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클래식 공연장에서 6개월간 근무하며 ① [공연]

공연장에서의 일상을 마주하다
글 입력 2023.12.2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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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의 달뜬 목소리를 비집고 객석으로 어둠이 스며든다. 선홍빛 소파에 앉은 사람들의 형체가 흐려지자 연주장이 일제히 고요해진다. 무대의 조명으로 인해 눈이 시리고, 뚜렷한 명암으로 인해 무대가 깊어 보일 때 즈음, 하나 둘 둔탁한 박수가 터져나온다.

 

모두가 숨을 죽이는 순간.

 

공연장 벽면에 몸을 기대어서 그 광경을 바라보면, 악기에 은은하게 반사된 빛이 일렁이는 모습이 꼭 물결을 닮았다. 이미 공연은 시작되었고, 내 귓가에서는 온갖 무전들이 또다른 공연을 펼치고 있다.

 

 

 

왜, 음악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은 내가 지금껏 만나본 분들 중에 가장 독특하셨다. 항상 알 수 없는 노래를 읊조리고 계셨고, 음악실 옆을 지나칠 때면 예외없이 선생님의 피아노 연주가 들려왔다. 수업을 하던 도중에 맥락없이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셨고, 우리가 음악 수행평가에서 괴성을 질러도 그것을 우리만의 음악성이라고 평가해주실만큼 음악을 애정하시는 분이셨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일주일에 50분만을 음악에 할애했다. 심지어 미술 교과목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으니, 예술과는 거리가 머디먼 학교였던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마주하는 그 한 시간 남짓의 음악 교과목은 선생님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아무 얘기나 듣는, 항상 유쾌하면서도 이상한 시간이었다. 매일 시시콜콜한 얘기만 하면서 자습 시간도 안 준다고 투덜거리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도 호탕하고 자유로운 분과의 대화 속에서 허우적대는 50분이 나름대로 의미있게 느껴졌다.

 

수능을 보기 3주 전 마지막 음악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선생님께서는 항상 그래왔듯이 노래를 들려주셨다가, 지휘를 하셨다가, 인생 이야기를 하셨다가, 피아노 연주하시기를 반복하셨다. 그러다가 피로에 찌들어있는 우리의 얼굴을 보시고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낼 것. 그리고 현재의 역경을 이겨낸 채 성인이 되어서도 아름다움을 잊지 말 것. 나른한 오후에 좁디좁은 음악실 안에서, 축 늘어진 우리를 유독 물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시던 그 적막한 순간이 아직도 기억난다. 결코 고요하지 않을 것만 같던 공간이 처음으로 고요하게 가라앉은 날이었다.

 

 

 

어쩌다, 공연장


 

스무 살,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알아가야 할 사람은 많아졌고, 그중에서 마음 터놓고 대화할 사람은 극소수였으며, 버려지는 시간은 넘쳐나지만, 돈은 언제나 부족했다. 대학에 가면 매일 놀고 먹어도 된다는 어른들의 말은 거짓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내리는 과제들을 해치우기 바빴고, 그 와중에 동아리에 시험 공부에 인맥 관리까지. 고등학교보다 신경쓸 일이 늘어난 하루하루였다. 

 

바쁜 시간들 틈에서 나의 아가미가 되어준 건 다름 아니라 공연이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당일 저녁의 공연을 예매하는 게 어느 순간부터인지 버릇이 되어서, 바쁠 땐 한 달에 두 번, 넉넉할 땐 일주일에 두 번씩 무작정 공연장을 오갔다. 그렇다고 대단한 무언가를 한 것도 아니다. 그저 멍하니 앉아서 음악을 감상하다가 아름다운 선율에 마음이 붕 뜬 채로 잠시나마 현실에서 벗어나는 게 전부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쌓여왔던 피로에 대한 후폭풍이 잔잔한 우울감으로 밀려올 때마다, 선홍빛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음악 사이로 숨죽여 우는 게 그렇게 후련할 수 없었다. 

 

6월, 1학기 기말고사 일주일 전. 푹푹 찌는 날씨 때문인지 손끝에 잡히는 끈적이는 연필 기둥마저 불쾌하게 다가왔다. 도서관은 숨막히게 조용해서 집중이 되지 않았고, 자취방은 너무 포근해서 집중할 수 없었으며, 카페는 귀를 간지럽히는 소리들이 들려와 공부할 수 없었다. 오만가지 핑계가 나를 공부 바깥으로 내몰고 있었다. 여지껏 살면서 공부밖에 해본 적이 없음에도, 갑자기 공부만 아니라면 뭐든지 하고 싶고 또 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에 휩싸였다.

 

현실 도피는 언제나 공연이었다. 그래도 저녁에 공연을 관람하면 공부할 시간이 촉박해지니까, 그리고 그 조급함을 이용한다면 집중력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으니까. 또다시 말도 안되는 핑계를 가져다 붙이며 공연장 홈페이지에 주섬주섬 접속했다. 그러다가 발견했던 홈페이지 공지사항은 나를 새로운 충동으로 이끌었다. 

 

- 공연장 안내원 모집.

 

우연이었을까? 그 순간 음악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만일 공연장에서 일한다면 아름다움과 가장 가까이에서 지낼 수 있지 않을까. 단순히 공연을 보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공연의 일부가 되어보는 경험. 물론 내가 공연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미약하겠지만, 그래도 공연장과 보다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 무엇보다, 공부가 아닌 새로운 일. 

 

그런데 마감 기한이 이틀 남았는데 지원서는 언제 쓰지. 애초에 언론정보를 공부하는 내가 음악 분야에 어울릴까. 학교 생활이랑 병행할 자신은 있는건가. 온갖 잡다한 생각에 머리가 흐려지던 찰나, 나는 겨우겨우 지원서를 기한 맞춰 제출하고 기말 시험들 사이에 면접까지 다녀왔다. 그렇게 선뜻 다가온 7월, 나는 공연장에 입사했다. 하우스 어텐던트라는 그럴듯한 명찰을 단 채로. 이렇게 갑자기.

 

 

- 다음 편에 계속

 

 

에디터 고은샘.jpg

 

 

[고은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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