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악해서 다행이야 [영화]

달콤함과 흥겨움을 나누는 신비한 방식
글 입력 2023.12.2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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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겨울 영화를 찾는 이들에게, 조용하게 흥겨운 영화, <어린 소녀들> (Le pupille, 2022)을 소개한다.

 

이 영화는 작가 엘사 모란테가 1971년 크리스마스에, 그의 친구 고프레도 포피에게 쓴 편지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한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 편지가 정확히 어떤 내용이었을지 궁금해짐과 동시에,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다른 작품들도 궁금해졌다. (아마도 다음 개봉작이 될 <키메라>는 제76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으로 초청되었다.) 편지 하나에서 영감을 받아 또 다른 귀여운 편지 같은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으니.

 

아이들의 눈동자와 노래로 편지의 문을 열고 닫는 이 영화는, ‘이 영화의 교훈은 모르겠고, 운명은 신비한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노랫말로 끝을 맺는다.

 

‘신비한 방식’이라.

 

내가 이 영화 속에서 운명이 신비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걸 봤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분명 신비한 방식으로 뭔가를 얻었다는 건 확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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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크리스마스이브, 어느 가톨릭 여자 학교 아이들이 추위에 덜덜 떨며 크리스마스 자정에 봉헌하러 올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을 준비한다. 천사의 옷을 입고 날개, 하트를 달며 준비하던 아이들은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오자 한 줄로 서서 듣는데, 자신의 날개를 잃어버린 ‘세라피나’는 수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자신의 날개를 발견한다.

 

세라피나는 날개를 주우러 라디오 가까이 다가가고, 그 움직임 때문에 라디오 전파가 흔들린다. 대신 웬 노래가 흘러나온다.

 

키스, 키스해 줘, 베이비. 내 작은 입술에.

 

아이들은 노래를 따라 부르며 춤을 추고, 세라피나는 곤란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서 이 광경을 바라본다. 세상 즐겁게 노래를 즐기던 이 짧은 시간은, 이 모습을 보고 기함을 한 수녀원장에 의해 끝난다. 수녀원장은 급기야 불경한 노래를 입에 담은 아이들의 혀를 비누로 씻긴다.

 

수녀원장이 자신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는 세라피나에게 노래 가사를 기억하는지 묻자, 세라피나는 그 노래 가사를 읊는다.

 

키스, 키스.. 키스해 줘, 베이비. 내 작은 입술에…

 

수녀원장은 가사를 기억하는 세라피나가 다른 아이들보다 더 죄가 크다고 말하며, 세라피나가 사악하다고 말한다. 

 

사악함은 의도치 않게 발현될 때도 있거든.

그러니까 세라피나는 사악한 거야. 

 

달콤한 노래와의 달콤한 시간은, 수녀원장이 세라피나를 사악한 아이로 만드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노래를 들은 후로, 세라피나의 머릿속에 그 노래가 계속 울린다.

 

키스, 키스.. 키스해 줘, 베이비. 내 작은 입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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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몇 시간이 흘러 자정이 되고, 사람들은 각자 작은 식료품을 들고 와서 수녀원장에게 건네며 바라는 것을 말한다. 아이들은 신성한 천사의 모습을 했지만 졸린 얼굴을 하고 마치 그림처럼 매달려서, 사람들이 기도하는 대상의 이름을 의무적으로 읊을 뿐이다. 그때, 한 여자가 상기된 표정으로 다가온다.

 

실례합니다, 제가 품위 있는 케이크를 준비해 왔어요.

만드는 데 계란 70개가 들어갔답니다.

‘추파 잉글레세’란 거예요.

 

그러고는 아이들에게 다가가, 다른 여자가 자기 남자를 꼬셨는데 넘어갔다며 그 남자가 정신 차리라고 기도해달라고 말한다. 수녀원장은 다급히 여자를 보내려 하고, 여자는 아이들에게 케이크를 가져왔다며 잘 기도해달라고 다시 한번 강조한다.

 

크림이랑 초콜릿이 가득해.

 

아이들은 케이크라는 말에 고개를 든다. 케이크라니.

 

드디어 다음 날 아침 식사시간, 마지막으로 케이크를 먹을 차례였다. 하지만 케이크를 자르려는 순간, 수녀원장은 그 케이크를 주교에게 선물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자신의 몫의 케이크를 포기하길 권한다. 예수님을 위한 희생이라면서.

