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분위기를 튕겨내는 기분 [영화]

찰리 브라운과 나는 왜 우울했을까
글 입력 2023.12.0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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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몇 주 동안 연말 특유의 분위기를 꽤 잘 즐겼다. 일찌감치 11월부터 연말에 꼭 찾게 되는 몇 개의 영화들을 봤고, 연말이면 귀가 먼저 찾는 음악을 들었다.

 

앞으로 몇 주를 더 즐겨야 하는데, 너무 일찍이 연말 분위기를 즐기기 시작해서 남은 몇 주 동안 봤던 것을 또 보고 듣던 걸 계속 들어야 하는지, 진짜 연말을 위해 지금은 이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벗어나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12월의 초반이 된 지금은 예상대로, 이미 그 연말 분위기란 걸 다 즐기고 보낸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올해는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는 것에 꽤 만족한다.


올해의 나는 이런데, 작년까지 한 삼 년 동안은 도무지 이 특유의 연말 분위기를 도저히 느낄 수가 없었다.

 

일단 내가 생각하는 ‘연말 분위기’는 무조건 즐겁고 밝고 신나는 게 아니다. 중요한 지점은, 화려하든 소소하든 춥지만 따뜻하고 포근하고 꽤 설레야 한다는 것이다. 평소처럼 조용하고 차분하고 외로워도 된다.

 

예를 들면, 노라 에프론의 겨울 영화들이나, <당신이 잠든 사이에>나 <나 홀로 집에>나 <캐롤> 같은 영화들을 보게 되고,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연말의 겨울 노래들을 듣고 싶어지는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연말 분위기를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바랐던 게 이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분명 그전까지는 저절로 느껴지던 것들이었고, 그래서 매년 그 정도는 다를지언정 잘 즐기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때는 저절로 느껴지기는커녕, 어째 눈이 오는 겨울과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관한 영화들을 봐도, 그런 느낌이 물씬 나는 노래를 들어도, 연말 느낌으로 꾸며놓은 카페를 가도 그런 연말 분위기는 그저 주변 사람들과 사물들에만 맴돌 뿐 나에겐 오지 않았다.

 

나 혼자 그다음 해 1월로 넘어가 있는 느낌, 한 11월 초쯤 잠이 들어 깨어나 보니 내년인 것 같은 느낌이랄까?

 

차라리 누군가 내 연말 느낌을 훔쳐 간 느낌이었다면 나았을 것이다. 그냥, 훔쳐 갔다 보다, 하면 될 것 같으니까.

 

근데 이건, 누가 내게 뭘 한 게 아니라, 나 자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이 (원하지 않았는데)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연말을 보내게 될 것만 같아서 더 우울해졌다.

 

그래서 나는 계속 생각했다.

 

왜 나에게 잘도 와서 붙던 연말 분위기가 이제는 안 오는 거지?


 

 

 

나는 몇 주 전부터 겨울 날씨가 되면 어김없이 듣게 되는 빈스 과랄디의 찰리 브라운 사운드트랙 앨범들도 듣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영화 <찰리 브라운의 크리스마스>(A Charlie Brown Christmas, 1965)도 오랜만에 보게 되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에도 우울한 찰리 브라운을 가만히 보다가, 그런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지난 몇 년간의 내가 이 찰리 브라운의 모습과 비슷했겠구나.

 

찰리 브라운은 기본적으로 가라앉아있는 아이라, 친구들은 ‘우울함’을 말할 때 찰리 브라운을 대신 넣어 말하기도 한다. “Maybe Lucy’s right. Of all the Charlie Browns in the world, you’re the Charlie Browniest. (루시 말이 맞나 봐. 여러 찰리 브라운 중 네가 가장 우울한 찰리 브라운이라고.)” 이렇게. (크리스마스가 즐겁지 않아 우울한 찰리 브라운에게 라이너스가 하는 말이다.)

 

또, 찰리 브라운과 그의 친구들은 꽤 냉소적이다. (그래서 더 정확하고 냉철하게 세상사를 바라보는 것 같긴 하다. 어떨 때는, 말이 너무 잔인한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하며 웃게 될 정도이다.)

 

그리고 찰리 브라운은, 특유의 의기소침하고 기본적으로 약간 가라앉아있고 우울할 때가 많은 성격에 그 냉소가 더해져서 그런지, 가끔 폭발하기도 한다. 그렇게 폭발해 봤자 다른 친구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런 성격에,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우울을 깔고 있는 이 아이가 크리스마스에 우울함을 느끼는 건 꽤 말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느낌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나한테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라이너스.

크리스마스가 오는데 기쁘지 않아.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난 크리스마스랑 안 맞나 봐.

선물 받는 것도 좋고 카드 보내는 것도 좋고

트리 꾸미는 것도 다 좋은데 기쁘지가 않아.

결국 우울해지더라고. 

 

이런. 아무도 카드를 안 보냈네.

그냥 크리스마스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왜 크리스마스를 만들어?

