 무엇을 슬퍼하느냐. 슬픔이 네 심장의 순환을 가리켜 알릴 것이다.


*


어제였나, 혜화에서 혜은이 진희에게 보낼 편지를 썼노라는 내 말 뒤에, "어~ 오빠야~ 나도 편지 써줘." "니 안 읽을 거잖아." "아 왜, 나도 그런 거 두고두고 볼 줄 안다고." 이런 이야기가 오갔지. 별다른 집중을 환기하는 말이 아니었기에, 이건 꽤 쉬이 지나쳐버리기 일쑤인 것이었다. 네 평소 그런 것에 가슴이 동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기억하기에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편지에 들일 나의 품에 비하자면, 이 편지가 네게 가질 효용이 턱없이 적으리라 생각하였다. 어쩌면 그냥 스윽 읽고는 어딘가로 버려질지도 모르지, 고로 내가 편지를 쓸 리 만무하리라 찰나에 생각하였다.


그리고 기억이란 언제나 불완전한 것이지, 사람에 대하여서는 특히 십 중의 팔 구가 선입견이지 않았더냐. 나를 스치듯 지나치는 네 말 속에서 일전 유년의 순간을 캐치한다. '자전거를 좇는 풍경의 원형 감정', 날 부르는 자에 대한 슬픔. 내가 그 부름을 채 놓치거나 성가셔 외면하였더라도, 그리하여 뒤늦게 그 부름을 돌이켜보는 때가 나를 찾더라도, 지금의 나는 그리 죄스럽거나 슬프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래 나는 괜찮았을 거야. 그리고 너도 괜찮았겠지. 허나 삶이 그 괜찮음만으로 충분해지지 않고 충만해지지 않다. 앞전과 똑같은 이유이다. 그러니 나의 슬픔을 우려하지 말아라. 내 슬픔은 나를 위한 것이니.


사람은 몸소 느낀 것만을 이해하고 쉬이 공감한다. 이건 너도 동의하겠지, 우리는 스스로 너무 분명한 사람이니까. 느낀 것만을 느끼었노라, 느끼지 못한 것을 추호 느끼지 못하였노라 말하는, 우리는 단호한 사람이니까. 그러니 내 슬픔은 나를 위한 것이다. 내가 몸소 느끼고 느낄 수 있는 만큼, 내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늘어갈 것이니.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이란 이타적인 것으로 착각받기 일쑤였으나, 그건 무엇보다 이기적인 일이며 이기적인 일이어야 한다.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어야 한다. 애초 요체가 그러하며, 그래야 오래갈 수 있는 것, 이타는 그에 뒤따르는 것이어야 바람직하지. 내가 몸소 이해해 서로 나눌 수 있는 사람의 기쁨이 적으나, 내가 이해할 슬픔이 많다. 그리하여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큼 모조리 나는 끌어안을 수 있으리니, 끝내 나는 사람 속의 사람이 될 것이다. 분명하고 단호한 자기 자신으로서 올곧이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사랑스러운 사람이 될 것이다.


아, 이제는 우리도 자못 자라나, 슬픔에도 끄떡없을 무심한 심장을 가지었지. 무심한 철의 심장, 우리 남매의 것에는 지울 수 없는 냉소, 그리고 표독이 자리해 있다. 이는 우리가 생장하며 자라나는 동안 물려받은 부채 같은 유산이라, 쉬이 지워 보일 수는 없을 것이다. 웬만한 슬픔에 더이상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무시로 벼려낸 심장, 그건 우리가 일찍이 지나친 슬픔을 겪은 탓이다. 아주 독하고 기나긴 겨울, 스물하고 여덟 해 동안 지독한 것들이 심장에 깃들어버린 탓이다.


그러니 묻는다. 보람아, 너는 무엇을 슬퍼하느냐. 요즘 네 얼굴에 보이는 슬픔이 적고, 네 말에 깃들은 슬픔이 없다. 너는 굳세기에, 떠오르는 슬픔을 네가 다 치워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허나 그 가슴에 슬퍼할 것 하나가 없겠느냐. 아직 우리에게 슬퍼할 무한한 것들이, 젊은 날의 초상이 많다. 나는 그를 덮어두고 치워버리게 하는 사람의 본능, 그로써 방치되고 잊히는 사람의 슬픔을 우려한다. 슬픔을 잊어버린 끝내 잃어버린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의 결말에 행복을 두지 않기에. 그는 무감해질 뿐이다. 그러니 생각하고, 생각하여라, 우리는 자꾸 생각하자꾸나.


묻는다 보람아, 너는 슬퍼할 줄을 아느냐. 가끔은 가슴에 쳐둔 빗장을 거두어, 마음껏 허물어 슬퍼할 줄을 아느냐. 자기 슬픔이 아프고도 분명한 자신의 것이요, 버겁고 버거우나 내가 받아들인 무엇이라, 슬픔 속에 흔들리면서도 그것을 강보에 싸 한 아름 떠안는 사람의 성숙한 모양새처럼, 영혼은 우리 가슴 안에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별 대단치 않은 일이기도 하다. 그저 슬픔을 잔뜩 머금어 안고서, 고되게 서 있으려는 사람의 모습이다. 나는 그런 사람의 버거워하는 얼굴을 사랑스럽게 여긴다. 복되이 여기며, 축복을 말한다, 네 앞에 행복이 있으리라, 사람은 자신이 완전히 안아 든 슬픔만큼의 행복을 반드시 누리리라. 그 외의 것은 우연일 뿐, 내가 축복하고 확언으로 하례할 수 없음이다.


편지를 써달라라, 오냐, 네게도 편지를 쓰마, 네게 무엇을 말해 줄 수 있었을까. 어쩌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눌 수 있는 것, 대화로 오고 갈 수 있는 것들 말고, 이 서면 서편으로만 나눌 수 있는 것이 있겠지. 나는 슬픔을 말한다. 이런 오라비를 잘 알겠지, 우리는 서로를 오래 바라보았으니. 나는 좀체 기쁨을 가리켜 말하지 않는다. 기쁨이란 사람마다 그리어 고대하는 것이 각 다르니, 네겐 너만의 그려둔 기쁨이 있을 것이다. 대신하여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보배로운 것을 주마. 슬픔과 행복의 역설, 사람으로부터 쉽게 잊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고로 지금, 이제 서른 줄에 다다른 우리 둘 썩 괜찮은 매일에 지금을 걱정한다. 괜찮은 것인가, 정말로 괜찮은 것이 맞는가! 슬픔이 드물어진 하루하루 속에서, 이따금씩만 나를 찾는 이것, 심장에 휘둘러쳐 감도는 비감 悲感을 대하면은 귀하고 반갑고도 안타깝게 생각함으로써. 슬픔이 이 가슴 안에 있는 채로 마음껏 흔들리면서도, 아무런 지나침과 번뇌가 없어 우리가 그 슬픔과 함께 살며, 영영 더불어가는 것. 나는 그런 삶을 꾀하고 고대한다. 그러므로 이 가슴 안에 영영 슬픔이 남아 있기를 희망한다. 슬픔은 자기 자신의 풍요를 위하는 거름, 그런 우리 앞에 영원히, 아니, 꾸준히 행복 있으리라. 슬픔으로 씻어낸 혓바닥 위로, 똑같은 기쁨에 영영 감미로워라.



 2024. 01. 01

 오라비가


 

p.s. 허나 우울과 슬픔을 혼동하지는 말아라.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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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스텔
    • 글이 좋아서 정독했습니다. 새해 첫 날의 묵직하고 특별한 편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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