 

아이들은 하나둘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세라피나만 자리에 앉아있다.

 

세라피나, 내 말 들었지?

왜 안 일어났어? 다른 선한 소녀들은 일어났잖아. 넌?

 

긴장한 아이들의 눈동자가 세라피나를 향하고, 수녀원장의 압박이 공기를 더 차갑게 만들던 그 순간, 우리의 세라피나는 자신의 ‘사악함’을 발휘한다.

 

빨갛고 예쁜 케이크를 위해!


*


수녀원장은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철저히 아이들을 떨어뜨려놓는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욕망하고 즐기는 건 사악한 것이라고 하면서, 세라피나를 사악한 아이로 만들기까지 한다. 하지만 진짜 사악한 건 그 노래와 세라피나가 아니라, 나눌만한 사람들과 나누고 받아야 할 사람에겐 주는 걸 아까워만 하는 수녀원장일 것이다.

 

아마도 배려와 사랑의 마음보다는 겉치레나 이득이 더 중요했던 어른들은 (특히 수녀원장은) 크리스마스 정신이라는 걸 아이들에게만 요구한다.

반대로 세라피나는 마지막에 자신의 ‘사악함’(물론 세라피나는 사악한 아이가 아니지만)을 이용해서라도 수녀원장이 강요하던 그 크리스마스 정신을 나눈다. 그리고 친구들은 이렇게 말한다.

 

세라피나가 사악해서 다행이야.

 

조용하고, 말도 잘 듣고, 친구들에게 작은 요구도 잘 하지 못하던 소심하고 착한 세라피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를 들은 후 사악하다는 말을 듣고, 계속 머릿속에서 울리는 노래 때문에 자신이 정말 사악하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과감해진 듯하다.

 

나는 이미 사악하니까, 사악한 내 마음이 가는 대로!의 마음이었을까?

 

어쨌든 그랬기에 크리스마스 정신을 친구들과 나눌 수 있었으니, 그리고 달콤한 케이크를 나눌 수 있었으니, 아이들의 말대로 다행인 셈이 되었다. 아니, 세라피나가 ‘다행’으로 휘리릭 바꾼 셈이다.

 

끝, 이야기의 교훈은?

모른다네, 알게 뭐람?

운명은 신비한 방식으로 움직이지.

그러니까 이 노랫말은 왠지, 추위는 축복이고 지옥에는 불이 가득하다는 수녀의 말을 들은 그날 불을 가만히 바라보던 세라피나의 모습부터, 마지막에 선을 행하고 즐겁게 활짝 웃는 모습까지, 보통 지혜로운 게 아닌 세라피나가 자신의 ‘사악함’을 이용해 달콤함과 선함과 즐거움을 만들기까지의 이 짧고 귀여운 이야기를 왜 만들었는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별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랑스러운 이야기니까. 이런 사랑스러움이라면, 교훈은 정말 알게 뭐람. 그거면 됐지. 그리고 사실 이토록 사랑스러우면 별 이야기가 아닌 게 아니게 된다.

 

하지만 또 분명히 이런 걸 느끼게 해준다. 네가 사악해서 다행이야,라고 말하는 아이들의 순수함이 움직이는 방식은 사실 진짜 사악한 어른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하고 흥겹다는걸 말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걸 느끼게 해준다. 이런 달콤하고 흥겨운 건, 아무래도 함께 나눠야 한다는 걸.

 

이게 내가 얻은 것들이다. 내 안의 사악함도, 세라피나처럼 (세라피나는 사악한 아이가 아니긴 했지만) 선한 방향으로 잘 써먹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그리고 잘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을 느꼈으니, 이 40분 길이의 이탈리아 영화에서 뭔가 ‘신비한 방식’으로 산뜻한 교훈을 얻은 셈이다.


이 영화에서 세라피나가 왜 사악해서 다행이었는지, 어떻게 선을 행했는지, 케이크는 어떤 이들의 입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 보고 나면, 이 노래 같은 흥겨움을 잔잔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노래가 머릿속에서 맴돌 수도 있다.


계속, 춤추는 걸 마다할 수 없을 만큼, 사악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만큼.

 


 

 

[강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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