아무도 날 안 좋아한다는 걸 왜 강조해야 하지?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부터 이미, 주변의 풍경과는 달리 자신만 크리스마스를 즐기지 못하는 것 같아 기쁘지 않던 찰리 브라운은 루시의 제안으로 크리스마스 연극의 연출을 맡게 된다. 그렇게 찰리 브라운은 연극 연출에 열정을 보이지만, 그것조차 마음처럼 되지 않아 우울함과 답답함이 더해져 간다.

 

역시나 제대로 되는 게 없는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집을 꾸며 상을 받은 스누피마저 상업주의에 물든 것 같고, 그래도 잘 해보고 싶은 연극은 마음처럼 되지 않고, 친구들은 잘 따라주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이 가져온 트리가 크고 멋있는 알루미늄 트리가 아니라고 비웃기도 하는, 노력해도 여전히 기쁘지 않은 크리스마스. 기뻐야 할 것 같은데 왜 나는 기쁘지 않은 건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찰리 브라운은 결국 또 폭발한다.

 

난 하는 것마다 엉망이야. 난 정말 크리스마스와 안 맞나 봐.

누가 크리스마스가 어떤 건지 좀 알려줘요.

 

다행히 마지막에 찰리 브라운은 라이너스와 친구들 덕분에 마침내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게 된다. 라이너스가 친구의 말을 듣고, 연극을 준비하던 무대 한가운데에서 핀 조명을 받으며 크리스마스가 어떤 날인지에 대해 그 정의를 이야기해주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찰리 브라운. 크리스마스가 뭔지 말해 줄게.

 

찰리 브라운은 라이너스의 말을 듣고는 마침내 평온해지고, 친구들도 트리를 같이 꾸미고 노래를 부른다.


*

 

찰리 브라운과 작년까지 몇 년 동안의 나의 공통점은 자신이 주변만큼 설레거나 행복한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 그러니까 ‘뭔가 느껴져야 할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점은, 찰리 브라운에게는 ‘왜’라는 해답이 있었고, 나에게는 없었다는 것이다. 찰리 브라운은 즐거워야 할 날이 즐겁지 않아 우울했고, 그날을 즐길 수 있기 위해서는 이날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었다. 그걸 알지 못해서 이해도 가지 않고 우울하기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즐거워야 할 시기가 즐겁지 않아 우울했지만, 그 시기를 즐길 수 있기 위해서 딱 필요한 뭔가가 없었다. 나에게 크리스마스란 그저 연말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정점의 날이라는 것의 의미만 있으니, 그때의 내가 라이너스의 이야기를 들어도 찰리 브라운과는 달리 별 감흥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평온해진 찰리 브라운을 보며, 그때의 나에게 필요했던 것이 있었을지 생각해 봤다. 그러다 보니 크리스마스와 연말뿐만이 아니라, 나에게 사실 더 의미가 있는 다른 날들에도 그날의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던 그때의 내가 왜 그랬을지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왜 즐겁지도 않고 감사함도 느끼지 못한 내가 그렇게 계속 분위기를 튕겨내고만 있었는지. 분위기를 튕겨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했어야 했을지.

 

결국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뿐이었다. 내가 느껴야 할 것 같던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던 건 누가 나에게 뭘 어떻게 한 게 아니라, 그 분위기가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던 것도 아니라, 그때의 내가 포근함과 즐거움이라는 것에 무감각했기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그 연말의 분위기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분위기에도 반응하지 못한 채, 주변의 공기와 섞이기는커녕 튕겨내고만 있었던 것이다.

 

또, 그래서 아마도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어도 평소처럼 어서 혼자가 되고 싶었을 것이며, 음악과 영화를 틀어도 섞이지 못했던 것이고, 연말에 즐거운 마음을 요만큼도 느끼지 못하고 이제 곧 한 해가 끝나버린다는 생각만 하면서 더 우울해지기만 했던 것이다. 생일 같은 다른 의미 있는 날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도대체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찾아내려는 건 좀 의미 없는 일인 것 같기도 하다.


*


이게, 연말의 즐거움을 되찾은 느낌인 지금의 내가 크리스마스에 우울했던 찰리 브라운을 보며 한 생각이다.

 

그리고 또 생각했던 건,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든 해의 어느 시기가 똑같지 않다는 것이다.

 

막상 즐겁지 않다는 걸 느낄 때면 ‘그래, 이번은 그냥 이런 거지’라고 생각하면서 나만 동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신경 쓰지 않는 게 좀 어렵지만, 이번에 오랜만에 꽤 즐거운 마음으로 이 시기를 보내고 있으려니 ‘그래, 그때는 그냥 그랬던 거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 나와 찰리 브라운 같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아주 많을 거라는 것도. 그래서 왠지 나중에는 ‘그래, 이번은 그냥 이런 거지’라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이번에 이 영화를 보면서 새롭게 생각한 건데, 만약 주변의 분위기를 튕겨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떨쳐내고 싶을 때가 오면, 찰리 브라운처럼 날 좀 어떻게 해달라고 소리쳐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어쩌면 그 작은 트리 같은 게 있을 수도 있고, 라이너스 같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라이너스 같은 친구가 되는 순간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난 이 트리가 안 예쁘다고 생각한 적 없어.

꽤 괜찮은 트리라고.

조금만 사랑을 주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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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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