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외국 작품 각색에 반영된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 [공연]

발레 <돈키호테>의 원작 극본과 국립발레단의 각색 극본 비교를 중심으로
글 입력 2023.11.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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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지나면서 점차 후텁지근한 공기가 몰려오자, 국립발레단은 여름의 더위와 정열을 소재로 하는 발레 작품 <돈키호테>를 관객에게 선보였다. 지난 4월 12일에서 16일 사이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 공연은 조금 특별했다. 유럽으로부터 수용한 발레 극본을 그대로 무대에 올리지 않고, 작가 정다영을 중심으로 원작의 플롯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국립발레단 측은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들을 보완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공연을 만들기 위해 플롯을 각색했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원작의 일부 장면들이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문화적 감수성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립발레단은 현대 한국 관객이 원작의 어느 부분에 공감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며, 이를 어떻게 우리 정서에 맞게 수정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현대 한국인이 어떤 문화적 감수성을 지니는지 되돌아볼 기회를 제공하며, 향후 한국의 문화예술이 외국 작품을 각색할 때 참고할만한 중요한 선례로 활용될 수 있다. 이러한 목적에서 발레 작품 <돈키호테>에 관한 기존 극본과 국립발레단의 각색 극본의 차이를 분석하고, 그 함의를 제시하고자 한다.

  

극본이 각색되면서 두드러지게 변화한 것은 돈키호테의 지배적인 가치관이다. 원작 발레의 프롤로그에는 기사도 문학에 깊은 영감을 받아 모험을 떠날 채비를 하는 돈키호테의 모습이 등장한다. 이는 그가 기사도 정신을 주된 원동력으로 삼아 행동하는 인물임을 암시한다. 더불어 1막 2장에서 돈키호테가 풍차와 결투하는 원인은 공동체를 위험으로부터 구출하겠다는 의협심에 기반한다. 그는 갑작스럽게 바람이 불어와 풍차 날개가 돌아가자 이를 거인이라 착각해 풍차를 향해 달려든다. 이처럼 원작 발레에서 돈키호테는 공동체의 영광을 선도하려 하는 영웅적 가치관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투철한 공동체적 정신을 지녔기에 공동체를 위해서라면 무모한 시도마저 서슴지 않는다.

 

한편 각색된 극본의 프롤로그는 돈키호테가 모험을 떠나는 원동력에서 사랑을 강조한다. 돈키호테의 꿈속에서 괴물이 둘시네아를 납치하자 돈키호테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이때 둘시네아는 돈키호테의 상상 속 연인이며, 이후의 장면들에서도 돈키호테는 그녀와의 사랑을 주목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 다른 사례가 바로 풍차와 결투하는 장면이다. 돈키호테는 연극을 보던 중 괴물 분장을 한 배우를 마주치게 되고, 이내 해당 배우가 자신의 꿈속에 등장해 둘시네아를 납치한 괴물이라고 혼동한다.

 

결국 돈키호테는 발작을 일으키다가 옆에 있던 풍차를 공격하는 것으로 극본이 각색되었다. 이러한 각색은 공동체적 가치관이 약화되고 개인화된 가치의 중요도가 높아진 현대 한국 사회를 반영한 부분이다. 현대 관객들이 돈키호테의 영웅적인 가치관에 공감하지 못할 수 있음을 고려하여, 국립발레단은 공동체의 이익이 아니라 개인적인 사랑을 지배적인 행동 동기로 삼는 인물로 돈키호테를 변모시켰다.

 

국립발레단의 각색 과정에서 두 번째로 변화한 것은 돈키호테와 남녀주인공의 관계이다. 이때의 남녀주인공은 각각 바질과 키트리로, 이들은 사회의 반대에 맞서 서로에 대한 사랑을 실현하는 인물들이다. 원작 발레의 1막과 2막에서 돈키호테는 남녀주인공과 적대적인 관계를 보인다. 돈키호테가 키트리를 둘시네아라고 착각해 키트리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남녀주인공의 사랑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물론 3막에서 이들은 협력 관계로 변모하지만, 그럼에도 원작 극본은 돈키호테를 묘사할 때 자신의 환상에 빠져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비이성적이고 무력한 노인의 측면을 강조한다.

 

반면 국립발레단의 각색본에서 돈키호테와 남녀주인공은 극의 초반부터 연대 관계를 형성한다. 이는 돈키호테가 둘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돕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각색본에서도 돈키호테는 키트리를 둘시네아라고 착각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1막 1장의 후반에 돈키호테는 자신의 오해를 곧바로 정정하고는 남녀주인공의 사랑을 응원한다. 이에 바질과 키트리는 돈키호테의 여정에 합류하게 되고, 셋은 1막 2장부터 극이 끝날 때까지 협력 관계를 유지한다.

 

이러한 각색의 배경에는 노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지우고자 하는 시도가 내포되어 있다. 국립발레단은 관객이 돈키호테를 괴팍하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노인으로 인식하기보다, 이상과 희망을 지닌 채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주는 지혜로운 노인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노인이 무력한 존재라는 고정관념에 대한 재인식이며, 더불어 기성세대와 현세대 간에 상호 이해가 가능하다는 가치관을 내포한 것으로, 관객들이 원작을 볼 때 느낄 수 있는 불편함을 없애고자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돈키호테의 상상 속 연인인 둘시네아가 관념적인 존재에서 보다 구체적인 존재로 변모하였다. 원작 극본에서 둘시네아는 구체성을 지니지 못한 추상적 존재였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그녀의 외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돈키호테>에서는 키트리 역할의 발레리나가 둘시네아까지 도맡아 1인 2역을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는 돈키호테조차 그녀의 실제 모습을 알지 못한다는 설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둘시네아는 적극적으로 행동을 취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만한 주체성을 지니지 못했다. 원작에서 둘시네아는 2막의 돈키호테의 꿈속에 출현하는데, 그녀는 숲의 요정들과 춤을 추는 것 외에 다른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반면 각색본의 둘시네아는 외관을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원작과 차이를 보인다. 국립발레단은 둘시네아의 역할을 키트리로부터 독립화해 별개의 배역으로 분리함으로써, 그녀가 하나의 독립적인 실체로 존재하도록 설정했다. 다음으로 둘시네아의 행동에서 적극성과 주체성이 강화되었다. 각색본의 2막 1장에는 둘시네아와 돈키호테 사이의 파드되가 추가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둘시네아는 돈키호테가 지속적으로 이상을 추구하도록 독려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그와 깊이 교감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와 같이 둘시네아와 관련된 각색의 변화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상향보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이상향을 추구하는 한국인의 정서를 고려한 결과이다. 우리가 오감으로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불완전한 존재에는 거리감을 느낀다는 점을 고려해 둘시네아의 구체성을 높임으로써 관객의 몰입 정도를 극대화하려 한 것이다.

 

국립발레단은 위와 같이 돈키호테의 주된 행동 동기, 돈키호테와 주변 인물 간의 관계, 그리고 돈키호테의 이상향인 둘시네아의 설정을 현대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변형하여 기존의 플롯을 재구성했다. 이로써 발레 <돈키호테>의 초연 당시와 시대적 간극이 존재하는 현 시점에서도 관객들이 극의 내용을 개연성 있게 느끼도록 노력했다. 이러한 국립발레단의 극본 개정 사례에 대한 논의가 향후 외국의 문화를 수용 및 개정하는 방안에 대한 지침으로 작용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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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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