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연한 물감 자국 하나로 작품을 만들어내다 - 에르베 튈레전

참 쉽고, 재미 있고, 디테일한 작품 세계 속으로
글 입력 2023.11.12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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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현생이 바쁘다는 핑계로 취미 생활을 미뤄둔 채 일상에 가까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공연이든 전시회든 무언가에 몰입하여 작가의 의도를 고심하고, 작품에 압도 당하기도 하고. 무엇이든 '향유'하기 위해 필요한 이 일련의 과정들이 어쩐지 지금 시기에는 참 버겁게 느껴진 것이 어쩌면 그 원인이리라.


그렇기에 누구나 쉽게 다가가 별 생각 없이 즐길 수 있는 작품을 선보이는 에르베 튈레의 이번 전시가 유독 끌렸던 것 같다. 그는 조형미술과 장식미술을 공부하고 광고 업계의 아트 다이렉트로 활동하다가 1994년부터 그림책 작업에 착수하며 다양한 놀이를 접목해 미술에 접근하는 새로운 개념의 작품을 보여 준다.


현장 어린이 교육가로도 활동 중이라는 그의 작품에서는 관람객에 대한 배려와 그들을 향해 던지는 재치있는 익살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의 작품을 통해 관람객은 더 이상 무언가를 향유만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는 역할로 자리할 수 있다.

 

지금부터 인상 깊었던 작품 몇 가지를 소개하며 그의 작품 세계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하고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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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베 튈레는 자신의 작품을 그저 캔버스 안의 작은 틀에 국한하지 않았다.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어떤 크기이든 그림이 그려질 공간과 물감, 그리고 함께 이 즐거운 놀이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만 있다면 그의 작품이 만들어질 준비는 완료된 것이다. 국경을 오가며 그는 관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대형 작품을 만드는  일에 착수했고 전시장 내에서는 그 당시 현장이 생생하게 담긴 사진을 확인해볼 수 있다.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 보면 작품의 작가들은 비단 에르베 튈레 뿐만이 아님을 눈치챌 수 있다. 연령, 성별을 가릴 것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작품의 한 구석을 담당하고, 그것이 모여 비로서 하나의 거대한 작품이 된다. 놀랍게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참여 했음에도 완성된 작품을 보면 너무나 조화롭다.

 

작품의 요소들은 각기 개성을 뽐내면서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질감 없이 어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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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마법같은 일이 가능한 것은 에르베 튈레가 가진 가치관과 그에 맞는 여러 역량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는 단순히 '보기 좋은 그림'을 만드는 일보다 작품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초점을 둔다. 다양한 참가자들이 함께하는 그룹 활동에서 튈레는 그들이 즉흥적인 작업을 마음껏 이어갈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물감을 실수로 엎어 생긴 자국, 가이드라인 없이 마음 가는 대로 그은 선, 뜻하지 않게 생긴 얼룩까지 그의 작품 세계에서는 그 어떠한 것도 허용될 뿐만 아니라 '환영'받는다. 그는 참여자들의 창의적인 에너지를 통제하지 않고 발산 할 수 있도록, 또한 그들의 결과물들이 한 데 모여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도록 그 기반을 마련해주는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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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베 튈레는 우연하게 생긴 얼룩이나 흔적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한 스푼 더해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는 재치를 지녔다. 마음 가는대로 덧칠한 듯한 페인트 자국을 원형으로 자르고 그 옆에 포크와 나이프를 두니 다채로운 플레이트가 완성되었고, 물감 자국이 뭍은 종이에 팔레트를 그리니 화가의 책상으로 둔갑하였다.


튈레는 자신의 작품과 관람객 사이를 잇는 대화를 중시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활동에는 참여자, 작가, 관람객을 아우르는 거대한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참여자의 즉흥적 에너지를 시발점 삼아 튈레는 그것을 총체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아이디어를 첨가해 작품을 완성하고, 그것을 보는 관람객은 또 다른 영감과 체험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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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내부에는 특이하게도 신발을 벗고 매트 위로 올라가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이 곳에서 튈레가 집필한 그림책을 직접 펼쳐 볼 수 있었다. 전시장 내 비치된 가이드 영상을 보고 책을 펼치기만 하면 그 누구라도 쉽게 튈레의 그림 세상 속으로 빠져들어 유쾌한 체험을 해볼 수 있다.


점점이 팔레트처럼 정갈하게 놓인 페이지 구석에서 책을 흔들어보라는 지문을 발견할 수 있다. 상하좌우로 열심히 책을 흔들고, 다음장을 넘기면 물감은 사방으로 펼쳐져 있다. 노란색과 파란색이 각 각 그려진 페이지도 흔들어보면 다음 순간 두 물감이 섞여 초록이라는 새로운 색을 만들어내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단순히 액자에 걸린 작품을 서서 관람하는 것이 아닌 관람객이 직접 그의 워크숍 그룹 활동의 참여자처럼 그림책을 넘겨보고, 문양이 그려진 상자를 쌓아보는 등 몸을 움직여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정말 인상 깊었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의 전시 구성은 튈레의 가치관에 다시 한번 확신을 주며 나도 모르는 새 그의 작품 세계에 함께 하고싶은 유대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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튈레의 작품이 특별한 또다른 이유는 단순함과 세밀함, 대척점과 같은 두 가지 특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앞서 밝힌 그의 가치관처럼 그는 누구나 쉽게 그려낼 수 있는 직선, 원 등 단순한 형태의 요소들로 작품을 구성한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한 눈에 쉽게 들어오면서도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런데 언뜻 단순해 보이는 그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안에 놀라울 정도의 디테일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은 그가 제작한 가방 디자인을 확대해 촬영한 것인데 박음질 하나 하나, 가방에 들어가는 패턴과 금장 장식의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고 표현되어 있다. 이렇듯 그의 작품은 단순하면서도 밀도 높은 완성도를 지님으로써 그 누구와도 다른 독창적인 매력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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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튈레의 작품은 공감각을 자극하는 표현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또다른 독창성을 지닌다. 사진 속 작품에는 형태만 그려진 음식들이 파란색, 주황색 두 가지 색으로만 채색이 되어 있는데 그림을 보는 것임에도 그 음식이 주는 온도를 느낄 수 있다.

 

가령 파란색으로 칠해진 체리를 보면 냉장고에서 막 꺼내 입에 넣은 체리의 시원한 식감이 떠오르고, 주황색으로 칠한 컵케이크는 갓 구워 모락 모락 김이 나는 빵을 한입 베어물었을 때의 따끈함을 떠올리게 한다.


이렇듯 에르베 튈레는 단순한 드로잉으로 시선을 사로 잡은 후 그만의 디테일과 기법, 아이디어를 첨가해 재치있는 작품들을 완성시키고, 나아가 이것을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예술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의 예술 세계가 얼마나 넓고 다양한 재미를 선사하는 지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별다른 생각과 노력을 들이지 않고 작품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보는 내내 정말 유쾌했다.

 

오랜기간 미뤄 둔 향유라는 취미 생활을 다시 이어가고 싶다는 의욕이 들만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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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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