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차가운 공포와 뜨거운 수치심 - 숄

글 입력 2023.12.31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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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든, 음악이든, 책이든. 작품이 주는 계절감의 영향력은 상상 그 이상이다. 입김이 나오는 찬 공기가 떠오르는 겨울 영화 <캐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이 느껴지는 여름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 같은 것이 그 예시다.


<숄>의 배경은 뼛속까지 추운 홀로코스트, 그리고 <로사>의 배경은 용광로 같은 거리를 가진 무더운 플로리다이다. 전혀 다른 온도이지만 그 둘이 공통으로 주는 감상은 죽음이다. 홀로코스트는 죽을 듯이 춥고 플로리다는 죽을 듯이 덥다.

 

 

 

로사와 마그다, <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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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아 오직의 단편집 <숄>에는 두 작품만 들어 있다. 표제작 <숄>에는 수용소에서 15개월짜리 딸 마그다를 몰래 키우는 어린 엄마 로사가 등장한다. 그리고 30여 년이 흐르도록 딸의 죽음을 믿지 않는 로사의 이야기가 두 번째 단편, <로사>다.

 

 

 

차가운 공포와 뜨거운 수치심



다시 계절과 온도로 돌아가서, 홀로코스트는 죽을 듯이 춥고 플로리다는 죽을 듯이 덥다. 두 장소 모두 죽을 것 같거나, 죽고 싶은 감정을 주지만 그 원인은 다르다. 홀로코스트에서 죽을 듯한 이유는 딸의 존재를 들킬까, 그래서 그를 잃을까, 영영 보지 못할까, 하는 공포 탓이다.


그러나 플로리다에서 로사는 이미 딸을 잃었다. 잃고도 수십 년이 흘렀다. 많은 이들이 잊는 사실이지만, 공포는 앞으로의 일을 두려워하는 상태다. 이미 딸을 잃은 상황에서 딸을 잃을 것을 두려워할 수 없다. 두려운 미래가 이미 일어난 현재에서는 공포와는 다른 감정이 찾아온다.

 

 

“당신은 거기 없었잖아요. 영화를 보고 아는 거예요.”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수치심을 안겨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사람에게 수치심을 주는 이 힘을 발견한 건 오래전부터였다.

 

(p.92)

 

 

홀로코스트의 추위가 공포라면, 플로리다의 더위는 수치심이다. 로사는 홀로코스트를 겪지 않았으면서 자신에게 말을 얹는 유대인 퍼스키에게 수치심을 안겨준다. 퍼스키는 그 불행을 함께 겪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 로사는 ‘생존자’라는 이유만으로 상대에게 수치심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로사 또한 수치심을 느낀다. 로사에게 수치심을 주는 존재는 로사의 딸, 마그다이다. 로사는 마그다가 수용소 울타리 바깥으로 우악스레 던져질 때 뛰쳐나가지 않은 것을, 같이 죽지 않은 것을 수치스러워하지 않을까. 누구도 로사를 탓하지 않지만, 로사는 스스로를 비난하고 힐난할 것이다. 


퍼스키는 생존자가 아니어서, 로사는 생존자라서 수치스럽다.

 

 

 

두 번째 생존



로사는 또 한 번 생존해야 한다. 이번에는 수치심으로부터. 그러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살아남되, 살아가지는 않는 것이다. 과거를 인정하지 않고 그 안에 머무른다. 로사는 마그다가 여전히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멋진 직업을 가지고, 예쁜 가정을 꾸린 딸에게 로사는 편지를 쓰며 수치심을 덮는다.


하지만 로사의 이러한 노력을, 로사의 무의식은 알아주지 않는다. 로사는 자신이 속옷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로사에게 이 속옷은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다. 잃어버린 신체의 일부이자 영혼의 일부로, 로사를 끔찍한 수치심에 빠뜨린다. 그렇게 로사가 애써 무시하던 수치심이 들통난다.


그 후에야 로사는 숄을 제대로 마주한다. 수용소에서 마그다를 감싸고 지켜주던 숄이다. 얼어붙을 듯한 홀로코스트에서 이 숄은 따뜻했고, 생명과 젖을 주었다. 아기 마그다에게도, 그리고 엄마 로사에게도. 부드럽다. 촉감, 냄새, 색깔, 내뿜는 분위기, 숄이 가지는 모든 성질이 부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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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플로리다에서는 다른 온도를 지닌다. 그저 낡은, 버려진 붕대 같은 색 바랜 천이다. 희미한 타액 냄새도 상상에 가깝다. 메마른 가슴, 황폐한 땅. 버석하고 거칠기만 한 이 숄은 더 이상 부드럽지도, 따뜻하지도 않다.

 

마그다의 존재가 발각되던 순간, 이 숄은 마그다를 감싸는 게 아니라 로사의 입 안에 쑤셔 넣어진 채였다. 그의 울부짖음을 삼키게 하던 그때, 숄은 포근한 열기를 잃었다. 로사는 30여 년이 지나고 나서야 숄이 더 이상 따뜻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사실을 깨달은 후에도 로사는 여전히 마그다에게 편지를 쓴다. 로사는 여전히 미친 여자다. 하지만 차이는 있다. 이제까지 로사가 미친 여자로 살아남기만 했다면, 이제는 미친 여자로 살아간다.

 

 

 

김지수_아트인사이트컬쳐리스트.jpg



[김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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