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불멸자는 '그리워할' 수 있을까 [만화]

글 입력 2023.11.17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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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받은 몇 안 되는 축복 중 하나는 필멸이다. 누구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은 대개 슬픔을 동반한다. 장례를 치르고 타인의 죽음을 추모하며 슬퍼하는 과정은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옳은 방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죽음은 본질적으로 거룩한 행위다. 존재함을 가장 뚜렷하게 깨닫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주장한 실존의 개념은 죽음에 빚을 지고 있다. 개체는 미래에 대한 가능성에 스스로를 던져 놓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모든 존재에 평등하고 필연적인 가능성은 곧 죽음이다. 그러니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만 살아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이고도 아름다운 논증인가.

 

한편 이 명제가 비껴가는 존재도 있다. 죽음을 잃고 존재를 잊은 불멸자가 그러하다. 그들은 덧없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홀로 떠밀려 가지 않는다. 수많은 주변인들이 태어나고 죽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이들의 시간관념은 일반인의 것과 비교할 수도 없다.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일은 퍽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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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장송의 프리렌>(야마다 카네히토・아베 츠카사, 2020)

 

 

만화 <장송의 프리렌>은 불멸자의 삶을 그려 낸다. 영생을 사는 엘프족 마법사 ‘프리렌’은 일행과 함께 마왕을 쓰러트린다. 이 작품이 보통의 판타지 만화와 다른 점이라면, 동료들과 함께하는 파란만장한 모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후 홀로 남은 불멸자의 삶을 담아낸다는 것이다.

 

프리렌을 제외한 동료들은 시간이 흘러 죽음을 맞이한다. 프리렌을 아끼던 용사 ‘힘멜’의 장례식에서 프리렌은 겪어 본 적 없는 종류의 슬픔을 느낀다. 그는 ‘죽음’의 진정한 의미와 그것이 남은 이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알지 못했다. 불멸자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타의로 거부된 슬픔. 프리렌은 동료를 보내며 낯선 감정과 처음 마주했다.

 

만화의 플롯은 그의 남은 여정을 따라간다. 그는 이전 동료들과 비슷한 직업의 마법사나 용사 들을 모아 새로운 일행을 꾸리며 또 다른 모험을 떠난다. 그 과정에서 프리렌은 주변인을 떠나보내고 또 새로이 맞는 방법을 배운다.

 

만화에서 시간의 흐름은 “용사 힘멜의 죽음으로부터 nn 년 후”로 표현된다. 단 한 줄의 이 문장은 불멸자가 필멸자를 대하는 다정한 태도를 보여 준다. 지루한 삶의 일부를 함께한 사람의 죽음을 잊지 않고 시간의 속도를 읽는 좌표로 삼는 것이다. 프리렌과 같은 불멸자가 느끼는 죽음은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이나 햇살에 녹는 눈사람 같은 것이다. 울음소리와 함께 첫 숨이 터지며 태어나 남은 이들의 눈물 속에 고요히 눈감는 일은 자연스러움의 극치다.

 

불멸자는 먼저 간 필멸자를 그리워할 수 있을까. 단순히 애도의 과정을 체득하고 실천하는 것만이 아니라, 진정 슬퍼하며 떠난 이를 온 마음으로 기억하는 일 말이다. 감히 불멸의 삶을 꿈꾸지도, 죽음을 직접 경험해 보지도 못한 나는 그럼에도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불멸자는 가늠할 수 없이 길고 긴 삶의 한가운데를 스쳐 지나간 이들을 기억한다. 필멸자의 입장으로는 숭고하기 그지없다. 나아가 수고스러운 행위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얼마나 많은 존재가 그들의 짧은 일부를 가져갔을까.

 

죽지 않는 자가 죽음을 통해서만 깨닫는 진리를 떠올린다. 죽음은 곧 끝이자 새로운 시작이다. 그들은 끝을 끝이라 받아들이고 아쉬워하며 슬퍼한다. 앞으로 마주할 무수한 끝과 시작에도 무료함을 느끼지 않고 매번 새로이 추도를 올릴 테다. 불멸자는 필히 그리워할 줄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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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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