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장거리 비행, 그렇게 다시 땅으로 [사람]

글 입력 2023.12.0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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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를 탄다. 그전까진 내가 늘 보던 창밖 풍경이, 일상을 향유하던 장소가 열두시간, 하루 반나절 후면 달라져 있을 것임을 실감하지 못한다. 안전벨트 사인이 울리고, 비행기가 이륙하기 시작한다. 비행기는 천천히 땅으로부터 멀어져서 하늘 위로 비상한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조심스럽게 창문 커버를 올리고, 바깥 상황을 살피면, 항상 올려다만 보던 풍경이 내 눈 앞에 펼쳐진다. 티끌 하나 없이 맑고 푸른 하늘과 허이연 구름.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고, 그제야 비로소 내가 어딘가로 떠나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오늘 메뉴에 대한 안내방송 후, 승무원분들이 카트를 끌고 복도를 걸어온다. 삶에서 먹는 즐거움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나에게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주요리 특유의 감칠맛이 부드럽게 혀를 감싸고, 그 맛에 익숙해질 때쯤 샐러드나 과일 요리를 먹어주는 것을 반복하면 한 끼의 행복이 완성된다. 같이 제공해 주는 모닝빵도 의외의 별미다. 분명 아는 맛인데, 따뜻한 빵에 버터를 발라서 한 입 베어 물면, 머릿속에서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콘체르토 일 악장이 울려 퍼진다.

 

아주 어렸을 때는 장시간 비행기를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건조하고 막힌 공간에 머물려니 답답했고, 온종일 같은 자세로 앉아있다 보니까 이곳저곳이 쑤시고 머리가 아팠다. 시공간이 멈춰버린 듯한 지루함에 비행기 서비스에 내장된 게임을 하며 시간을 죽였다.

 

나이를 하나둘 먹어가면서, 오롯이 쉴 수 있게 되는 날이 점점 없어짐을 느낀다. 쉬는 날에도 다음 날 업무를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낼지 고민한다. 하다못해 늘 한가득한 집안일도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장거리 비행은 다음 여정으로 가기 전 잠깐이나마 쉴 틈을 선물한다. 하루 종일 먹고, 자고, 영화를 보고, 묵은 생각들을 비워내며 진정한 휴식을 경험하게 한다. 평범한 기내식이 맛있게 느껴지던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직접 만들어 나 자신에게 대접하는 음식도 좋지만, 가끔은 메뉴 선정, 요리, 뒷정리에 쏟을 힘이 없을 때가 있는데, 기내에서 제공되는 음식은 또 다른 의미로 나에게 대접하는 소중한 선물이다.

 

열두시간 정도 비행을 하다 보면, 다섯시간 정도 남았을 때부터 한계가 온다. 다시 모니터 화면을 켜고, 지도를 열어 절반 넘게 날아온 길을 살펴본다.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나라지만, 나를 싣고 가는 비행기는 그 나라를 거쳐 왔다. 그 나라의 한 도시에 대한 짧은 설명을 읽어보며 궁금해한다. 설명만으로 머릿속에 풍경을 그려본다.

 

그러다가 옆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영화를 보면서 웃는 입, 피곤함에 절어 감긴 눈, 다양한 얼굴들을 마주 보며 이 사람들은 목적지를 향해 새로이 오고 있는 건지, 어디선가 돌아오고 있는 건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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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비행기는 임무를 다하고, 우아하게 착륙한다. 먼 길을 날아 왔지만, 결국에는 다시 땅을 밟는다.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짧은 작별 인사와 함께, 한 비행기를 타고 같이 비상했던 승객들은 뿔뿔이 흩어져 새로운 여정을 떠났다. 그렇게 찰나의 휴식이 끝나고 저마다 제 갈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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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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