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슬픔의 자리에서 비로소 열리는 가능성에 관하여 - 슬픔의 방문 [도서/문학]

슬픔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세상과 화해한다.
글 입력 2023.12.02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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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 골목길 한 독립 서점에 들어가 책 한 권을 골랐다. 저자의 이름과 책의 뒷 표지 문구를 읽자 마자 바로 구매했다. <시사IN> 주간지 기자인 장일호 기자의 에세이 <슬픔의 방문> 이다. 책 뒷 표지의 길지 않은 일곱 문장은 내 마음 속에서 오랫 동안 맴돌았다.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질문을 들고 책 앞에 서곤 했다. 삶도, 세계도, 타인도, 나 자신조차도 책에 포개어 읽었다. 책은 내가 들고 온 슬픔이 쉴 자리를 반드시 만들어 주었다. 슬픔의 얼굴은 구체적이었다. 나는 아프고 다친 채로도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원했다. 고통으로 부서진 자리마다 열리는 가능성을 책 속에서 찾았다. 죽고, 아프고, 다치고, 미친 사람들이 즐비한 책 사이를 헤매며 내 삶의 마디들을 만들어 갔다.

 

 

<시사 IN>을 구독 중인 나에게 저자의 이름은 익숙했다. 장일호 기자는 소외되고 잊혀진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는 세상에서 밀려난 장소들과 사람들에 집중하며 깊이 있는 기사들로 이름을 알렸다.

 

<슬픔의 방문>은 장일호 기자의 어린 시절, 기자로서의 삶, 암 투병까지의 과정에서의 고뇌들을 집적적으로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필연적으로 슬픔과 함께해야 하는 삶 속에서 슬픔과 나란히 하는 법을 알고자 한다.

 

 

어딘가 단단히 고장 난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다. 이 멀미 나는 격차들이 어디서 오는지 궁금했다. 기자라는 직업은 그 숙제를 얼마간 해결해 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 ‘지식인’ 세계에 진입했을 때 나는 그들과 되도록 최대한 비슷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게 가난을 이해하고 싶은 게 아니라 벗어나고 싶은 것이었음을 그제야 알았다. - p.69


 

기교를 사용하지 않고 어려운 단어 없이 가슴에 박히는 문장들을 좋아한다. 장일호 기자의 글이 그렇다. 그의 문장은 호흡이 짧고 내용은 담백하며 솔직하다.

 

트라우마 사건을 겪고 암 투병을 한 사람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담담하다. 슬픔을 슬픈 대로 표현하지 않는 담담함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린다. 그리고 이 무심함과 담담함은 슬픔과 나란히 할 용기를 준다. 슬픔과 마주할 용기가 생겼을 때 비로소 우리는 '홀로 서기'라는 목표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내 마음에는 할머니 무덤도 있고, 아빠 무덤도 있고, 종현의 무덤도 있다. 살아있는 일은 마음에 그렇게 몇 번이고 무덤을 만드는 일임을, 슬픔은 그 모든 일을 대표하는 감정이되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 p.85



내 삶과 고민들이 저자와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였을까. 지난 여름 구매했던 책이지만 언제나 책을 다시 들어 내가 밑줄 쳐 놓은 문장들을 다시 읽으면 아직도 눈물이 난다.

 

‘어딘가 단단히 고장난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것도, 가끔은 ‘술 병 뒤에 숨는’ 것도,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을 가지고 책 속으로 도망쳤던 것도. 내 머릿 속에 정리되지 않은 채 들어 있던 생각들을 담담한 문체로 저자가 대신 표현해주는 듯 했다. 그리고 이후 <시사 IN>에서 장일호 기자의 글을 만나게 되었을 땐 그 전과 사뭇 다르게 읽혔다.

 

우리는 평생 슬픔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어디 슬픔 뿐이겠는가. 우울, 불안, 무력감, 비참함 … 필연적으로 함께해야 할 부정적인 감정들이 무수하다. 살면서 완벽하게 행복한 날은 없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온전한 건강과 기분을 유지하는 날이 며칠이나 될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슬픔이라는 고약한 손님에게 다정해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혹독한 현실에 치여 갈 곳을 잃었다면, 그럼에도 세상과 화해하길 바란다면 장일호 기자의 <슬픔의 방문> 에세이를 읽어보길 바란다. 잠시 책으로 도피해도 좋다. 답을 찾지 못해도 좋다. 저자의 솔직한 경험과 성찰의 목소리를 듣는 자체 만으로도 조금의 회복이 될 것이기에. 저자는 해결되지 않는 질문을 들고 책에 자신을 포개어 읽었고 우리는 이제 그의 책에 각자의 이야기를 포개어 읽을 수 있다.

 

언젠가 슬픔에도 다정하고 온기 어린 인사를 건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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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예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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